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피의 여왕, 엘리자베스 바토리

허걱쓰 작성일 12.04.25 20: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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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블라드체페슈에 이어, 엘리자베스 바토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블라드 체페슈와 같은 루마니아이고, 바토리 역시 드라큘라 스토리에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체페슈처럼 바토리에 대한 글도 무서운글터에 몇번 올라왔었는데, 못보신 분들을 위해 올립니다. 

 

  피의 여왕, 엘리자베스 바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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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생

 

엘리자베스 바토리는 1560년 Transylvania(현재 루마니아 서부북부의 고원지방)에서 가장 유서깊고 부유하며 영향력있는 집안의 딸로 태어났다.

바토리家는 유럽제일의 함스부르크 家와 비견될 정도로 명문가로 집안엔 군주나 추기경도 있었고, 사촌은 헝가리 왕국의 수상이었다.

가장 유명한 친척은 lstvan Barhory(1533-1586), 1575년 부터 86년까지 트란실바니아의 군주였으며 폴란드의 왕이었다.

엘리자베스 바토리는 4살이나 5살 무렵 극히 심한 발작을 일으켰었다고 한다.

일종의 간질 발작이거나 기타 다른 신경 계통 질환 때문이었던 것으로 추정되어지는데, 훗살 그녀가 저지른 끔찍한 범죄 행위와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주장이다.

 바토리 가는 막대한 재산과 영지를 잃지 않기 위해 근친 결혼을 많이 했는데 때문에 집안에 유명인을 배출한 만큼 미친 사람이나 정신이상자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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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토리의 궁전과 그 터

15살 때 바토리는 페렌츠 백작과 결혼을 하는데, 백작은 당시 26살이었고, 남편이 아내의 성을 따랐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 부부는 Gsejthe(체터) 성에 살았으며, 백작이 워낙 전쟁을 좋아했던 관계로 거의 떨어져 지냈다.

그랬기 때문인지 남편 페렌츠 백작은 헝가리의 검은 영웅(Black Hero of Hungary)이란 별명을 얻었다.

장군의 나래도 엄격하게 처신하라는 시어머니의 강압과 압제로 감옥이가 다름 없는 규제속에서 그녀는 점차 말이 없고, 냉담하고, 음습한 여인으로 변모했다.

 여기에 더하면 "바토리家"의 유전병인 간질(로 추정되는 발작 증세)도 그녀를 정신적으로 돌아버리게 하는데 크게 일조하는 데 바토리家는 근친상간에 의한 유전병으로 유명해 숙부는 간질로 죽었고, 숙모는 황음에 빠져 남편 세명을 먼저 보낸 가문이었다고 한다.

바토리는 언젠가 낯선 남자와 눈이 맞아 도망했다가 한참 후에나 성으로 돌아온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남편인 백작은 금방 이를 용서했다고 한다.

거의 남편과 같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아이도 갖지 못했고, 결혼한지 10년이 지난 1585년에 딸 Anna를 낳았고, 다음 9년동안에 딸 Ursala와 Katherina를, 그리고 1598년에서야 비로소 외아들 Paul을 낳았는데 바로 이 기나긴 기간 동안 바토리는 유모인 llona joo, 집사 Janos Ujvary, 하인 Throko, 숲에 사는 마녀 Davula와 또 다른 마녀 Dorottya Szentes등과 함께 수시로 젊은 하녀들을 고문했던 것으로 전해지는데, 이것이 진짜 끔찍한 행위로 발전하게 된 계기는 남편의 죽음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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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토리 백작부인 궁전의 앞마당

 

남편 ference 백작은 1604년 51세의 나이로 전장에서 전사했고, 바토리는 끔찍한 괴물로 돌변해 버린다.

자기에게 너무 강압적이었던 시어머니를 성에서 쫓아내면서 부터, 본격적으로 악마숭배에 빠져들어 처음엔 말이나 기타 동물들을 제물로 사용했지만, 나중에는 인간 제물을 바쳤다고 하는데, 끔찍한 고문과 살인의 진정한 목적은 젊은 되찾는 것이었다.

마흔이 넘으면서 곱고 아름다운 얼굴과 피부가 삭아들어가고 있음을 개탄한 바토리는 젊은 처녀의 피로 목욕을 하여 예전의 미모를 되찾으려 했다.

 

어느날 머리를 빗겨주던 하녀가 실수를 하여 머리가 심하게 땡겨지자, 바토리는 하녀의 따귀를 때렸고, 좀 심하게 때렸는지 하녀의 뺨이 손톱에 긁혀서 피가 났다.

그런데 그 피가 바토리의 손에 떨어졌는데 바토리는 순간적으로 손의 피부가 탱탱하게 변하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젊은 처녀의 피가 젊음을 되찾을 수 있는 "비밀"이라 생각한 그녀는그 이후로 수시로 처녀를 잡아다 죽여서, 그 피로 목욕을 했다.

