귀신보다 더 무서운존재는...

이주호(인) 작성일 09.05.26 21:0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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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세계의 6대 살인마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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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틸라 더 훈 [attila the hun, 406~453]

 

로마를 멸망 직전까지 몰고갔던 훈족의 지도자 아틸라.
406년-453년까지 살았다고 전해지는 훈족의 왕입니다.
roman empire라고 불릴정도로 전 유럽을 정복했던 무시무시한 정복자입니다. 그 당시의 유럽인들은 그의 예기만 들어도 집 대문을 꼭꼭 걸어 잠궜다고 전해질 정도입니다.


attila the hun 훈족

중국 고대사에 나오는 흉노(匈奴)와도 관계가 있다고 보나, 한(漢)나라에 쫓겨 서쪽으로 간 흉노의 일부가 곧 훈족이라는 설에는 이론(異論)이 있다. 4세기에는 유럽으로 이동하여, 375년 흑해 북안(黑海北岸)의 동(東)고트족을 무찔러 그 대부분을 지배하에 두고, 이어서 다뉴브강 하류의 서(西)고트족에 육박했다. 서고트족의 일부는 훈족의 압박을 피하여 동(東)로마에 이주하였는데, 이것을 게르만 민족 대이동의 발단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4세기 말의 루아왕 때에는 오늘날의 헝가리 ·트란실바니아 일대를 지배했고, 다음의 아틸라왕 때에는 전*를 이루어, 주변의 게르만 제부족을 복속시켜 흑해 북안에서 라인강에 이르는 일대제국(一大帝國)을 수립했으나, 대제국으로서의 내부적 기틀이 잡혀 있지 않았다.

아틸라는 약탈을 일삼았고, 로마제국에 큰 위협을 주면서 다시 서진(西進), 갈리아에의 침입을 꾀하자 서로마의 장군 아이티우스는 451년 로마군(軍)과 게르만 제부족의 연합군을 이끌고 북프랑스의 카탈라우눔의 평야에서 이를 무찔러 격퇴시켰다. 그러나 그 후에도 아틸라는 이탈리아 침입을 꾀하는 등 훈족의 위협은 계속되었으나, 453년 갑작스런 죽음으로 무적의 대제국(大帝國)도 급격히 분열 ·쇠퇴하여 훈족은 다뉴브강 하류지방으로 후퇴, 타민족과 혼혈 ·동화되어 소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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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 더 키드 [billy the kid, 1859.11.23~1881.7.14]

 

본명 윌리엄 보니(william h.bonney). 뉴욕 출생. 21년의 짧은 생애에 21명의 사람들을 살해하였다. 본래 뉴욕에서 태어났으나 어릴 적에 양친과 함께 캔자스로 이주하였고, 아버지가 죽자 다시 뉴멕시코에 가서 살았다. 13∼15세 때 어머니를 욕보이려 한 남자를 죽인 것이 악의 길에 빠진 계기가 되었다고 전한다.

그 후 카우보이가 되었는데, 1878년 자기가 속한 목장과 다른 목장과의 싸움(세칭 링컨郡의 싸움)에서 열세인 자기편을 이끌고 대단한 싸움 솜씨를 보여 총잡이로서의 용명을 떨쳤다. 그러나 그 후부터는 무법자가 되어, 소도둑 같은 짓을 한 것으로 전한다. 한때 보안관 s.p.f.갤럿에게 항복하였다가 간수를 죽이고 도망쳤으나, 끝내 갤럿에게 사살되었다. 전설에는 그가 의적(義賊)으로 되어 있으나 근거는 없고, 도리어 잔인하고도 비정한 젊은이였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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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바토리 [elizabeth bathory, 1560~1614]

 

+ 처녀의 피로 목욕한 여인
+ 마녀, 혹은 흡혈귀라 불리는 실존인물
+1560년 transylvania[현 루마니아 서북부 고원지방]의 명문가
+ bathory가는 유럽제일의 합스 부르크가와 비견될 정도의 명문가 로 사촌은 헝가리 왕국의 수상


+ 배경

<에르체베트 바토리>는 실존하는 마녀, 혹은 흡혈귀로 불리운다. 트란실바니아 왕이나 폴란드 왕등을 배출한 굴지의 명문이었으나 막대한 재산과 영지를 잃지 않기 위해 근친 결혼을 많이 했고 때문에 집안에 * 사람이나 정신이상자가 많았다.

