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도 잘 알려진 드라큘라 백작의 역사적 모델인 블라드 체페슈(블라드 드라큘라)에 대한 자료입니다.
긴글이지만 관심있는 분이 읽으시면 재미있을거 같아서 퍼왔어요
1. 메메드 2세와 드라큘라
오스만 투르크의 제왕 메메드 2세와 왈라키아의 영주 블라드 테페스 드라큘라는 비슷한 또래의 인물입니다(메메드 2세의 생몰시기는1432-1481년, 드라큘라는 1431-1476년). 메메드 2세는 재위중인 1453년에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킴으로써 1000년의 역사를 가진 비잔틴 제국을 멸망시키고 1459년에는 세르비아를 멸망시켜 발칸반도 전체를 투르크령으로 만들었습니다. 메메드 2세는 이 여세를 몰아 왈라키아까지 투르크령으로 만들려 했고 이에 대항하여 드라큘라가 벌인 전쟁이 1462년의 투르크-왈라키아 전쟁입니다.
2. 전쟁의 배경
드라큘라가 태어난 해인 1431년 드라큘라의 아버지 블라드 드라큘은 '용의 기사단'의 수장이 됩니다. 이 기사단은 외부로는 당시 욱일승천의 기세로 기독교 세계를 위협하는 투르크와 싸우고 내부적으로는 로마 카톨릭을 위협하던 후스파와 싸우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블라드의 성인 드라큘은 루마니아 어로 용이라는 의미이며 드라큘라는 '용의 아들'이라는 의미입니다. 당시 신성로마제국황제는 용이 조각된 목걸이를 드라큘에게 하사했고 그의 아들 드라큘라는 용의 무늬가 있는 망토를 즐겨입었다고 합니다.
드라큘라의 아버지 블라드 드라큘은 왈라키아 출신 헝가리 총독인 야노스 후냐디와 더불어 투르크와 싸웠습니다. 그런데 블라드 드라큘은 나중에는 투르크와 화평하는 정책을 펴게 되었고 이 때문에 '용의 기사단'을 배신했다는 명목으로 암살당합니다. 일설에는 후냐디가 암살했다고도 합니다.
드라큘라는 그의 동생 라두와 함께 1442년부터 1448년까지 투르크의 인질이 됩니다. 그 동안에 그의 아버지와 형 미흐네아가 암살당하고 동생 라두는 투르크에게 철저히 세뇌됩니다.
1448년에 투르크는 드라큘라를 왈라키아의 꼭두각시 군주로 만들려 하나 드라큘라는 트란실바니아로 탈출합니다. 그리고 1451년부터 헝가리에서 후냐디의 신세를 지게 됩니다. 이때부터 5년동안 후냐디가 투르크와 전투에서 죽을 때까지 후냐디와 함께 했는데 아마도 그는 이때 후냐디로부터 군사에 대한 것을 배웠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후 1456년 헝가리의 지원으로 드라큘라는 왈라키아의 군주가 됩니다. 군주가 된후 드라큘라는 극도의 공포정치를 펴는데 이는 나중에 유럽 전역에서 드라큘라 괴담으로 퍼져 나가게 됩니다. 즉위하자마자 그는 자신의 아버지와 형을 암살햇다는 의심이 가는 보야르 500여명을 궁정으로 불러들입니다. 거기서 그는 그들에게 '지금까지 몇명의 군주를 모셨는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보야르들은 나이많은 이는 30명, 젊은 이는 7명이라고 답합니다. 이는 그들이 수십명의 군주를 자기들 마음대로 갈아치웠다는 의미입니다. 드라큘라는 그들 중 자신의 아버지와 형의 암살범이 있는 것을 확신하고 극히 잔인한 방번으로 보야르들과 그의 가족들을 모두 죽입니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아이들은 갈갈이 찢어 부인들에게 그 피를 마시게 하고 고기를 삶아 먹인 다음 부인들의 유방을 도려내어 남편들에게 먹인 다음 남편들은 모두 말뚝형에 처했다 합니다. 드라큘라의 말뚝형은 드라큘라가 즐겨 쓴 처형방식인데 처형자의 양 다리를 묶어 길이2m 넓이 15cm가량의 막대기를 남자는 항문에, 여자는 성기에 수직으로 관통하여 서서히 들어 올려서 입으로 말뚝이 나오게 하는 방법을 씁니다. 드라큘라는 이렇게 처형한 시체를 몇달동안 썩도록 내버려놓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공포감을 자아내도록 하는데 사용했습니다.
