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가 모니는 실존 인물일까? 전설상의 신일까?
안녕하세요:)
미스테리 주제는, 석가모니입니당:D
과연, 석가모니는 실존했던걸까요?
아니면 그저, 전설속의 인물일뿐일까요? 그럼 한번 알아볼게요:)
*역사와 전설 속에서 살아 숨쉬는 인물*
불교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석가모니는 본래 천계의 신선이라고 말한다.
강생하기 이전은 보살이라고 하며 보살은 신의 후계자인 셈이다.
석가모니 이전에 여섯 명의 보살이 강생하여 부처가 되었다고 한다. 불은 범어로 '불타'를 줄인 것이고
불타는 '진리를 깨달은 자'를 이른다.
석가모니는 제7의 불타가 될 보살이었다.
어느 날 석가모니는 진리를 깨닫고 해탈하게 되었다. 천계를 떠나기 전 석가모니는 천신의 무리를 모두 불러 모아
불법을 강연했다. 그리고 자신의 후계자인 미륵을 소개했다.(불경에서 말하길 미륵은 석가모니가 죽은 후
56억 7천만년 후에 강림할 것이라고 했다.)
신들의 무리는 석가모니의 모체가 될 여인과 나라를 찾던 중 마침내 인도의 카필라 왕국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 나라의 왕인 정반왕은 인도의 여러 왕 중에서 가장 현명하고 용감했으며
그의 부인 마야 역시 우아함과 아름다움을 갖추었다.
석가모니 보살은 흰코끼리로 변하여 마야의 자궁에 잉태되었다.
마야 왕비는 어느 날 신기한 꿈을 꾸게 되었다. 흰코끼리 한 마리가 자신의 몸을 쓰다듬더니 이내 뱃속으로 들어오는 꿈이었다.
그 후 마야 왕비는 아기를 갖게 되었다. 후에 마야 왕비는 룸비니 동산에서 석가모니를 낳게 되는데
그녀가 오른손을 올려 살라 나무의 가지를 잡을 때 오른쪽 옆구리에서 아이가 태어났다고 한다.
석가모니는 세상에 나자마자 일곱 걸음을 걸었으며 곧 세상의 모든 책과 진리를 통달하였다고 전하고있다.
그래서 석가모니의 부모는 이아이의 이름을 싯다르타라고 지었다.
싯다르타는 태어난 지 7일만에 어머니를 여의고 이모에게서 자라났다.
하루는 한 노인이 찾아와 말하길 싯다르타가 집에 있으면 천하를 다스리는 왕이 될 것이고
출가하게 되면 부처가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어느 날 싯다르타는 아버지 정반왕과 함께 하늘에 제를 올리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모든 신상들이 싯다르타를 향해 예를 올리며 '크게 깨달은 자'라고 칭송했다.
정반왕은 출가하려는 싯다르타의 뜻을 단념시키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 기울였다.
싯다르타를 위해 봄, 여름 계절별로 궁전을 지었으며 호화롭고 화려한 생활을 누리게 하기 위해
온갖 향락을 베풀었다.
성년이 된 싯다르타는 아름다운 여인을 아내로 맞아 결혼을 하였고 오래지 않아 아들을 낳았다.
화려한 성 안에서 지내던 싯다르타는 어느날 성밖으로 외유를 나가게 되었고 인간의 생,로,병,사를 생생하게 지켜보게 되었다.
그는 인생의 부귀영화가 얼마나 덧없는 것인가를 깨닫고 출가를 결심했다.
야심한 밤, 그는 한 필의 말을 끌고 성문을 향했다.
마침 하늘이 도왔는지 성문을 지키는 문지기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싯다르타는 스스로 성문을 열고 고행의 길을 찾아 나섰다. 싯다르타는 출가하자마자 즉시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다.
이날 이후 싯다르타는 숲 속에 은거하며 수도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그의 나이 29세였다. 출가의 길은 곧 고행의 길이었다.
두 명의 승려를 만나 수행을 하던 싯다르타는 그 후 다섯명의 비구니와 함께 무려 6년간 고행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육체만 나날이 쇠약해질 뿐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했다.
싯다르타는 고행의 허망함을 깨닫게 되었고 한 소녀가 건내주는 우유죽을 먹은 후 나이란자나 강에서 몸을 씻었다.
함께 수행하던 승려들은 모두 싯다르타를 떠났다.
홀로 남은 싯다르타는 보리수나무 아래에 정좌한 뒤 깊은 명상에 들었다.
