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1975년 가을에 결혼을 했습니다. 남편은 중학교 선생님이었고 저는 큰아버지께서 운영하시는 목재회사에서 경리와 타자수 일을 하고 있었지요. 시부모님은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분들이셨어요. 결혼을 하겠다고 처음 인사를 드리러 갔을 때, 시부모님은 절 깍듯이 반겨 주셨고,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무척 조심스러우셨습니다. 전 두 분 다 아주 꼼꼼하고 예의바른 분들이로구나 하고 생각했지요. 양가 인사를 마친 후 저희는 여느 다른 예비 부부들처럼 함께 사주를 보러 가려 했습니다. 그런데 시어머니께서 둘이 사주를 따로 보러가지 말고 시댁에 점보는 이를 부르겠다, 잘 아는 사람이니 잘 봐줄 거라며 시댁에서 점을 보라고 하셨습니다. 복채도 시어머니가 주신다면서요. 내심 복채를 아낄 수 있겠다 싶어 시어머니가 하라는 대로 했습니다. 사주는 그냥저냥 평범한 수였는데도 왠지 공짜로 점을 보았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았지요. 결혼 후 회사를 그만둔 저는 금방 임신을 했습니다. 배가 불러오자 친언니가 언제쯤 아기를 낳으면 좋은 사주로 태어나는지 알아봐 준다고 했습니다. 초산인데 그걸 마음대로 할 수 있을까 별 믿음도 없이 언니에게 저와 신랑의 사주를 적어줬습니다. 그런데 점을 보고 온 언니가 영 얼굴이 좋지 않았습니다.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말끝을 흐리고 별다른 답이 없기에 전 뭐 싫은 소리라도 들었나보다 싶어서 더 묻지 않았어요. 이윽고 전 우리 큰아들을 낳았습니다. 태어났을 때도 건강했고 별 이상이 없었는데 100일이 지나자 우리 아들은 설사가 유독 잦아졌습니다. 먹은 젖도 자주 토하고 설사도 자주해서 병원으로 자주 들쳐업고 뛰었어요. 그런데 왠걸 병원에 가서 이런저런 검사를 해보면 별 이상이 없다는 겁니다. 아기들이 민감해서 그럴 수 있다는 말 뿐이라, 저는 백방으로 아기 배앓이에 좋다는 것도 알아보고 젖먹고 트림하는 것에도 신경을 많이 썼지만 밤새도록 우는 아기를 달래고 기저귀를 빨면서 전 점점 지쳐갔습니다. 답답한 마음에 친정 어머니와 언니가 오셨을 때 걱정과 한탄을 쏟다가 눈물까지 보였습니다. 그러자 조용히 있던 언니가 같이 점이라도 보러 가지 않겠냐고 하더군요. 아기 가졌을 때 점쟁이가 이상한 이야기를 했다면서요. 전 지푸라기라도 잡고싶은 심정에, 언니가 들은 이야기도 궁금했기에 두말없이 따라 나섰습니다. 언니가 점을 보았던 무당. 아마 지금은 돌아가셨겠지요. 작달막한 키에 턱에 큰 사마귀가 있는 무당 할머니가 절 보더니 다짜고짜 얼굴을 확 찌푸렸습니다. '농약 냄새가 지독하다, 너거 집에 농약먹고 죽은 사람있나' 하고 물었습니다. 전 손사래를 쳤습니다. 우리집은 그런 분이 정말 없었거든요. '정말 없냐' 고 묻던 무당 할머니는 '그럼 너거 시댁에 알아봐라, 농약먹고 죽은 귀신이 단단히 들러붙었다' 며 당장 남편을 데리고 오라고 했습니다. 학교 선생님인 남편은 무당 할머니 만나기를 꺼려 했지만 제 설득으로 우리 부부는 같이 점집으로 갔습니다. 무당 할머니는 제 남편을 보자마자 호통을 쳤습니다. '이 놈 맞구만!' 하고 대뜸 남편 뒷덜미를 내리치더군요. 할머니는 '니 동생이 지금 니가 장가를 가니까 샘이 나서 그런다' 며, 농약먹고 죽은 아이 원한이 보통 큰 게 아니다, 당장 보내주라고 하셨습니다. 남편은 그 말에 화들짝 놀라며, 밑으로 아주 어릴 때 죽은 여동생이 있던 건 맞지만 농약을 먹고 죽은 건 아니라고 했습니다. 남편은 3남 1녀의 막내로, 제일 위에는 장녀인 시누가 있었고 그 밑으로 시아주버님들 둘, 막내가 남편이었어요. 그런데 너무 어릴 때(3살) 죽어서 저한테 일부러 말하지 않았던, 여동생이 있었다는 겁니다. 옛날에는 아기들이 죽는 일이 흔했고, 아기가 태어나도 호적에 바로 올리지 않고 1~2년씩 늦게 올리는 일이 예사였기 때문에 굳이 죽은 여동생을 저한테 이야기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무당 할머니는 왜 그 조그만 아(아이) 한테서 농약냄새가 진동을 하냐, 니가 뭘 모르고 있나본데 놔두면 그 아가 조카까지 잡을 거라며 당장 굿을 하든 떡을 하든 달래주라고 합니다. 그 여동생이 죽었을 때는 남편은 5살로, 남편은 여동생에 대해 거의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이름도 없었대요. 그냥 막내야, 막둥아 그렇게 불렀답니다. 남편은 결국 시어머니께 물어보았고, 시어머니는 놀라며 통곡을 하셨답니다. 그 막내 여동생이 농약을 먹고 죽은 게 맞다고요. 막내 여동생이 3살이 되던 해에 흉년이 들어 농사를 거의 망쳤다고 합니다. 온 마을이 어려워졌고, 멀건 죽으로 온 가족이 연명을 했답니다. 그 막내동생은 가장 어렸던 만큼 배가 고프다고 유달리 더 울고 보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막내 여동생이 갑자기 보이질 않아서 온 집안을 뒤져보니 막내 여동생이 창고에 쓰러져 있었다고 합니다. 배가 고파서 온 집안을 돌아다니면서 이것저것 입에 넣어보다, 창고에 들어가서 농약이 든 조그만 병에 입을 댄 거랍니다. 우유처럼 뽀얀 액체농약이 먹을 것인 줄 알았나 보더라고, 이미 숨이 끊어졌기에 막내딸을 애장터에 갖다 묻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놀랍게도 제일 큰 시누이와 시아주버님들은 이 사건에 대해 기억하고 있었지만, 어렸던 남편은 쉬쉬하는 사이에 잊은 것입니다. 저는 그제야 저 시집올 적에 왜 점쟁이를 따로 데려왔는지 알았습니다. 혹시라도 이 이야기를 알까봐서 미리 입막음을 한 사람을 데려온 것이지요. 시댁에서는 이름도 없던 막내딸에게 '명순' 이라는 이름도 지어서, 절에 신주를 만들어 가져가 넋을 달래주는 기도를 했습니다. 저 역시 따라가 가엾은 시누이의 명복을 빌었습니다. 너무나 배가 고파 입에 넣은 농약에 얼마나 배가 아팠을까요.... 우리 아들은 돌을 넘기더니 건강하게 자라 지금은 건강한 청년이 되었습니다. 시누이가 내세에는 좋은 집에서 좋은 부모만나 행복하게 살기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