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던 난

킥오프넘 작성일 11.05.06 09:3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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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커덕'



거실에서 자고 있던 나는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에 어렴풋이 눈을 떴다.
누굴까. 어두워서 잘 보이지도 않는다.


정체불명의 누군가가 신발장에서 현관을 지나 거실에 있는 어항 근처까지 왔을 때 비로소 그 어항 안에 켜져있는 랜턴의 빛으로 누구인지 식별해 낼 수 있었다.


언니의 남자친구.


그런데 왜 저 남자가 지금 이시간에 우리집을 들어온 거지? 열쇠는 또 어디서 난 거야. 내가 알기론 저 남자와 언닌 헤어진 걸로 아는데?


현관에서부터 몸을 제대로 못 가누고 비틀비틀거리나 싶더니, 이내 술냄새가 진하게 풍겨왔다.


그 남자는 아직 내가 깬 걸 모르는지, 날 지나쳐 부엌으로 가서 냉장고를 열고 포도쥬스를 꺼내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그래. 예전에 저 사람이 정상적인 시간에 우리집에 올땐 종종 포도쥬스를 사오곤 했었지.


그는 1/3정도 남아있던 포도쥬스를 다 마시고 나서, 거친 숨을 몇 번 몰아 쉬더니 식탁 앞에 앉아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담배. 언니는 저 사람이 담배피는 걸 무척이나 싫어했고 (자기 애인이 담배피는 걸 좋아하는 여자가 얼마나 될까만은,) 구지 건강상의 문제를 떠나 특히 연기라는 것을 싫어했다.

처음엔 그 뒷편이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짙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희미해지고 옅어진다나.
꼭 그렇게 연기처럼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서로에게 소홀해질 사랑이 되고 싶지 않았던 언니는 그 사람에게 담배를 피지 못하게 했고, 그 사람이 집에 찾아 오는 날이면 키스하기 전 어김없이 입냄새 검사부터 했었다. 그랬던 그가 지금 우리집에서 담배를 피고 있다니.



지금 내가 깨어 있다는 걸 저 사람이 알아 봤자 그다지 좋진 않을 거란 생각이 들어, 실눈을 뜬 채로 그를 힐끗힐끗 보며 가만히 누워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그가 담배를 끄고 식탁에서 일어났다. 방금 분명 담배를 언니가 아끼던 화분에다 짓이겨 껐던 걸로 보인다.


그런데,


부엌에서 잠시 뭔가 주섬주섬하던 그의 왼쪽 손에 뭔가 금속성의 희끄무레한 게 어렴풋이 비쳐 보였다. 에이, 설마.


설마.


설마 했지만, 그것은 내가 생각했던 최악의 물건이었다. 그가 다시 내 앞을 비틀거리며 지나갈 때, 어항의 푸르스름한 불빛에 비쳐 보인 그것은 분명히 칼이었다.


그리고, 날 다 지나쳐 갔다고 생각했을 때 갑자기 그가 멈춰서서 내쪽을 돌아봤다. 난 눈을 꼭 감고 생각해봤다. 왜지. 죄지은게 있는건가. 도대체 저사람이 지금 왜 저러고 있는거지.


저벅. 저벅.


나에게로 다가왔다. 내 머리맡까지 오더니 걸음을 멈췄다. 난 어리석게도 가만히 있으면 알아서 갈 거라고 생각했다. 왜냐면 내가 평소에 봐 왔던 이 남자는 그렇게까지 대담한 사람이 아니었기에.


그의 손이 내 귀와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그 손은 이내 목 아래로 흘러 어깨, 허리까지 내려왔고, 나는 그렇게 자는 척을 계속 하고 있었다.


무척 기분나쁠 뻔 한 부위에 막 손이 닿을 찰나, 그의 손은 다시 역주행해서 내 얼굴까지 올라갔고, 대뜸 술과 담배냄새로 찌든 그 입으로 내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문득 내 콧잔등 위로 차가운 물방울 하나가 떨어졌다.


그는 다시 일어나서 언니의 방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아, 그때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았어야 했다. 하지만 그의 스킨십 덕분에 머릿속에 복잡한 생각이 마구 엉키고 엉키는 바람에 그럴 겨를이 없었고, 아차 하는 순간 언니 방의 문이 닫혔다.


잠깐의 비명. 잠깐의 신음소리. 그리고 또다시 잠깐의 비명.


그 남자가 나오기까지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술냄새와 담배냄새에 더해 옅은 언니의 향수냄새와 비릿한 냄새. 나는 오로지 나의 후각에만 의존하여 상황을 정리했고, 지금은 그다지 단순한 상황은 아니란 결론을 내렸다.


그는 언니의 방에서 나와 자고있는 내 옆에 앉았고, 이내 라이터 켜는 소리가 들리더니 담배냄새가 한껏 예민해져 있는 내 코를 감싸돌았다.


툭.


거실 카펫에 그가 뭔가를 던졌다. 어렴풋이 보이는 모습은 칼이었다.

무척이나 떨리는 호흡으로 담배를 피던 그는 한 개피를 다 태운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현관으로 걸어갔다.


그가 신발을 신는 모습을 가늘게 뜬 눈으로 주시하고 있었는데, 언니의 방문이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언니가 걸어 나왔다.


어제 저녁 나에게 잘자라고 인사하고 방에 들어갈 때 입고 있던 원피스는 엉망으로 찢겨진 데다 붉게 물들어 있었다. 팔과 다리엔 군데군데 멍이 들어있는 것처럼 보였다.


언니는 방 문앞에 서서 증오어린 눈으로 남자를 노려봤다.


그는 그런 언니를 알아차리지 못했는지 이내 집 문을 열고 나가버렸고, 문이 닫히자 마자 언닌 나에게 잠시 나갔다 온다는 짤막한 한마디를 하고 뒤따라 현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언니, 안아파? 괜찮아?


-응, 조금 아프긴 한데 괜찮아.


-저사람이 뭘 한거야?


-나중에 갔다 와서 얘기해 줄게.










그리고 며칠 후.


날이 밝을 무렵이 다 돼서 언니가 집에 들어왔다.
나갈 때와 똑같은 차림의 언니는 오자마자 뜬눈으로 거실에서 밤을 지새고 있던 날 와락 끌어안았다. 그리고 울었다.


-내가....내가 복수했어....그 나쁜놈....내가 나보다 더 고통스럽게 해줬어....



한참을 그렇게 날 안고 눈물을 흘리던 언니는.


아침햇살이 조금씩 거실을 적시자,


점점 희미해지더니, 이내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나는 꼬리를 흔들며 언니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역한 냄새가 나는 언니가 누워있는 침대 밑에 앉았다.


그날 밤,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던.


한낱, 개일 뿐인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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