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정사 장비전

건모2 작성일 09.11.04 01:4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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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블로그에 올렸던 글들을 올려봅니다.

 

삼국지라는 소재를 이렇게 인터넷 게시판에 올리면서, 그리고 책을 읽어가면서

 

우리 조상님들의 살아온 역사는 국사책 이상으로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남의나라 이야기는 이렇게 신나게

 

써내려간다는 일종의 죄책감이 들곤합니다.

 

사료의 부족때문이려니, 지금 상황이 여유롭지 않으니 라고 스스로 위안삼지만

 

그래도 부끄러움이 남습니다.

 

하지만 남의 역사일지라도 그것을 보면서 지금을 알아보고, 그 안에서 배울점을 찾는다면

 

그것으로도 미미한 가치는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글을 올려봅니다.

 

P.S 미스테리 게시판엔 원래 글이 잘 안올라오나 봐요?^^;

 

 

 

그럼 제가 가장 사랑하는 무장인 장비의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요?

 

 

삼국지 정사 장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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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온 과정을 살펴보자면 지,용(게다가 용모까지!)을 겸비한 명장임에 분명하지만,

 

소설에서 극의 재미와 등장세력간의 구성의 묘를 위해 지모가 쏙 빠진 막내가 되었고 이제는 코믹캐릭터가 된 장익덕.

 

하지만 우리가 장익덕을 기억해야할 이유는

 

귀여움이나 쌍을 찾기 어려운 용맹, 부정함에 타오르는 불같은 협俠의 성격 뿐만 아니라

 

관우에 버금가는 의리와 끝까지 그 믿음을 져버리지 않았던 삶에서 찾아야만 할 것이다.

 

제갈량과 같은 신산귀모의 계책이 없어도

 

관공과 같은 군사적 무위가 없어도

 

타고난 담력과 협의 정신으로 난세를 관통한 사나이.

 

장판교 다리위에서 대군을 상대로 오히려 적을 위압하며

 

"연인 장비가 여기있다! 누가 나와 죽기로 겨뤄보겠는가!"라는 대갈일성 하나만으로도

 

적군과 독자를 전율케하는 촉한의 명장 장비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장비전(張飛傳)

장비의 자는 익덕(益德)으로 탁군( 郡) 사람인데, 젊어서 관우와 함께 선주(유비)를 섬겼다. 관우가 몇살 연장자이므로 장비는 그를 형으로 섬겼다.

-> 관우전과 비교하여 본다면 유비와 관,장의 관계는 군신君臣, 관우와 장비의 관계는 형제兄弟가 되는군요. 사상 최강의 형제가 여기 있습니다..덜덜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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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강유람중에 장비묘를 들렀을때 이 동상보면서 나 또한 활짝 웃고말았다.

장비의 표정이 그야말로 새로 형을 맞이한 어린아이와 같이 맑고 해맑았다.

막내 동생을 바라보는 형님들의 흐뭇한 표정과

진심 "형님들! 싸랑합니다! 시원하게 원샷!" 이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을 지니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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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영웅들의 석상중에서도 가장 압도적으로 멋지다 할 수 있는 장비석상

석재의 질감과 색감부터 조탁방식까지 그야말로 '장비스럽다'고 할만큼 표현이 뛰어나다.

근데 장강댐 건설로 이미 수장됐다고 한다... 지못미..

 

선주가 조공을 따라 여포를 격파함에, 따라가 허도로 돌아와오니, 조공이 장비를 중랑장(中郞將)에 배수했다. 선주가 조공을 배신하고 원소, 유표에게 의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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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성姓 세번 간 종놈아, 도망가지 마라! 연인 장비가 여기있다!!"

이때부터 시작된 장비의 여포에 대한 질투

그리고 영원히 해결되지 않을 논란.

'장비가 나이를 더 먹은 상태고 말이 조금 더 좋았더라면 여포를 이길 수 있지 않았을까?'

물론 호로관 메뚜기와 삼형제의 결전은 뻥!

 

유표가 죽자 조공이 형주를 침입하니, 선주가 강남(江南)으로 달아났다. 조공이 그를 하루 낮 하루 밤동안 추격하여 당양(當陽)의 장판(長阪)에 미치었다. 선주는 조공이 마침내 이르렀다는 소식을 듣고 처자식을 버리고 달아나고, 장비를 시켜 20기를 거느리고 배후를 막도록 했다. 장비가 강가를 차지하고 다리를 끊어버린 후 눈을 부릅뜨고 창(矛)을 비껴잡으며 말했다. 내가 바로 장익덕이다. 이리 와서 같이 사생결단낼 수 있겠는가! 적들이 모두 감히 가까이 오는 자가 없어, 마침내 (위험을) 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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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익덕 인생의 최대 하이라이트

단기로 장판교에 서서 조조군을 향해 고함을 질러 그 조조의 군을 물리게 했다는 이야기가 진짜 사실이라는 말에 감탄의 웃음만 나왔다. 그때부터 장비를 무척 좋아하게 된듯.

