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인(歸因)

엔초비 작성일 12.09.13 23:0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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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생각 해보면 그 당시 저는 정신질환자에 가까웠습니다. 터무니없이 사소한 일에 마치 생사를 건듯, 광기에 가까운 집착. 그때의 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요. 지금 부터 제가 풀어 놓을 이야기는 제가 겪었던, 어찌보면 굉장히 시시하고 유치한 호기심에서 출발한 이야기입니다. 현실적 비현실이라고 해야할까요. 저는 이 사건을 통해 사람의 마음속 깊숙히 자리잡은 어두움을 간접적으로 나마 느꼈고 가끔은 공포스럽기 까지 합니다. 긴글을 읽기 부담스러워 하시거나 귀신과 초자연적인 현상을 기대하시고 이 글을 클릭 하신 분들께는 미리 죄송하다는 말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 방식은 추리소설의 그 것과 비슷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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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년 봄, 그해에 저는 25살이였고 대학교 3학년으로 슬슬 취직과 장래에 대해 본격적으로 생각해야만 하는 시기였습니다. 하지만 현실에 대한 문제는 고뇌와 명상같은 안일한 방법보다, 자격증 취득과 토익점수 향상과 같이 액티브한 방법이 좀더 근본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지름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화창한 봄날의 핑크빛 햇살속에 삼삼오오 짝을 짓는 연인들, 만연한 새싹들과 꽃위로 불어오는 나른한 봄바람이 생명의 기운(?)을 가득 싣고 저의 모든 사고를 게으름으로 바꿔놓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수업과 학교 생활의 반이상을 몽롱한 상태로 지내고 있던 어느 주의 주말, 어김 없이 수시로 만나던 고등학교 친구들과의 술자리였습니다. 여느 나이 또래 남성들의 술자리가 그렇듯 여자, 돈, 게임등 별 시덥지 않은 이야기를 안주 삼아 취기가 어느정도 오를 때 였습니다. 한 친구 녀석이 뜬금없이 너희들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특정 집단안에서 영웅적 위업을 남겨본 적이 있냐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평소 저는 눈치가 빠르고 오랫동안 알고 지낸 지인에 한해서 마치 마인드맵을 읽어 내는 듯한 신기에 가까운 초능력(물론 농담입니다.)으로 사고(思顧)의 미리보기가 가능할때가 있는데, 이 녀석이 또 군대 이야기를 하려나 보다하고 짐작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녀석은 군대 시절 자기가 어쩌고 저쩌고 하며, 결국 자기 자랑을 늘어 놓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 소재가 좋은 반응을 불러 일으켜 2차 술자리에서는 각자가 남긴 영웅적 위업에 대한 자랑질이 시작되었습니다.

 

 친구 녀석들이 저마다 늘어놓는 이야기를 들으며 대화에 끼어들까 하고 생각해보니 딱히 생각 나는 일들이 없었습니다. 게임 속 길드매치에서 자기가 최후까지 살아남아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형편없는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는 마당에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그 정도 되는 소소한 자랑거리도 떠오르지 않자, 은근히 초조해 지기 시작했습니다.

'잘 생각해 보자. 뭐 대단한 일은 아니더라도 나도 뭔가 행한 업적이 있을거야.'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바보들끼리 모여서 누가 더 바보인지 싸움에 왜 그렇게 진지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다가 전광석화처럼 뇌리를 스치며 오래된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건 그냥 이야기 하지 말까. 왠지 이야기하면 오히려 우스꽝스러워 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평소와 달리 조용히 이야기만 듣고 앉아있는 저에게 친구녀석들은 서서히 바보의 그림자를 드리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저는 결심하고 저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대충 국민학교 2학년때 정도 였을거야. 지금도 기억하고 있을 정도로, 어린 나한테는 굉장한 우월감과 성취감을 안겨준 사건이였으니까. 너희들도 기억하지? 왜 지금 초등학생들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때 저학년들 교과목이 슬기로운 생활, 즐거운 생활 이런 이름이였자나. 그 중에 즐거운 생활이 대충 체육+미술에 해당하는 과목이였지 아마? 음악쪽에 가까웠었나? 아무튼 교육적인 목적보다 놀이를 위주로 딱딱하지 않게 짜여져 있었지. 나는 국민학교 3학년때 지금 여기로 전학을 왔으니까, 사실 니네들이 이 이야기를 확인할 길은 없어. 그 전까지는 서울에서 학교를 다녔으니까.

 

아무튼 어느 '즐거운 생활 수업시간'이었어. 그 날은 운동장에서 수업을 했는데 선생님이 운동장에 큰원 두개를 그리시더니 두원을 직선으로 이었지. 내가 당시 다니던 학교는 신설학교여서 한 학년에 3개반이 전부였고 한 학급 인원도 30~34명 정도였어. 우리반이 정확히 몇명이 였는지는 당연히 기억안나고, 대충 30명 정도되는 아이들이 반으로 나위어서 두원안에 들어갔어. 일종의 게임이지. 룰은 각 두 원안에 있는 아이들이 한명씩 나와서 이어져있는 직선 가운데에서 만나 가위바위보를 하는거야. 비길 경우 승부가 날때까지 하고 승부가 가려지면, 진 사람은 원을 이동해 상대팀으로 흡수 당하는거지. 지금 새삼스레 생각 해보니까 이 게임, 돈대신 사람을 걸고하는 사람따먹기(?). 도박이였네. 조금 위험한 게임인데.