반대파 보야르들을 제거한 후 그의 목표가 된 것은 당시 왈라키아의 경제를 장악하고 있던 작센 출신의 카톨릭 독일인들이었습니다. 드라큘라는 왈라키아의 자유농민들로부터 조세와 군사를 모집하기 위해서는 작센 상인세력을 일소해야 한다고 생각한듯 합니다. 드라큘라가 작센 상인들의 활동을 제한하자 그들은 당연히 반발하였고 이에 드라큘라는 3만명의 독일인들을 1459-1460년에 학살합니다. 그 대부분은 물론 말뚝형의 방법으로 처형했습니다.
149년에 교황 비오 2세는 투르크에 대항한 성전을 선포하고 십자군을 모집합니다. 그런데 당시 신성로마제국과 헝가리, 이탈리아, 동유럽 등지의 군주들은 각자의 내부 문제 때문에 이에 응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드라큘라는 혼자 이에 응하여 투르크와 전쟁을 하기로 결심합니다.
3. 투르크-왈라키아 전쟁
당시 왈라키아는 투르크의 속국이었는데 드라큘라는 투르크에 대한 세금을 바치지 않고 투르크를 도발합니다. 그러다가 1461년 다뉴브강을 넘어 투르크령 불가리아를 공격하합니다. 이 전쟁에서 투르크군과 불가리아군 2만 3천여명이 드라큘라와의 전투에서 전사합니다.
메메드 2세는 왈라키아를 완전히 투르크령으로 만들 것을 결심하고 1461년 콘스탄노플 공략 이래 최대 규모의 원정군을 편성하여 왈라키아로 진군합니다. 드라큘라는 처음에는 투르크군이 다뉴브강을 도강하는 것을 저지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왈라키아 내에서 전쟁을 벌이게 됩니다. 여기서 드라큘라는 메메드 2세와의 대규모 회전을 회피하고 다음과 같은 전술로 맞서게 됩니다. 이는 헝가리와 몰다비아의 지원이 없는 상황에서 왈라키아 단독으로는 막강한 투르크군과 정면승부를 하기에는 승산이 없다는 판단에서 나온 것으로 보입니다.
(1) 초토화 전술 - 드라큘라는 투르크군이 진격하는 도중에 있는 모든 도시와 촌락,농토를 불태워 없애고 풀 한포기 남기지 않습니다. 우물에는 독극물을 타고 가축들을 미리 도살처분하여 투르크군이 어떤 물자도 현지조달할 수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2) 지형지물을 이용한, 진군 방해 - 드라큘라는 왈라키아의 하천 수로를 바꾸어 늪지대를 만드는 방법으로 투르크군의 진로를 방해했습니다. 투르크군은 우르반의 대포와 같은 대형 대포를 사용했는데 이러한 대포를 가지고 진창과 늪지대를 통과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랐습니다.
(3) 게릴라전 - 왈라키아에는 많은 산과 숲이 있었습니다. 드라큘라는 자신의 병사들로 하여금 소부대로 움직이는 투르크군의 보급로를 공격하여 큰 손실을 입혔습니다.
(4) 세균전 - 보급이 고갈되어 가자 투르크군의 건강과 위생상태는 저하되었고 이틈을 노려 드라큘라는 천연두,페스트,나병등에 걸린 환자들을 투르크 군복을 입혀 투르크 영내에 침투시킵니다. 그 결과 투르크 영내에는 전염병이 크게 번져가게 됩니다.