발목을 밧줄로 묶어서 거꾸로 매단 다음 목을 따서 그 피를 받아 목욕을 했으며, 가끔 진짜 예쁜 처녀 아이가 잡혀오면 "특별 메뉴"로 피를 마시기도 했는데, 처음엔 잔에 받아마셨지만,마지막엔 직접 목을 물어 뜯어 생피를 그냥 받아마셨다고도 전한다.

 

그녀의 잔혹한 성품을 말해주는 것 중에 배나무 사건이 있었다.
그녀의 영지에 사는 농부의 딸 하나가 배가 고픈 나머지 배를 하나 훔쳐먹는 사건이 발생했다. 바토리에게 아첨을 하는 하인들이 이소녀를 밀고했다.

바토리는 소녀를 잡아다가 고문하기로 했다. 그러나 소녀는 고문을 하기도 전에 배를 따먹은 일을 자백하고 말았다. 바토리는 소녀를 용서하기가 싫었다.

그러나 많은 농부들이 지켜보고 있어서 관대한 처분을 내린다면서 배나무에 하룻동안 묵어놓게 했다. 그 대신 그녀는 하녀에게 시켜 이 소녀의 전신에 꿀을 발라놓도록 했다.

꿀 냄사를 맡은 벌들이 사방에서 날아오기 시작했다. 소녀는 처절한 비명을 질렀으나 소용이 없었다. 수천, 수만마리의 벌들에게 쏘인 소녀는 온몸이 퉁퉁 부어서 죽었다.

그래도 벌들은 그치지 않고 날아와 그녀의 몸에 달라붙은 꿀을 먹으려고 아우성이었다. 그녀가 죽자 이번에는 개미와 구더기가 달려들어 그녀의 시체를 파먹었다.

농부들은 에르체베트 바로의 잔인한 처서에 진저리를 쳤다. 그러나 그녀는 권력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에 농부들을 감히 불평을 말할 수도 없었다.

 

 

 

바토리가 즐겨 사용한 고문 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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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철의 처녀
독일의 유명한 기술자에게 특별 주문 제작한 것으로 실제 사람처럼 아주 정교하게 만든 철제 인형.
등신대의 벌거벗은 인형의 기계장치로 피부가 사람과 흡사하며 눈과 입도 열리고 머리카락도 있었다. 여자를 벌거벗겨 인형 앞에 놓으면 톱니바귀가 움직여 인형은 두팔을 올려 여자를 감싸안는다. 다음에 인형의 가슴이 열리는데 그 안은 비어있다. 좌우로 펼처진 문에 다섯개의 칼날이 있다. 인형의 가슴이 열리는데 그 안의 비어있다. 좌우로 펄쳐진 문에 다섯 개의 칼날이 있다. 인형의 몸안에 갇힌 여자는 필사적이지만 칼로 전신을 찔러 뼈가 부서지고 처녀의 온몸을 사정없이 찌르면서 피를 뽑아낸다. 그 피는 인형안의 홈을 따라 흘러 바토리의 욕조로 쏟아지게 되어있다.


2. 철의 새장

철장으로 만든 새장 같은 곳에 처녀를 가둬 놓고 도르래로 천정까지 들어 올린 뒤 버튼을 누르면 철장안에서 날이 선 칼날들이 튀어나와 처녀의 몸을 꽉 조이며 난자한다.

 새장 아래에 있던 "바토리"는 그 쏫아지는 피를 맞으며 샤워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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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6대 살인마 피규어 中 엘리자베스 바토리

 

 

 

바토리의 잔혹한 성품을 말해주는 예로는,


1. 금화를 훔치다 들키면 불에 달군 금화를 손바닥에 올려놓는다.
2. "바토리"의 옷을 잘못다리면 시뻘건 인두로 얼굴을 지져 놓는다
3. 어쩌다 수다라도 떨면 굵은 바늘로 입을 꿰매놓는다.
4. 과일 훔치다 들키면 온몸에 꿀을 발라 불개미에게 뜯어 먹게 한다.
5. 심심하면 처녀의 알몸을 꽁꽁 묶은 뒤 얼음 위에 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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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0년 부터 1610년 까지 바토리는 연속적으로 젊은 처녀를 살해하여 모종의 악마적 종교 의식을 거친 후 그들의 피로 목욕을 했다고 하는데, 죽은 이에 대한 마지막 배려였는지, 시체를 근처 교외로 보내 신부로 하여금 장례를 치르게 했다고 한다.

그러나 '원인 모를 죽음'을 당한 처녀의 수가 너무 많아지자 그 신부는 더 이상 장례를 치뤄주지 않았고, 소문이 날까 두려운 나머지 바토리는 신부를 불러다가 누구에게도 비밀을 발설하지 못하도록 친히 협박을 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처녀의 피는 처음 만큼 효과가 없는 것 처럼 보였다.

이에 측근들은 천한 농촌 처녀가 아니라 귀족 처녀의 피라야 더 효과가 있다고 부추기고 이에 바토리는 성내에 귀족적 소양을 가르치는 '귀족 여학교'를 설립해 한번에 25명씩 학생을 받았다. 물론 이들도 농촌처녀들처럼 끔찍하게 살해당하고 피를 빨렸는데, 이때쯤부터 바토리는 조심성을 잃었던 것 같다.

