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1년 8월 22일 화요일 오전 10시경
"선생님, 오셨습니까."
"오, 푸파르댕. 아직 마무리 작업이 남아서 말이야."
"네, 선생님. 그럼 일 보십시오."
"....푸파르댕! ...없어! 없다고!"
"네? 뭐가 없다는 건가요?"
"모나리자!"
작품명: 모나리자
작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
제작연도: 1503 - 1506
크기: 53 x 77cm
예상가격: 약 $100,000,000 ~ 743,000,000
미술사 최대의 도난 사건
16세기 프랑스의 국왕이었던 프랑수아 1세의 손에 들어간 이후, 프랑스의 국유재산으로 보관되던 유화 '모나리자'. 이후 프랑스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던 이 유화는 1911년 8월 21일, 말 그대로 누구도 눈치채지 못한 사이 사라졌다. 루브르 측이 모나리자의 도난 사실을 인지한 것은 다음날인 22일 정오 무렵. 그마저 당일 모나리자를 모사하고자 방문한 프랑스의 저명 화가 루이 베루 덕분이었다.
이날 오전 10시경, 모나리자를 배경으로 한 루브르 박물관 내부를 그리고 있던 루이 배루가 처음으로 이변을 눈치챈다. 모나리자가 전시되어 있던 살롱 카레에, 언제나 미소를 지어주던 여인의 모습이 보이지 않던 것. 대신, 여인이 있던 자리엔 액자 고정못만이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루이 베루는 즉시 경비인 푸파르댕을 불렀다.
"푸파르댕! 모나리자가 없어졌네!"
"에이 선생님, 누가 감히 모나리자를 훔쳐가겠습니까. 어제가 월요일이라 휴관하지 않았습니까. 아마 저희 사진사가 사진작업 한다고 어제 모나리자를 가져가 놓곤 게으름을 피우고 있나 보죠."
"정말인가? 그것참, 이제 곧 마무리인데 말이야.. 이봐 푸파르댕, 사진사한테 가서 작업이 다 끝났으면 어서 반납해달라고 좀 전해줄 수 없겠나? 부탁함세."
<당시 루이 베루가 그렸던 그림>
이때만 해도 모나리자는 박물관 측의 사진 작업으로 인해 잠시 떼어진 것이라고만 여겨졌다. 그도 그런 게, 당시 루브르 측은 한창 박물관 내의 소장품들을 모두 사진 촬영해놓는, 일종의 앨범화 작업을 진행 중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루이 베루의 부탁에 투덜거리며 사진사를 찾아갔던 푸파르댕은 그곳에서 사색이 되어 읊조린다.
"모나리자가 없어졌어..."
그렇게 모나리자의 도난 사실은 이날 정오 무렵에야 드러난다. 신고를 받은 경찰이 즉각 비밀리에 내부를 수색하기 시작했고, 아무런 진전이 없자 오후 3시경부터는 아예 박물관 전체를 폐관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시작된 수색에서도 루브르 측과 경찰은 범인이 누구 인지는커녕, 당장 모나리자가 언제 없어진 것인지조차 파악하지 못한다. 모나리자가 이틀 전까지는 제자리에 있었다는 사실과 모나리자의 액자와 유리로 된 보호 케이스가 계단에서 발견되었을 뿐이었다. 이에 루브르 측이 할 수 있는 거라곤, 박물관을 일주일간 폐관한 채 경찰의 수사에 얌전히 협조하는 것뿐이었다.
사라진 여인
하지만 프랑스 경찰의 사활을 건 수사에도 불구, 모나리자의 행방은 추측조차 할 수가 없었다. 물론 이는 범인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워낙 감쪽같은 절도였기에 복수범에 의한 계획적인 절도라고 추측할 뿐이었다. 결국, 프랑스 정부는 완전비상 상태에 들어섰고 각국의 항구와 세관에도 초비상이 걸렸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도 모나리자의 자취는 찾을 수가 없었고, 사람들은 인류의 문화유산을 어처구니없이 잃어버린 프랑스 정부를 향해 조소와 비난을 보냈다.
여기에 프랑스 경찰이 모나리자 도난과 관련해 당대의 예술가이던 이탈리아 태생의 프랑스 영주권자인 작가 기욤 아폴리네르와 스페인 태생의 프랑스 영주권자인 파블로 피카소를 잘못 연행하면서 여론은 더욱 악화된다. 아폴리네르의 조수로 일했었던 게리 피에레가, 실은 루브르 박물관의 단골 도둑인 것이 밝혀지면서 경찰이 이들에게도 용의점을 두었던 것. 경찰은 이 두 예술가가 피에레에게 모나리자의 절도를 의뢰한 것은 아닐까 하고 의심했다. 뭐, 어쨌든 경찰은 여론으로 인해 무슨 성과라도 내야만 했다.
이와 같은 상황에 아폴리네르와 피카소는 몹시 난처해했다. 그들은 피에레가 도둑질을 일삼던 자였는지 까맣게 몰랐던 것. 특히, 피에레로부터 흉상 2점을 구입한 적이 있던 피카소의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결국, 1911년 9월 초 아폴리네르는 체포되어 5일 동안 구류되었고 피카소 역시 소환되어 조사를 받기에 이른다.