바토리 여백작이 이 비극적인 삶에 빠지기 전 그녀는 페렌츠 나다스디 백작의 아내였지만 용맹하기로 이름난 남편은 아내에게는 소홀했다고 한다. 항상 전쟁에 나가있는 남편 대신에 그녀는 항상 시어머니와 함께 지내야 했었는데 시어머니는 전통적인 장군 집안의 큰어른답게 매사 엄격하고 절도있는 매너를 <바토리>에게 세뇌 주입시켰다.

말만 결혼 생활이지 감옥이나 다름없는 규제속에서 그녀는 점차 말이 없고, 냉담하고, 음습한 여인으로 변모했다. 더욱이 <바토리가>의 유전병인 간질도 그녀를 정신적으로 돌아버리게 하는데 크게 일조했다. 바토리가는 *에 의한 유전병으로 유명해 숙부는 간질로 죽었고, 숙모는 황음에 빠져 남편 세명을 먼저 보낸 가문이었다.


+ 처녀의 피로 목욕하는 여인...

그러한 그녀에게 사악한 마법에 심취해 있던 시녀들이 접근해 왔는데 그녀는 시녀의 말을 듣고 마법에 빠져들기 시작했고 그녀는 하인과 시녀들의 꾀임에 빠져 농부의 딸들을 유인하여 마법의 실험대상으로 삼았다. 그것은 그녀의 영지에 살고 있는 농부의 딸들을 잔인하게 고문한 뒤에 살해하는 것이었다.

그뒤 1600년, 그녀의 남편 페렌츠 나다스디 백작이 죽고나자. 그녀는 많은 남자들을 자신의 성으로 끌어들여 관계를 맺었다. 그러면서 그녀는 그 남자들에게 사랑을 받기 위해서 또한 자신의 젊음을 위해서 엽기적인 행각을 저지르게 된다.


어느날 머리를 빗겨주던 하녀가 실수를 하여 머리가 심하게 땡겨지자, bathory는 하녀의 따귀를 때렸고, 좀 심하게 때렸는지 하녀의 뺨이 손톱에 긁혀서 피가 났다. 그런데 그 피가 bathoty의 손 에 떨어졌고, bathoty는 순간적으로 손의 피부가 탱탱하게 변하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젊은 처녀의 피가 젊음을 되찾을 수 있는 비밀이라 생각한 그녀는 그 이후 수시로 처녀를 잡아다 죽여서, 그 피로 목욕을 했다.


<바토리>는 농가의 처녀들을 성안의 하녀로 사들였다. 그뒤 처녀들을 일단 잘 먹여 사육시킨 뒤 때가 되면 한명 한명, 또는 단체로 살해하여 그 피로 맛사지겸 목욕을 하는 엽기적 행각을 저지르게 된다. 그러나 점점 피부를 젊게 만드는 본래의 목적보다는 처녀들이 고통 속에 죽어 갈 때, 처녀들의 피를 받아 마실 때, 피를 욕조 가득 채우고 목욕 할 때 묘한 희열과 쾌감을 그녀는 느끼게 된다.


+ 잔혹한 성품....

그녀의 잔혹한 성품을 말해주는 것 중에 배나무 사건이 있었다. 그녀의 영지에 사는 농부의 딸 하나가 배가 고픈 나머지 배를 하나 훔쳐먹는 사건이 발생했다. 에르체베트 바토리에게 아첨을 하는 하인들이 이 소녀를 밀고했다.

에르체베트 바토리는 소녀를 잡아다가 고문하기로 했다. 그러나 소녀는 고문을 하기도 전에 배를 따먹은 일을 자백하고 말았다. 에르체베트 바토리는 소녀를 용서하기가 싫었다. 그러나 많은 농부들이 지켜보고 있어서 관대한 처분을 내린다면서 배나무에 하룻동안 묶어놓록 했다.