애욕의 신과 죽음의 신들은 싯다르타가 득도하게 되면 자신들을 해할까 두려워 마귀의 무리를 보내어
그의 수행을 막았다.
그러나 싯다르타는 전혀 동요되지 않았으며 마침내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었다.
그의 나이 35세의 일이었다.
이후 석가모니는 인도의 각 지역을 돌며 자신의 설법을 강연하고 수많은 제자를 받아들이고 기적을 행하였다.
그리곤 80세가 되던 해 쿠시나가라의 살라 나무숲에 들어가 입멸했다.
부처가 열반에 들었다는 소식을 접한 여러 나라의 왕들은 앞다투어 달려와 부처의 사리를 나누어 가졌다.
*두 가지 학설*
일부 학자들은 석가모니를 전설상의 신으로 간주하면서 역사상 실존인물이 아니라고 말한다.
석가모니의 전기는 출생부터 신비적 색채가 농후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천계의 신들이 그의 탁생(불교용어로 모태에 자신의 몸을 기탁하여 태어남) 대상을 고르고
흰코끼리로 변하여 잉태되었으며 태어나면서부터 일곱 걸음을 걷고
경전에 통달하였다는 기록은 불가사의하기 그지없다.
이러한 기록은 결혼, 출가, 고행, 득도, 불도의 전파 등에 이르기까지 전기적 색채가 매우 강하다.
석가모니가 열반에 든 시기 역시 60여 종의 학설이 존재한다.
즉, 기원전 1027년에서 기원전 370년까지 그 편차가 매우 크므로 도무지 종잡을 수 없을 정도이다.
석가모니의 탄생과 입멸에 관한 학설은 정해진 것이 없으며 그의 행적 또한 분명치 않다.
또한 석가모니의 생애를 역사적 자료에서 찾아볼 수 없다는 점.
그의 실존 가능성을 입증해줄 만한 유물과 유적이 없다는 점 등으로 미루어 석가모니가
실제로 존재했던 역사의 인물이라고 말하기에는 여러모로 근거가 부족하다.
하지만 석가모니가 실존했던 역사전 인물이라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이들은 석가모니의 탄생 시기를 기원전 624년으로 보고 입멸시기는 기원전 544년이라고 주장한다.
불경의 기록을 보면 석가모니의 생애와 활동과 입멸에 관하여 주로 신화적 요소를 가미하였으나
역사적 사실과도 그 맥락을 함께 하고 있으므로 역사적인 윤곽이 대략 일치한다.
우선 석가모니의 탄생지로 알려진 틸라우라코트는 지금의 네팔 카필라바스투 성의 유적지인 것으로
밝혀졌으며 이를 입증하는 유물들이 대량 발굴되었다.
고인도의 아소카왕이 기원전 3세기경에 석가모니를 기리기 위해 세운 석주가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으며 석가모니의 사리단을 발굴해내는 고고학상의 쾌거를 이룬 바 있다.
불경은 석가모니의 결혼을 사실로 기록하고 있다.
본래 승려의 결혼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이러한 기록은 수많은 불교도들에게 혼란을 안겨 주었다.
만약 전설상의 부처가 실존하는 인물이 아니라면 굳이 경전 상에 이러한 오점을 남길 이유가 없지 않을까?
그 외에도 석가모니가 출가하게 된 배경에는 사문(출가하여 수행하는 자)사조의 영향이 컸으나
스스로 내재된 심리적 요인이 더욱 크게 작용했다.
석가모니가 고행 속에서 득도를 결심한 것 또한 당시 인도에서 성행하던 종교적 영향이 크며
이는 지금까지도 그 영향력이 적지 않다.
오로지 정신적인 각성과 깨달음을 통해 누구나 득도의 경지에 오를 수 있다고 보았다.
불교의 교리로 잘 알려진 사성제, 팔정도, 십이인연 등은 후대에 와서 기록된 것이나
주요사상은 석가모니로부터 창시된 것이다.
따라서 역사상 석가모니의 존재는 확실한 근거를 가지며 특히 불교의 창시자라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고인도의 종교 경전은 무수히 많지만 이에 대한 문현상의 기록은 미비한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이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현실적 제약으로 인해 난색을 표명한다.
그러나 객관적인 사실에 근거하려는 학자들과는 달리 일반인들은 석가모니의 역사적 실존을 믿어 의심치 않고 있다.
1956년 인도 정부는 석가모니의 열반을 기념하는 2천5백 주년 행사를 성대하게 치르는 것으로
불교를 세계적인 종교로 추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