                                         장강삼협 장비묘 소재


 

선주가 강남을 평정하고 난 뒤, 장비를 의도태수(宜都太守) 정로장군(征虜將軍)으로 삼고 신정후(新亭侯)에 봉했으며, 후에 자릴 옮겨 남군(南郡)에 있었다. 선주가 익주(益州)로 들어가 도리어 유장을

공격했는데, 장비와 제갈량 등은 강물길을 거슬러 올라가, (군대를) 나누어 군현을 평정하였다.
  강주(江州)에 이르러 유장의 장슈 파군태수(巴郡太守) 엄안(嚴顔)을 격파하고 엄안을 사로잡았다. 장비가 엄안을 꾸짖으며 말하길 대군이 이르렀는데, 어찌 항복하지 않고 감히 항거하느냐?라 했다. 엄안이 대답하길 그대들은 정상(情狀)도 없이 우리 주를 침탈했으니, 우리 주에는 다만 머리 잘릴 장군은 있으나, 항복하는 장군은 없소라 했다. 장비가 노하여 좌우에 영을 내려 (그를) 끌어다 목을 치라고 했으나, 엄안은 안색 하나 바뀌지 않고 말하길 머리를 자르면 자르는 것이지, 어찌하여 화를 낸단 말인가!라 했다. 장비가 그를 장하다고 여겨 풀어주고, 데려다 빈객으로 삼았다. 장비는 지나는 곳마다 싸움에 이겨, 선주와 성도(成都)에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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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의의 유현덕이 저지른 희대의 배반 성도공략 당시

장비가 지나갔다는 자동의 와구관의 모습

 

익주가 평정되자, 제갈량, 법정(法正), 장비 및 관우에게 각각 금 5백 근, 은 1천 근, 5천만 전(錢), 비단(錦) 1천 필을 하사하고, 나머지 사람들에게도 각각 차등있게 하사했고, 장비에게 파서태수(巴西太守) 맡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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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 왜 내가 한중태수가 아니라 파서태수요..?"

한낱 부장급이었던 위연에게 군사요충지 한중태수직을 빼앗긴 장익덕.

이 인사조치는 당대에도 파격이라 여겨졌다.

한중은 조조가 장로를 격파하고 백성들을 이주시켜 백성이 없는 그야말로 군부대 덩어리.

유비는 장비에게 군사적 재능을 넘어 정치적 재능을 키우길 바란것이 아니었을까.

영화 적벽의 장비(라 쓰고 이규라 읽는다.)


 

조공이 장로(張魯)를 격파하고, 하후연(夏侯淵)과 장합(張 )을 남겨 한천(漢川)을 지키게 하였다. 장합은 따로 여러 군대를 감독(督)하며, 파서를 항복시켰는데, 그 백성들을 한중(漢中)으로 이주시킬려고, 탕거(宕渠), 몽두(蒙頭), 탕석( 石)까지 진군하여, 장비와 50여 일간을 서로 항거하였다. 장비가 정예병 1만 여명을 거느리고, 다른 길로 나가 장합의 군대를 쳐서 전투가 벌여졌는데, 산길은 좁아서 전후가 서로 구원할 수 없게 되니, 장비가 마침내 장합을 격파하였다. 장합은 말을 버리고 산길 따라, 오직 휘하의 10여 명과 같이 샛길을 따라 퇴각하여, 군대를 이끌고 남정(南鄭)으로 돌아가니, 파군 지역이 안정되었다.

 

모두가 오해하는 장비 Part.1

위에 기술된 바 대로 장비는 파워대 파워로만 상대를 대하는 장수가 아닌 지모를 사용할 줄 아는 장수였다. 하후연과 같이 서쪽 방위구역을 맡은 위의 명장 장합을 격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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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오해하는 장비 Part.2

장비는 위의 사진에서 볼 수 있듯, 호방한 기개를 붓에 담은 당대에 알아주는 명필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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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오해하는 장비 Part.3

장비는 세간의 묘사와는 달리 꽤 준수한 미남이었다.

세간에 도는 그의 외양묘사를 보면 덩치가 큰 눈큰 훈남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물론 부인이 절세가인일 확률도 높지만, 그의 딸이 유선의 부인이 되어 장황후가 되었으니

이는 장비의 공적뿐만 아니라, 장황후의-장비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외모 또한 상당했었을 것이라 유추해 볼 수 있다.