그 대신 그녀는 하녀에게 시켜 이 소녀의 전신에 꿀을 발라놓도록 했다. 꿀 냄새를 맡은 벌들이 사방에서 날아오기 시작했다. 소녀는 처절한 비명을 질렀으나 소용이 없었다. 수천, 수만 마리의 벌들에게 쏘인 소녀는 온몸이 퉁퉁 부어서 죽었다. 그래도 벌들은 그치지 않고 날아와 그녀의 몸에 달라붙은 꿀을 먹으려고 아우성이었다. 그녀가 죽자 이번에는 개미와 구더기가 달려들어 그녀의 시체를 파먹었다. 농부들은 에르체베트 바토리의 잔인한 처서에 진저리를 쳤다. 그러나 그녀는 헝가리의 왕녀였다. 권력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에 농부들은 감히 불평을 말할 수도 없었다.


+ 잔인한 바토리가 즐겨 사용했다던 대표적인 고문도구

> 철의 인형 또는 철의 여인

<바토리>가 독일의 유명한 기술자에게 특별 주문 제작한 것으로 실제 사람처럼 아주 정교하게 만든 철제 인형였다고 한다. 등신대의 벌거벗은 인형으로 피부는 사람과 똑같은 색이고, 기계장치로 눈과 입도 열리고 머리카락도 있었다. 여자를 벌거벗겨 인형 앞에 놓으면 톱니바퀴가 움직여 인형은 두 팔을 올려 여자를 감싸 안는다. 다음에 인형의 가슴이 열리는데 그 안은 비어있다.
좌우로 펼처진 문에 다섯 개의 칼날이 있다. 인형의 몸안에 갇힌 여자는 필사적이지만 칼로 전신을 찔려 뼈가 부서지고 처녀의 온몸을 사정없이 찌르면서 피를 뽑아낸다. 그 피는 인형안의 홈 을 따라 흘러 <바토리>의 욕조로 쏟아 지는 것이다.

> 철의 새장

사람이 겨우 들어갈 정도의 새장에 여자들 무리하게 집어넣고 도르레를 사용해 허공에 매단다. 다음에 시녀들이 벽의 스위치를 누르면 몇 십개의 가시가 일제히 새장의 창살에서 안쪽으로 튀어나온다. 공포에 사로잡힌 여자들은 몸을 움직여 가시를 피하려고 하지만 새장은 허공에서 크게 흔들리기 시작한다. 여자의 육체는 새장안에서 잘게 잘라지고 부수어져 그 피는 밑에 뚫린 많은 구멍에서 아래에 있는 큰 그릇 안으로 흘러내리게 된다. 새장 아래에 있던 <바토리>는 그 쏟아지는 피를 맞으며 샤워를 했다.


+ 바토리의 최후...

<바토리>가 사는 체이터성에 들어간 처녀들은 두번 다시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음에도 성밖의 가난한 백성들은 거금의 돈을 탐내 자신의 딸들을 성으로 들여보냈다.
처녀사냥에 나선 모집책은 하녀 "토로코"와 간호사 "일로나"가 맡았고 피를 짜내는 데는 시종과 마법사들도 동원됐다고 한다.

이 엄청난 사건이 들통나게 된 것은 농부들의 딸로도 피가 부족해진 나머지 귀족의 딸에게 까지 손대다 꼬투리를 잡혔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고 체이테성에 대한 소문이 널리 퍼지게 되어 체이테성에 악녀들이 산다는 소문에서부터 흡혈귀가 산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나돌게 되는 바람에 사람들은 체이테성에 가까이 가는 것을 두려워 하게 되고 교구의 한 사제도 이와 같은 소문을 듣게되어 들통이 났다는 두가지 설이 있다.

그 일로 인해서 <바토리>의 끔찍한 취미생활이 들어나게 되었고 1610년 12월 30일, 바토리의 사촌인 기오르기 투르소 백작이 일단의 군인과 기병대를 이끌고 그 성에 도착하게 되었다.

그때 마침 피의 의식이 진행되는 참이었다. 성에 들어간 백작은 지하 감옥에서 수십 구의 시체와 함께 온몸에 바늘로 찔린 자국이 수없이 난 채 아직 살아있는 희생자를 숱하게 발견했다.
그 정도로 여백작은 만족하지 못했는지 많은 수의 소녀들이 아직도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바토리"는 죽인 처녀들의 수를 일일이 일기에 적어둬서 그걸 근거로 해서 보면 죽인 여자들의 수는 612명 이나 되었다고 한다』

왕가의 친척이었던 덕분에 목숨만은 건졌지만, 여백작은 모든 창문과 문이 폐쇄된 방에서 3년 반을 살다가 1614년 8월 21일에 54살의 나이로 죽었다고 한다.