 

대충 이런 룰이였고 애들은 각 원에서 서로 나가겠다고 극성이였어. 곧 선생의 통제로 줄을 서서 자기 차례를 기다렸지. 그런데 나는 당시 굉장히 소극적이고 낯을 많이 가려서 학교생활에 자발적으로 나서거나 하지 않았어. 나는 줄 맨뒤에 서서 상대팀 녀석이 패배해서 우리팀에 올때마다 항상 차례를 양보하고 줄 맨뒤에 서서 나가지 않았어. 내 차례가 오기전에 게임에서 이기길 바랬지. 그렇게 엎치락 뒤치락 생각보다 게임이 길어 지더라. 그런데 어느순간 우리팀 인원이 서서히 줄기 시작했어. 나는 조금씩 불안했지. 내 차례가 오지 않았으면 하고 진심으로 빌었어. 내 차례가 오면 그 순간 만큼은 오로지 나와 상대방의 승부가 관심을 받게 되자나. 그 상황이 너무 부끄럽고 창피해서 상상만으로도 싫었어. 그정도로 당시 나는 최악의 쑥맥이었어. 물론 친구도 없었지.

 

걱정은 현실이 되었어. 우리팀이 나를 제외하고 모두 상대팀에 흡수된거야. 텅빈 원안에 나 혼자만 남았어. 나는 어쩔수 없이 바들바들 떨면서 앞으로 나갔어. 빨리 해치우고 싶었어. 얼른져서 게임을 끝내자. 오로지 이 생각이였어. 그런데 나는 그자리에서 기적을 행했지.

 

 

 제 이야기를 가만히 듣던 친구들은 서로 번갈아 얼굴을 쳐다보더니, 비꼬듯이 물었습니다.' 그래서 니가 1:29를 이겼다고?' 믿기지 않겠지만, 그것은 사실이었습니다. 저는 그날 저를 제외한 반 전체를 상대로 가위바위보 무패 행진을 거듭하고 게임에서 이겼습니다. 마지막 녀석이 우리팀으로 흡수되고 선생님이 게임 종료를 선언했을 때, 저는 반 아이들 모두의 찬사를 받으며 영웅시 되었습니다. 친구녀석들은 제 이야기를 듣더니 어디서 약을 파냐며, 구라도 정도껏 해야 믿는 다며 야유를 보냈습니다. 믿지 못하는 것이 어느정도 이해는 갔습니다. 그도 그럴것이 정확한 인원은 기억나지 않지만 최소 29연승은 했다는 사실인데 확률로 계산을 해보면 어림도 없는 수치가 나옵니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항상 친구도 없이 외톨이로 조용히 학교생활만 성실하게 해오던 저는 그 사건 이후로 반 아이들에게 큰 관심을 받게 되었고 친구들도 하나둘씩 늘어나기 시작해, 내성적이던 제 성격을 크게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 사건을 계기로 저는 엄청 활달하고 깝치는 성격으로 변모하였고  다음해 3학년이 되던해 임원 투표에서 처음으로 부반장이라는 자리에 올랐습니다. 어찌보면 그 사건은 제 인생의 큰 변환점이라고도 할 수있습니다.

 

 그 술자리에서 진위여부의 논쟁이 끝나고 새벽에 집으로 돌아오는 길. 집이 같은 방향이여서 택시를 함께 타고 오던 친구J가 조용히 물었습니다. '근데 그거 진짜냐?' J는 고등학교 동창 친구들 중에서도 각별한 사이였습니다. 저는 애초에 믿어주길 바라지도 않았고 술기운만으로도 벅찬지라 '글쎄' 하고 그냥 웃어 주었습니다. 그날 그렇게 집으로 도착하고 잠자리에 들었을 때, 저는 명상에 잠겼습니다. 사람은 어둡고 혼자 있는 공간에서 가끔 사념에 빠지지 않습니까. 특히 잠자리는 그 조건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는 것 같습니다. 보통 때라면 취직 걱정으로 시작해 온갖 잡념들이 떠오를 텐데 그 날 술자리때메 떠오른 추억때문인지, 저는 그날의 영광을 떠올리며 혼자 히쭉거렸습니다. 반 아이들 전체가 저를 동그렇게 감싸고 헹가래라도 칠듯, 탄성을 지르고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당시 굉장히 까불 거리던 녀석이 혼자서 '경사났네 경사 났어'하며 흡사 탈춤을 추듯 덩실덩실 거리며 둘러쌓고 있는 아이들을 빙빙 돌던 모습. 아득하지만 생생한 기억.

 

 그리운 옛추억에 기분좋게 스르르 잠이 들려던 순간이었습니다. 저는 순간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본능적으로 알아 차렸습니다. 이 기억의 모순된 사실을. 항상 이 기억을 떠올릴때면 마치 저장된 동영상처럼 매번 떠오르는 이미지. 16년동안 변하지 않던 조금전까지만 해도 떠올리며 흐뭇해 하던 그 기억. 그 이미지는 저를 둘러싸고 있는 아이들의 환하게 웃는 얼굴이 아닌 저를 둘러싸고 있는 무리의 외각의 이미지, 그 무리를 덩실덩실 춤을 추듯 빙빙 도는 아이의 모습. 그것은 겪어서 기억하고 있는 이미지가 아닌 관찰자의 기억과 흡사했습니다. 저는 잠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당혹스러운 마음에 담배를 꺼내 물었습니다.

 

 

 쓰다 보니 이야기가 너무 길어져서 나눠 써야 할 것 같아 오늘은 여기서 끊습니다. 별 시덥지 않은 이야기를 들려 드리는 것 같아 상당히 조심스럽게 되네요.ㅋㅋㅋ 읽어 주셔서 감사하고 뒷 이야기는 빠른 시일내에 이어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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