 

선주가 한중왕(漢中王)이 되자, 장비를 우장군(右將軍)에 배수하고 부절(符節)을 내려주었다. 장무(章武) 원년(221), 거기장군(車騎將軍)으로 승진하고,(대장군의 바로 아래) 사례교위(司隷校尉)를 맡고, 봉작이 더해져 서향후(西鄕侯)에 봉해졌는데, 그 책문(策文)에서 말했다 짐이 천서(天序; 천자의 계통)을 잇고 대업을 받들어, 잔악한 자를 제거하고 전란을 편안케 하였지만, 아직 그 도리를 밝히지 못했다. 지금 도적떼들이 해악을 저지르고 백성들은 그 해독을 입고 있으니, 한조(漢朝)를 생각하는 선비들은 목을 길게 빼고 학처럼 바라고 있다. 짐은 놀래어, 자리에 앉아도 편안치 못하고, 먹어도 단맛을 모르기에, 군대를 정돈하고 (하늘에) 맹서하여 장차 천벌을 행하려 한다. 그대의 충의(忠毅)는 소호(召虎; [소목공(召穆公). 주 선왕(宣王)때 회이(淮夷) 불복하자, 선왕이 소호에게 명을 내려 군사를 거느리고 강한(江漢)을 따라 정벌하게 했음])의 자취와 같고, 그 이름은 멀고 가까운 곳에 펼쳤기에, 특별히 명을 내어 작위를 올려주고, 경사(京師)를 겸하여 맡게 했다. 천위(天威)를 드러내어, 덕으로 복종하는 자를 관대하게 대하고, 형벌로 모반하는 자를 벌(伐)하여, 짐의 뜻에 부합할지어다. 『시경』에 이르지 않았던가?  어찌 면려치 않을 수 있겠는가!


  처음, 장비의 웅장(雄壯)함과 위맹(威猛)은 관우에 버금가서, 위의 모신(謀臣)인 정욱(程昱) 등은 모두 관우 장비는 1만명에 대적할 수 있다고 칭찬했다.

-> 삼국지 정사 전체를 통털어 무용의 절대기준은 관우로 되어 있습니다. 촉에 살았던 진수가 실제로 경험했던 관우의 위맹 다음엔 장비라는 말이지요. 

관우는 군사(卒伍)들에게는 잘 대했지만 사대부들에겐 교만하였고, 장비는 군자는 아끼고 공경하였지만 소인은 보살펴주지 않았다.

-> 관, 장형제의 치명적 결함"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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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익덕을 아느냐?!"

"누가 그런 촌부를 알겠는가!"

개인적으로 촉나라 스리톱의 붙박이 원톱과 오른쪽 스트라이커(왼쪽은 조운)라 생각하는 장익덕과 마맹기의 결전

 

선주가 항상 경계하며 말하길 경이 형벌로 죽이는 것은 이미 지나친 상황인데, 또 매일 장사(壯士; 원문은 健兒)들을 채찍질 하면서 (그들을) 좌우에 두게 하니, 이것은 화를 취하는 길이다라 했다. 장비는 깨닫지 못했다. 

 

선주가 오를 정벌할 때, 장비도 당연히 병사 1만명을 거느리고, 낭중( 中)에서 나와 강주(江州)에서 만나기로 했다. 출발에 임하여, 그 휘하 장수인 장달(張達)과 범강(范彊)이 장비를 죽여 그 목을 가지고, 물길을 따라 손권에게로 달아났다. 장비 군영의 도독이 선주에게 표를 올려 보고하였는데, 선주는 장비 (군대의) 도독이 올린 표가 있다는 것을 듣고 말하길 아! 장비가 죽었구나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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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언놈이 왔다구? 여포?!

                   83편 드라마 삼국지의 장비는 정말 싱크로 1만점도 모자른다.


  장비의 시호를 추증해 환후(桓侯)라 했다. 장자인 장포(張苞)는 일찍 죽었고, 차자(次子)인 장소(張紹)가 후사를 이었는데, 관직이 시중(侍中) 상서복야(尙書僕射)에 이르렀다. 장포의 아들 장준(張遵)은 상서(尙書)가 되어, 제갈첨(諸葛瞻)을 따라 면죽에서 등애(鄧艾)와 싸우다 죽었다.

-> 관공이나 장익덕이나 모두 자식이 일찍 세상을 떠나 아버지의 명성을 잇지 못했다. 관흥과 장포가 오래 살아 연의에서처럼 빛나는 무용을 보여줬다면, 제갈량이 6차례의 북벌에서 최소한 성 하나쯤은 얻을 수 있지 않았을까. 실로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다.

 

 

아휴, 포스팅이 상당히 어렵네요. 데스크탑 대용으로 P3 500짜리 이쁜이 노트북을 쓰느라.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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