시체는 들판이나 헛간, 성 바로 옆 창가, 근처 채소밭 등에 아무렇게나 묻고 시체 네 구를 성벽 밑으로 그냥 떨어진 적도 있다하니 당연히 꼬리를 잡히기 시작해 소문이 퍼지기 시작하고 그러나 희생자 하나가 극적으로 탈출해 정부 당국에 신고했기 때문에, Matya왕은 바토리의 사촌이며 그 지아 영주인 Gyorgy Thurzo 백작에게 명하여 진상을 조사하라고 명령했다.

 

1610년 12월 30일 성문을 부수고 안으로 들어간 조사팀은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온몸에 피가 모두 빠져버린 젊은 여자 시체가 있었고, 꼬챙이 찔린채 아직 살아있는 여자도 몇 명 있었으며, 지하실에 내려가보니 온갖 종류의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젊은 처녀들이 수두룩했다.

곳곳에서 피가 말라붙은 칼, 송곳 등의 고문 도구들이 발견되고 게다가 성 주변을 파보니 여자 시체가 50여구나 나왔다.

재판은 1611년에 열렸지만, 정작 바토리는 재판에 참석하지도 않았으며, 유무죄에 관해서도 일체 언급을 하지 않았다.

재판에서 집사인 Ujvary는 처녀 37명을 살해했으며, 그중 여섯은 일자리를 찾아 성에 들어왔던 여자였다고 자백했는데,

대개는 몇주일 심지어는 몇 달동안이나 고문을 당하다가 죽었다고 한다.

 

자백은 그러했지만, 실은 총 612명을 죽였다고 한다. 바토리는 모든 것을 일기에 써서 기록에 남겼고, 숫자는 이를 근거로 한 것이다.

허공에 매달아놓은 철창에 처녀를 집어놓고 쇠꼬챙이로 찔러 피를 흘리게 하며, 바토리가 그 찰창 밑에 서서 서서 밑으로 흐르는 피로 "샤워"를 했다.

고문은 대개 수하들이 담당했지만, 가끔은 백작 부인이 직접 처녀들을 고문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하는데, 이 끔찍한 사건에 연루된 사람은 모두 목이 잘린 후 화형을 당했고, 수뇌급 두명은 손가락을 잘린 후 산채로 불에 타 죽었지만, 오로지 귀족이라는 이유 하나로 목숨을 건졌다.(법적으로도 귀족은 처형할 수 없다고 한다)


바토리는 그대신 높은 탑 꼭대기에 감금되었는데, 음식을 넣어주는 작은 구멍 이외에는 창무니 하나 없는 어두운 방이었다고 한다.

먹다 남은 음식찌꺼기로 연명하면서도 그녀는 참회의 말한마디 없었다. 감금 4년만인 1614넨 8월 말, 54세의 나이로 엘리자베스 바토리는 어두운 감방에서 세상을 떠난다.

주민들의 반대 때문에 그녀의 시신은 그곳에 묻힐 수 없게 되었고, 그녀는 Ecsed혈동의 마지막인 것을 감안하여 헝가리 동북부 지역의 Ecsed에 묻혔다.
바토리에 관한 이야기는 영화화 되기도 했는데,Peter Sasde가 감독했고, 소위 B급 영화의 스타라고 정평받고 있는 Ingrid Pitt이 주연했는데,  제목은 Gountess Dracula(드라큘라 백작부인)이며, 우리나라엔 소개된 바가 없다.

최근 영화로는 유라이 야코비스코가 감독한 Bathory(2008)가 있다.

 

 

 바토리에 관한 재미있는 사실


첫째, 엘리자베스 바토리는 엄청난 미인이었으며, 선해보이는 얼굴에, 특히 피부가 거의 환상에 가까울 정도로 우유빛의 미인이었다고 전해진다.

둘째, 바토리는 제대로 교육을 받은 여자였을 뿐 아니라 남자를 능가할 정도로 똑똑했다고 하는데, 당시의 군주들이 거의 글을 읽지 못했던 반면, 바토리는 헝가리어는 물론 라틴어, 로마어에도 능통했으며 지적 수준이 상당한 경지에 올라있었다고 전해진다.

셋째, 그녀가 죽은 후에도 100년 이상 바토리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을 만큼 악몽이 하늘을 찔렀다.

넷째, Bram Stoker의 '드라큘라'는 루마니아 군주 Vlad Dracula를 모델로 한 것이 아니라, 실은 바로 이 여자 엘리자베스 바토리라고 주장한 학자들도 여럿 있다.

다섯째, 엘리자베스 바토리 백작 부인의 재판 기록은 아직도 헝가리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여섯째, 그 사건이 일어났던 지역에서는 아직도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금기시 되어있으며, 주로 슬로바키아 출신 하녀들을 죽였기 때문에 이름 대신 "The Hungarian Whore"이라는 별명으로 불린다고 하는데 이 지역의 인종 분포가 주로 헝가리인과 슬라브족이어서 직역하자면 "헝가리 갈보년"쯤 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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