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조선 말기, 강원도 강릉의 오 진사댁 환갑 잔치. 종을 22명이나 부릴 정도의 부자집이었던 만큼 환갑 잔치도 거하게 치뤄지고 있던 도중… "은임아, 은탕기도 내오고, 뒷 편에 가서 술 좀 더 떠와라" 밭 일 나간 종 십여명을 제외하고 나머지 종들이 총동원 되었음에도 워낙에 정신없이 바쁘고 힘들던 차에 막내 남동생을 보고 있던 넷째 딸 은임까지 일에 동원이 되었습니다. 등에 동생을 업고 부들부들 떨며 귀한 은탕기를 꺼내었습니다. 순은으로 만든 이 은탕기는 특히나 어머니가 아끼는 그릇. 은임은 이제 그 그릇과 술 주전자를 들고 장독대로 향했습니다. 키보다도 더 높은 큰 독에 발판을 놓고, 옆 장독대에 잠깐 은탕기를 올려놓고… 이제 술주전자에 술을 듬뿍 떠서 내리는 순간, 등에 업고 있던 동생이 그만 은탕기를 툭 쳐서 그 큰 술독에 떨어뜨리고 말았습니다. 은임도 그만 깜박하고 그냥 술 주전자만 들고 앞 마당의 잔치판으로 들고 가버렸구요.
잔치가 끝나고, 화기애애하게 뒷정리나 지어야 할 오 진사 댁에서는 무서운 문초가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확실히 범인이 아니라는 증거가 있는 종 십 여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임시로 마련된 형틀에 묶여 주리를 틀리고 있었습니다. "끄으으으으으으윽! 아니어요! 절대 아니어요!""아닙니다 아닙니다" 다리가 으스러지는 고통 속에서 종들은 절대 자신이 '은탕기'를 훔치지 않았다고 울부짖었지만, 당장 오늘까지만 해도 있던 은탕기가 한창 바쁜 잔치 도중에 사라졌으니 범인은 종들이 틀림없으리라 확신한 주인 마님은 오히려 더 역정이 날 노릇이었습니다. 몇 시간에 걸친 지독한 문초. 보는 사람이 다 진땀이 날 정도의 고문이 이어졌지만 범인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에 격분한 마님은 무당까지 불렀습니다. 그 자리에서 굿판이 벌어졌습니다. 게다가 그 굿의 내용도 무시무시한 것이 "그 은탕기를 훔쳐간 놈은 그 자리에서 죽으리라" 하는 내용. 한 밤 중에 불을 밝히고 벌어진 굿판. 동네 사람들이고 집안 사람들이고 그 무시무시한 굿판을 구경하노라니… 그 굿도 요상한 것이, 시루에서 갓 쪄낸 뜨거운 떡, 김이 펄펄 나는 그 뜨거운 떡판 위에 고양이를 던지면서 "가져간 놈은 그 즉시 죽으리라!" 하고 저주를 퍼붓는 굿이었는데 과연 고양이를 그 뜨거운 떡 위에 던지자 고양이는 펄쩍 뛰어오르며 어디론가 달려가는데… 그것은 은탕기를 큰 술 독에 빠뜨린 그 집의 막내 아들. 그 고양이는 어린 아이에게 달려들더니 사람들이 채 말릴 새도 없이 어린 아이를 할퀴고 목덜미를 물어뜯었습니다. 그 끔찍한 광경에 사람들은 다 기겁을 했고 굿판은 그렇게 끝났지만 며칠 후 그 막내 아들은 정말로 죽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집에서 사람이 죽었으니 그 술은 이제 못 쓴다며 술독을 비우는데 그제서야 그 안에서 은탕기가 발견되었습니다. 모진 고문에 이제 다리를 못쓰게 된 종까지 있는 상황에서 밝혀진 억울한 누명. 그리고 그제서야 일이 어떻게 된 것인가를 깨달은 넷째 딸의 고백. 집안 분위기는 흉흉해졌습니다. 당장이라도 집에 불을 싸지르고 주인 가족을 죽여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 집안 어르신은 결국 자신의 오해 탓에 고문을 받은 종들과 그 식솔들의 노비 문서를 태우고 그들이 먹고 살 토지까지 나눠주고 그들을 달래었습니다. 그 종들 중에는 부부의 연을 맺은 종도 있다보니 그들을 함께 풀어주고, 먹고 살 만큼의 땅까지 주고… 그렇다고 하여 당장 집이 망할 정도야 아니었지만, 문제는 종들의 몸을 망가뜨리고, 또 고양이에게 자식이 물려죽는 등 흉흉한 소문이 동네에 돌고나니 그제부터는 과연 사람들의 마음도 떠나 집이 서서히 몰락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근 백 여 년 전, 강원도 강릉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