그녀의 동조자들은 손가락, 발가락을 하나씩 자른 뒤 화형에처해졌다고 한다. 에르체베트 바토리 여백작 사건은 그 지역에 온갖 소문과 전설이 나도는 계기가 되었다. 그중 많은 전설은 여백작이 죽어서도 피의 쾌락을 찾아 계속 나타났고, 결국 진정한 의미의 흡혈귀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여담

여담으로 15세기 프랑스에 "질 드 레"라는 후작이 있었다.
잔다르크에 버금가는 영웅으로 전쟁에서 맹활약 했던 장군인데 잔다르크가 마녀사냥에 휩싸여 화형에 처해지자 신의 존재를 부인하고는 동성애의 타락에 빠져버린 사람이다.

이 사람이 3~6백명의 소년들을 농락해 살해한 죄로 1440년 처형 되면서

"지금까지 나만한 행동을 한 사람은 없었고 금후로도 나만한 사람이 나오면 내손에 장을 지진다"

라고 호언장담 했었다고 하는데 그 기록을 여지없이 깬 여자가 바로 <바토리>였던 것이다.

그 뒤로 "바토리"의 흡혈사건은 모든 흡혈귀 소설의 원형이 됐으며 많은 영화로도 각색돼 오늘날 우리들의 간담을 오싹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 etc..

elizabeth bathory는 엄청나게 미인이었으며, 천사처럼 선해보이는 용모였고, 특히 피부가 거의 환상에 가까울 정도로 우유빛이었다고 전한다.

bathory는 제대로 교육을 받은 여자였을 뿐 아니라 남자를 능가할 정도로 엄청나게 똑똑했다고 하는데, 당시의 군주들이 거의 글을 읽지 못했던 반면, bathory는 헝가리어는 물론 라틴어, 로마어에도 능통했으며 지적 수준이 상당한 경지에 올라있었다고 전한다.

그녀가 죽은 후에도 100년 이상 bathory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이 금지되어있었을 만큼, 악명이 하늘을 찔렀다.

bram stoker의 드라큘라는 루마니아 군주 vlad dracula를 모델로 한 것이 아니라, 실은 바로 이 여자 elizabeth bathory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여럿 있다.

erzsebet bathory 백작 부인의 재판 기록은 아직도 헝가리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그 사건이 일어났던 지역에서는 아직도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금기시 되어있으며, 주로 슬로바키아 출신 하녀들을 죽였기 때문에 이름 대신 the hungarian whore라는 별명으로 불린다고 하는데 이 지역의 인종 분포가 주로 헝가리 인과 슬라브 적이어서 직역하자면 헝가리 창x쯤 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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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 더 리퍼 [jack the ripper, 19세기? ~ ?]


잭 더 리퍼는 역사상 최초로 등장한 연쇄살인마는 아닐지 몰라도, 적어도 가장 ‘현대적인’ 연쇄살인범의 범주에서는 최고 고참이다.

 

19세기 말 빅토리아 후기의 영국 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았던 이 희대의 인물은 근대사회의 총아인 대중 매체를 통해 전 사회적인 파장을 일으킨 최초의 ‘스타’ 살인마였다. 또한 지문 채취나 혈액/체액 채취 추적 같은 근대적 수사방식이 보편화되지 않았던 당시의 법의학적 수사망은 해박한 해부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정교하게 자행된 리퍼의 예술(!) 살인을 미처 따라가지 못하면서 범인 추적에 난항을 겪었다.

 

당시의 법의학, 제도, 수사망 등 국가 장치들을 훨씬 앞질러 가며 조롱을 던진 리퍼에 대한 연구는 미국 역사를 통틀어 대통령에 대한 저서를 더한 숫자보다 많을 정도로, 리퍼 케이스에 대한 관심은 아직까지도 만만치 않다.

