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망디의 한국인

눈물을부탁해 작성일 14.04.09 22:3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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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동방대대 소속의 병사가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미군에게 포로로 잡힌 사진으로 수많은 네티즌들을 충격에 빠뜨렸고, 이후 국내에서 이 사건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발단은 밴드 오브 브라더스로 유명한 스티븐 앰브로스의 책에 있었던 유타 해안에서 로버트 브루어 중위가 언어가 통하지 않는 동방대대 출신의 병사를 심문했는데 그가 한국인이었다는 설명으로 시작되어 어느 네티즌에 의해 상기의 사진이 한국에 알려지면서 많은 이들이 이 사람의 행방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 사진의 사람이 한국인이란 증거는 사진과 언급된 정보 말고는 없다. 포로 정보 관리는 어떻게 한거냐 연합군 당시 심문자와 참전자만 알고 있는 비밀


대충 유타 해안의 한국인이 어쩌다가 이런 모진 일을 겪었는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추측이 있다.


1.1 소련군에 징집된 일본군 포로설

일본의 징병으로 끌려감 → 할힌골 전투에서 소련군의 포로가 됨 → 독소전쟁에서 병력이 부족한 소련군이 이들을 소련군으로 징집함 → 독일군의 포로가 됨 → 독일군도 병력보충을 위해 이들을 군사로 씀 → 노르망디에서 연합군에게 붙잡힘.


문제는 할힌골 전투나 중일전쟁 때 겉으로는 포로가 되면 안된다고 주장하던 일본군이지만, 나름대로 이면에는 포로 교환 교섭을 했었다는 것을 볼때 소련의 포로에서 소련군 징집은 생각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그러니 마이웨이에서처럼 일본군 포로설은 희박하다.


 

1.2 고려인? 혹은 중앙아시아계 소련인?


그래서 나온 다른 설은 저 동양인은 원래부터 소련에 거주하던 사람, 즉 고려인이 징집되었다는 설이다. 독소전쟁 당시 소련군 포로 사진 등을 보면 한국인이 아니더라도 동양계 병사들도 드문드문 있다.고려인들은 대독전쟁에는 나름 참전한 경우가 있다. 겐나디 한(1919~1943) 같은 경우는 동아시아계로 드물게 공군 조종사로 복무하며 나치와 싸우다가 격추당해 목숨을 잃었다. 6.25 전쟁 때 조선인민군 총참모장이었던 남일 또한 소련군에서 대위까지 오른바 있다. 소련군에는 동양인이 꽤 많이 섞여 있었고, 고려인뿐만 아니라 중앙아시아계 소련인도 무차별 징집했으므로 동양인이라고 해서 조선인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무리다. 그러므로 소련군의 동양계 병사- 포로 - SS에 부역의 설이 더 신빙성이 있다.


무장친위대에 중앙아시아계 소련인 부대가 공식적으로 편제되어 있었으므로 오히려 "아시아계 소련인설"이 가능성이 높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는 달리 소련군에 아시아인이 상당히 많았기 때문에, 이들이 독일에 포섭되어 무장 친위대에 참여한 것은 별로 이상한 것은 아니다. 이런 독일 부역자를 심사하기 위해 소련군은 스메르쉬를 만들어 호환된 포로 전원을 심사하여 처형하거나 혹은 굴라그로 보냈다.

 

2 행로는?


이들이 누구이며, 또한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는데 이들의 최후에 대해 앰브로스 등은 "아마 한국으로 돌아가서 한국전쟁을 치렀을 것이다"라고 하고 있으며 어떤 사람들은 다시 소련으로 끌려가 처형당했다[10]고 주장하며 어떤 이들은 그들이 미국에 남아 여생을 지냈다고 추측하나 어느 것도 알 수가 없다.


일단은 실제로 이런 사람들이 5~10명 정도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사실 연합국은 소련군 전향 포로와 러시아 혁명 이전부터 망명한 코사크계, 백계 러시아인들을 소련에 다시 넘긴 사례도 있었다. 본문 아래의 사례 같은 해피 엔딩이 많기만 바랄 뿐. 사실상 소련군 전향 포로에 대해서 2가지 사례가 모두 공존한다고 보면 된다.