(5) 함정과 부비트랩 - 드라큘라는 투르크군 진호에 많은 함정과 덫을 설치하여 투르크군 병사와 말들이 빠져 죽게 만들었습니다.
(6) 야습 - 드라큘라는 '공포의 밤'이라고 알려진 작전을 통해 메메드 2세를 직접 암살할 것을 꾀합니다. '공포의 밤'은 투르크군의 경계가 일부 풀어진 틈을 타서 메메드 2세의 본진을 직접 공격합니다. 이 공격은 성공하지 못했고 드라큘라 자신도 충성스러운 부하를 여럿 잃었지만 투르크군에게 큰 충격을 준 작전이었습니다.
(7) 테러 전술을 통한 심리전 - '공포의 밤' 이후 메메드 2세는 드라큘라를 추격하여 왈라키아 내륙으로 진격하는데 이과정에서 메메드 2세는 드라큘라가 설치해 놓은 2만구에 달하는(일설에는 4만구) 시체들을 보게 됩니다. 이 시체들은 드라큘라가 말뚝형에 처한 시체들인데 그중 상당수는 투르크군 포로들이었으며 여자와 어린이도 많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 시체들은 몇달재 방치되어 썩어가고 있었는데 메메드 2세와 투르크군은 이를 보고 큰 충격을 받습니다. 메메드 2세는 투르크군 주둔지 주위에 큰 해자를 파도록 지시한후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적군뿐만 아니라 자기 백성들에게도 이렇게 극악무동한 행위를 할 수 있는 자는 이보다 더한 짓도 할 수있을 것이다. 이렇게 잔인무도한 자를 상대로 해서 이기기는 어렵다.'
당시에는 투르크군의 보급이 고갈되어 가고 있었고 드라큘라의 세균전을 통해 투르크군 영내에 전염병이 창궐하던 시기인지라 메메드 2세는 결국 왈라키아 정복을 포기하고 철수하게 됩니다.
4. 정치적 책략을 통한 드라큘라 축출
메메드 2세는 군사력을 통한 왈라키아 정복을 포기하는 대신 왈라키아의 내분을 통해 고분고분한 속국으로 만들려는 정책으로 전환합니다. 이를 위해 드라큘라의 동생 라두를 이용합니다. 라두는 드라큘라와 달리 철저히 친투르크적인 인물이었기 때문에 투르크는 라두를 왈라키아의 군주로 책봉하고 왈라키아의 내분을 꾀합니다. 왈라키아 내부에서도 많은 보야르들이 드라큘라의 공포정치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고 강대한 투르크와 언제까지나 싸울 수는 없다는 인식이 퍼져 있었습니다. 결국 드라큘라는 내부의 반란에 의해 축출되고 맙니다. 그리고 트란실바니아로 가게 되는데 여기에서 그는 후냐디의 아들 마티아스의 포로가 되어 1462-1474년까지 헝가리의 감옥에서 있게 됩니다. 마티아스는 그의 아버지 후냐디와 달리 적극적으로 투르크와 싸우려는 노력을 하지 않습니다. 이는 그의 지위가 불안정하여 합스부르크 가문과의 권력투쟁에서 언제 패할지 모른다는 내부문제가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그는 왈라키아에서 드라큘라가 투르크와 마찰을 빚는 것을 원치 않은 듯 합니다.
그러다가 드라큘라는 그리스 정교에서 카롤릭으로 개종한후 1474년 감옥에서 풀려납니다. 헝가리와 몰다비아의 지원으로 1476년 두달동안 다시 왈리키아의 군주가 되나 보야르들과 투르크의 책동에 의해 암살당하게 됩니다. 이때 헝가리와 몰다비아는 드라큘라를 적극적으로 지원한 것은 아닙니다. 마티아스는 트란실바니아의 스테판 바토리(17세기 650명의 여성을 죽여 그 피로 목욕을 햇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엘리자베스 바토리 백작부인의 조상입니다)를 시켜 드라큘라가 왕위에 오르도록 지원하나 스테판 바토리는 드라큘라가 왕위에 오른후 왈라키아에서 철수합니다. 드라큘라가 가진 병력을 불과 2백명에 불과하여 헝가리 군이 철수하자 곧바로 붕괴하고 만 것입니다.