 

학문적 연구에서 단순한 호기심까지, 리퍼 케이스가 이토록 매혹적이기까지 해 보이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리퍼 케이스는 끝내 범인이 밝혀지지 않은 사건으로, 연구 자체가 ‘누가 저질렀는가?’라는 고전적인 추리소설(whodunit)의 형태를 띌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즉, 21세기에 살고 있는 법의학자나, <프롬 헬>을 통해 호기심을 가지게 된 관객이나, 리퍼에 대해서는 누구나 다 셜록 홈즈나 에르큘 포와로가 될 수 있다는 점이야말로 리퍼 케이스가 가진 최고의 매력인 셈이다.

 

리퍼의 연쇄 살인은 그 *점에서부터 분분한 의견이 있지만, 대체적으로는 1888년 8월 31일 살해되어 런던 이스트엔드의 창녀 밀집 거주지역이었던 화이트채플(whitechaple) 거리에 방치된 채 발견된 메리 앤 니콜스(43)를 리퍼의 첫 번째 범죄로 보는 시각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리퍼가 본격적으로 언론에 드러나기 이전 유사한 창녀 살인이 있었다는 점 때문에, 종종 이 첫 번째 희생자에 대해서는 엠마 스미스 등의 다른 피해자들이 거론되기도 한다.

 

이후 메리 켈리(25)까지 5명의 창녀가 리퍼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이야기되어지는데, 이 다섯 명으로 압축되는 데에는몇 가지 이유가 있다.

사실 당시만 해도 극심한 하류층에 속한 창녀들이 살해되는 것은 비일비재한 일이었다.

따라서 단지 창녀만을 살해했다는 이유만으로 리퍼 케이스를 규정할 수는 없다.

그보다 리퍼 케이스를 규정해 주는 것은 바로 리퍼의 살인방식(modus operandi). 5명의 창녀들은 각자의 정도는 조금씩 차이를 보이지만, 모두 대범하고 정교하게 사체를 유린당했다.


대개의 사인인 칼로 목을 따는 과정은 신속하고 정확하게 자행되었으며, 그 이외에도 사체 유린 역시 정확한 해부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신속하고 깨끗하게 이루어졌다는 점은 당시 런던 경찰이 인체와 해부학에 능한 직업을 가진 인물들로 용의망을 좁히는데 결정적인 증거로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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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푸틴 [rasputin, 1872? ~ 1916.12.30]

1905년의 어느 날,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이그나티예프(ignatiev) 백작부인의 살롱에는 유난히 많은 인파가 몰려들었다.

정치가들, 사교계의 여성들, 궁궐대신들을 비롯해 모두들 일찍부터 나와 그리고리 에피모비치 라스푸틴(grigori efimovich rasputin)이라는 시베리아 출신의 유명한 수도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마흔한 살이었던 그는 러시아 전역에서 치유사이자 성자로서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하지만 라스푸틴이 도착하자, 사람들은 실망을 금치 못했다. 그의 얼굴은 못생긴 데다가 머릿결은 푸석푸석했으며 체구도 깡말라 볼품없어 보였다. 모인 사람들은 모두 괜히 왔다는 실망감에 젖어들었다.

 

하지만 바로 그 때 라스푸틴이 다가와 큼지막한 손을 내밀며 한 사람씩 악수를 했다. 악수를 하면서 그는 그들의 눈을 깊이 응시했다. 처음에는 약간 불안정한 표정으로 사람들의 위아래를 살피며 마치 그들을 탐색하고 판단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곧 표정이 변하더니 그의 얼굴에서 친절함과 따뜻함이 배어나왔다. 그는 약간 과장된 듯한 태도로 그곳에 있는 몇 명의 여인들을 포옹하기까지 했다. 갑작스러운 그의 태도 변화에 모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실망스러운 분위기가 감돌았던 살롱은 즉시 흥분의 도가니로 바뀌었다.

 

라스푸틴의 목소리는 침착하고 깊이가 있었다. 그의 언어는 투박했지만 심오한 영적 진리를 담고 있었다. 그는 아주 단순한 말로 깊이 있는 진리를 설파했다. 모인 사람들은 이내 촌스러운 모습을 지닌 그에게 편안함을 느꼈다. 바로 그 순간, 그는 갑자기 돌변하더니 버럭 화를 내기 시작했다.