어찌보면 역사의 거대한 물결에서 기구한 삶을 산 사람들이라 할 수 있겠다. 비슷한 사례로 일본군에서 중국군(팔로군), 북한군을 거쳐 다시 한국군에 복무한 할아버지도 있다(#).


저 사진의 사람인지는 불명이나 위의 이야기는 양경종이라는 조선인의 경험이라는 뜬소문이 돌고 있다.1920년 출생으로 신의주 출신이었던 양경종은 1938년 징집되어 관동군에 배속되었고, 할힌골 전투에서 포로가 되었다. 자원입대가 아니란 사실을 밝힌 양경종은 곧바로 소련군에 편입되었으며, 1943년 여름 우크라이나 전선에서 다시 독일군의 포로가 되었다. 독일군에도 똑같이 자원입대가 아니란 사실을 밝히고 "밥만 배불리 먹으면 됩니다"란 말을 들은 독일군 장교는 양경종을 독일군 동방대대에 편입시켰다.


이후 다시 1944년 노르망디 유타 해변에서 포로가 되었고, 영국의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었다. 종전 직후 석방된 그는 1947년 미국으로 이주했으며, 1992년 사망할 때까지 전쟁에 대한 이야기는 다시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다고 한다. 위의 이야기는 미군에 포로로 잡혔을 당시 심문 내용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다만 2차세계대전 갤러리에선 양경종을 구라라고 확신하는 듯하다.


이 '양경종 설'이 구라라는 증거는 다음과 같다. 애초에 양경종 설이 출현한 것은 2004년 초 도깨비뉴스의 기사《이 1장의 사진: 민족의 비극 그러나 강인한 민초…》의 댓글 중에서였다. 위의 사진을 소개하는 이 기사의 댓글란에 'truth'라는 닉을 쓰는 익명의 인물이 다음과 같은 댓글을 남겼다:

 

이름 : 양경종
생년월일 : 1920년 3월 3일
본적 : 신의주
관동군 입대 : 1938년
노몬한 전투 참전 때 소련군 포로
1943년 여름 우크라이나 지방에서 독일군 포로
1944년 6월 6일 프랑스 노르망디 유타 해변에서 미군 포로
1945년 5월 영국 포로수용소에서 석방
1947년 미국으로 이주
1992년 4월 7일 미국 일리노이 주 노스웨스턴 대학 부근에서 거주하다 사망
평범하게 태어나 수많은 전쟁참화를 겪은 뒤 미국으로 이주
40년 넘는 세월을 평범한 미국 시민으로 생활
슬하에 2남 1녀 자녀 둠.
결코 가족들에게는 자신의 전쟁 경험을 이야기 한 적 없다고 전해짐.

해당 기사의 기자는 추가 사실 확인을 위해 개별적으로 연락을 달라고 요청하였으나, 이 익명의 인물은 더 이상의 정보를 남기지 않았다. 양경종이란 인물이 실존 인물이고 자녀가 존재하며 제3자가 행적을 알고 있을 정도라면, 이미 당사자가 고인이 된 마당에 추가 정보 공개 요청에 응하지 않았을 이유가 없다. 또한 언론 및 관련 동호인들의 집요한 추적에 걸려들지 않았을 리도 만무하다. 아울러 다른 이외의 어떤 객관적인 자료도 위의 댓글의 신빙성을 뒷받침하지 않고 있다. 현재로서 '양경종 설'은 정체 불명의 누리꾼에 의한 낚시질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애초 내용도 뭔가 미심쩍고 앞뒤가 맞지 않는다.

2005년에 SBS 스페셜에서 "노르망디의 코리안"이라는 제목으로 이들에 대한 2부작 다큐멘터리를 방영했다. (21~22회)#


2007년에 발표된 조정래의 역사소설 <오 하느님>은 이 한국인들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를 중심 소재로 삼은 영화 마이 웨이(강제규 감독 작품)가 2011년 12월 22일에 개봉했다. 장동건, 오다기리 죠, 판빙빙(范氷氷) 등 캐스팅이 매우 화려하다


중국의 밀리터리넷에서는 이 사람을 중국인이라 주장하고 있다.

 

 

3 결론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노르망디에서 연합군 포로가 된 한국인은 있었다. 그러나 이 사진의 사람이 양경종이라는 사람이라는 증거는 없다.. 그가 누구인지는 잘 모르지만 이 사진의 주인공 또한 역사의 희생자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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