5. 드라큘라의 잔혹행위
드라큘라는 이렇게 죽었지만 그가 자행한 잔혹행위는 많은 괴담이 되어 유럽의 전설 속에 남았습니다. 루마니아,독일,러시아 전설과 공식기록에 나온 드라큘라의 잔혹행위는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1) 그가 말뚝에 박아 죽인 사람의 수는 10만에 달한다고 전해집니다. 물론 투르크인과 독일인등이 다수였으나 왈라키아 인도 많이 처형되었습니다. 당시 왈라키아 공국 인구는 50만에 불과했다는 것을 생가해보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말둑형으로 처형되었지를 알 수 있습니다.
(2) 드라큘라는 거짓말을 극도로 싫어했습니다. 이는 그와 그의 가문이 모략에 의해 희생되어 왔다는 것과 무관하지 않은 듯 합니다. 한번은 그의 애인이 그에게 임신했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이는 드라큘라가 우울해 있어 그의 기분을 풀어주려고 한 것인데 드라큘라는 그 거짓말을 밝혀낸다며 그녀의 배를 갈라 임신하지 않은 것을 확인했다고 합니다.
(3) 드라큘라는 정조를 지키지 않은 여성에 대해서도 가학적인 증오를 드러내어 그러한 여성을 발견하면 성기를 도려내고 가죽을 벗겨 가죽과 몸체를 다로 거리에 내걸었다고 합니다.
(4) 여자와 그 아이들을 말뚝형에 처할 때 어머니와 자식을 같이 말뚝으로 꿰는 것을 즐겨했다고 전해집니다.
(5) 말둑형에 처할 때 희생자가 금방 죽지 않고 고통스러워 하도록 말뚝끝을 일부러 뾰복하지 않게 만들고 기름을 발라서 희생자가 비명을 지르며 천천히 고통스러워 하는 모습을 보며 드라쿨라는 쾌감을 느꼈다고 전해집니다.
(6) 드라큘라가 좋아하는 또다른 처형방식을 난도질과 삶아 죽이기였습니다.
도기와 칼로 '양배추처럼 난도질하여 토막낸다'는 표현이 각국 전설에 등장하고 있고큰 가마솥으로 희생자들을 삶아 그 고기를 희생자의 친지들에게 먹이기를 좋아했ㅅ습니다.
(7) 삶아죽이기의 대표적인 예가 집시를 탄압한 것인데 드라큘라는 도둑질을 잘하는 집시들을 몹시 싫어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집시를 보면 가마솥에 삶아 죽인 다음 다른 집시들에게 먹였다고 합니다.
(8) 드라큘라는 거지와 장애인도 학살했는데 이는 그들이 공국을 좀억는 존재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어느날 드라큘라는 공국내의 거지와 장애인들을 모두 초대하여 큰 연회를 베풀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제 여한이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여한이 없다고 대답하자 드라쿨라는 그들을 건물에 몰아넣고 모두 불태워 죽입니다. 그리고는 이제 왈라키아에는 거지와 장애인은 없다고 선포했습니다.
(9) 드라큘라는 자신의 병사와 영민들의 기강을 극단적으로 강조했는데 하루는 어느 농부가 닮은 셔츠를 입고 입고 있는 것을 보고 그 아내를 말뚝형에 처하고 다른 여자를 아내로 삼게 했습니다.
(10) 드라큘라는 말뚝형에 처한 시체가 썩어가는 냄새를 맡으면서 식사하는 것을 즐겼는데 이를 견디지 못한 귀족이 있으면 그도 역시 말둑형에 처했다고 전해집니다.
드라큘라는 15세기의 인물이지만 20세기에 들어와서 차우세스쿠 정권 때는 민족영웅으로 정책적으로 숭상했다고 알려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