"나는 당신들을 알고 있소. 나는 당신들의 영혼을 들여다볼 수 있지. 당신들은 너무나 방탕하고 사치스러운 종자들이오, ... 당신들이 걸치고 있는 이 좋은 옷들과 저기 저 장식품들은 해롭기만 할 뿐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소, 스스로를 겸손하게 낮추는 법을 배우시오. 지금보다 더욱더 단순한 삶을 살아야 하오. 그래야 비로소 하느님이 당신들을 가까이 하실 것이오."
라스푸틴의 얼굴에는 영감이 가득 넘쳐 흘렀고, 사람들은 그의 말에 귀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앞서와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그가 화를 내는 모습은 마치 예수가 성전에서 환전상을 내쫓을 때의 모습을 연상케 했다. 라스푸틴은 다시 고요하고 상냥한 표정을 되찾았다. 하지만 청중은 이미 그에게서 뭔가 신비한 느낌을 받은 뒤였다.


다음날부터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살롱들을 돌아다니며 모인 사람들에게 민요를 부르게 하고, 그들의 노래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의 춤은 낯설었지만 어딘가 자유로운 혼이 담겨 있는 듯 했다. 그는 춤을 추면서 청중 가운데 가장 매력 있는 여인들의 주위를 돌며 함께 춤을 추자는 눈빛을 보냈다. 그의 춤에는 차츰 관능적인 분위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상대가 자신에게 빠져들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는 그들의 귀에 대고 은근한 말을 속삭였다. 하지만 아무도 그의 말에 화를 내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 뒤로 여러 달 동안 라스푸틴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머물렀다. 그는 그들에게 영적인 문제를 가르치다가 갑자기 돌변해 저속한 음담패설을 늘어놓았다. 그는 죄를 짓지 않으면 어떻게 회개할 수 있는가, 구원은 오직 타락한 사람에게만 주어진다는 식의 궤변을 늘어놓으며 자신을 정당화하곤 했다. 라스푸틴의 마력은 니콜라이 황제와 그의 아내인 알렉산드라에게까지 미쳤다. 생명이 위태로운 황제의 아들을 치유해준 일로 황제 부부의 신임을 한몸에 받게 된 그는 곧 러시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 되었다.(알렉세이 황태자는 혈우병을 앓고 있었다고 한다.)


황제 부부의 신임을 얻게 된 라스푸틴은 그 비호 아래 러시아의 내정과 외교를 자기 마음대로 좌지우지 했다. 특히 황후인 알렉산드라에 대한 라스푸틴의 영향력은 절대적인 것으로 황후는 라스푸틴의 말이라면 절대적으로 신봉했다. 독일 공주 출신이었던 알렉산드라는 라스푸틴의 말에 따라 친독파 귀족들을 주위에 두었다.

 

1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러시아와 독일이 적국이 되자 몇몇 정치인은 황제에게 라스푸틴을 버릴 것을 충고했으나 그들은 황후의 미움만을 샀을 뿐 라스푸틴의 권력은 건재했다.
마침내 유스포프 후작과 푸리슈케비치를 비롯한 귀족들은 요승 라스푸틴을 직접 제거하기로 결정하고 이를 실행에 옮긴다.

 

1916년 12월30일. 라스푸틴을 초대한 그들은 라스푸틴에게 독이 든 케이크와 포도주를 먹여 독살하려 했다. 라스푸틴은 그들의 예상대로 독이 든 케이크와 포도주를 먹었으나 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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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드 더 임팰러 [vlad the impaler, 15세기 ~ ?]
바로 이사람이 오늘날 드랴큘라로 전해지는 인물입니다.
루마니아의 블라드 드라큘라라는 인물로서 15세기 루마니아 역사에서 빠뜨릴 수 없는 인물일 뿐 아니라 오늘날 드랴큘라 이야기를 탄생시킨 장본인 이기도 합니다.
그는 무려 10만명에 달하는 백성을 피에 굶주려 학살한 것으로 전해 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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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제가 알기로는 블라드 더 임펠러 같은경우는 루마니아의 영웅이라고들 하기도 한답니다...


 

펌 :  게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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