<체포되는 아폴리네르>
이후 용의 선상에 오른 이 두 예술가는 울먹이며 결백을 호소한 끝에 다음 해 1월, 온전히 혐의를 벗게 된다. 여담으로 이 사건으로 인해 두 예술가 중 누가 더 피해를 많이 입었느냐고 묻는다면, 단연코 아폴리네르라고 답할 수 있겠다. 적어도 피카소가 피에레로부터 구입한 흉상에 영감을 받아 미술사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 '아비뇽의 처녀들'을 그릴 수 있었다면, 아폴리네르는 5일 동안 구류되는 꼴을 당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훗날 아폴리네르는 해당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불평했다고 한다.
"그거 알아? 모나리자 도난 사건으로 프랑스에서 체포된 유일한 사람이 나라는 거!"
이처럼 모나리자 도난 사건이 완전히 미궁으로 빠지면서, 루브르와 프랑스는 국제적인 망신살을 당한다. 해당 사건으로 루브르의 관장과 보안팀장 등이 파면되거나 면직되었고, 수사 난항 속에 급기야 심령술사나 초능력자를 자청하는 이들이 사건을 해결하겠다며 나서는 꼴도 생겼다. 물론, 초자연적인 힘(?)에도 이 세기의 명화는 모습을 드러내길 거부했다.
여인의 미소는 누구의 것?
해가 흘러 1912년, 프랑스 내 여론은 점점 모나리자와의 이별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동년 겨울엔, 루브르 측마저 비워두었던 모나리자의 자리에 라파엘로의 '발다사레 카스틸리오네의 초상'을 전시하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위대한 유산은 생각보다 빠르게 잊혀져갔다. 그러던 1913년 겨울, 처음 사라졌을 때와 마찬가지로 모나리자가 갑작스레 그 모습을 드러냈다. 어느 정체 모를 자가 이탈리아 피렌체의 갤러리 주인인 알프레도 게리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낸 것.
"일찍이 나폴레옹이 약탈해갔던 우리 조국의 자긍심, 그 자긍심을 내가 가지고 있소. 우리 조국의 자부심을 상징하는, 레오나르도의 모나리자 말이오!"
이러한 주장에 혹시나 싶어 연락을 취한 게리는, 이 정체불명의 남자가 소유한 모나리자에 대해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미술관인 우피치 미술관 관장 지오반니 포지에게 감정을 의뢰했다. 그리고 감정 결과, 남자의 모나리자는 레오나르도의 모나리자였다. 둘은 즉각 이 사실을 경찰에 알렸고, 그렇게 모나리자와 그 절도범은 어느 날 갑자기 세상 앞에 나타났다.
<모나리자 도난 사건 범인의 체포 당시 사진>
모나리자의 절도범은 갓 서른 살의 이탈리아 태생 빈센쵸 페루지아라는 남자였다. 그는 모나리자를 훔치기 1년 전, 모나리자의 보호용 유리 케이스를 설치하는 일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그 덕분에 그는 루브르의 보안망을 어떻게 피해가야 하는 지를 알고 있었다. 그렇게 그는 휴관일을 하루 앞둔 1911년 8월 20일, 루브르 박물관에 입장해 폐관할 때까지 벽장 속에 몰래 은신해 들었다.
그 뒤로는 일사천리였다. 다음 날 아침, 페루지아는 모나리자의 액자에서 그림만을 빼내어 미리 준비한 작업복(박물관 내 직원들이 주로 입던 예술가 풍의 흰색 가운) 안에 숨긴 채, 입구 쪽 경비가 잠시 물을 뜨러 간 사이 유유히 박물관을 빠져나갔다. 그리고는 훔친 모나리자를 자신의 아파트에 숨기고선, 그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은 채 침묵을 유지했다.
<당시 범행상황을 묘사한 그림>
<당시 페루지아가 2년간 모나리자를 숨겼던 파리의 아파트>
한편, 천만다행으로 이탈리아에서 체포되면서 그곳에서 재판을 받게 된 페루지아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했다.
"나폴레옹이 우리의 모나리자를 약탈하지 않았소! 그래서 내가 다시 조국으로 가지고 온 것이오!"
뭐, 모나리자 도난 사건의 전말이 드러나자 당연히 이탈리아 국민들은 페루지아를 영웅시하기 시작했다. 모나리자가 본래는 레오나르도의 사후, 모나리자를 상속받은 그의 제자로부터 프랑수아 1세가 구입하면서 프랑스 왕가의 소유가 된 것이라는 사실과 무관하게 말이다. 그렇게 이탈리아 내 여론은 페루지아를 애국자로 추앙했고, 이러한 분위기는 재판에까지 이어졌다.
<재판장에서의 페루지아>
결국, 페루지아는 정상참작을 받아 징역 1년을 받았으며 후엔 형기가 더 줄어 최종적으로 7개월간의 징역형을 받았다. 그리고 모나리자는 이탈리아 내에서 이른바 고별 전시회가 있고 나서 루브르로 돌려보내 졌다.
모나리자를 훔친 뒤 즉각 자국의 박물관에 기부하지 않고서 사건이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화상(?商)에게 금전을 받고 넘기려고 했던 사실로 미루어 페루지아가 했던 주장은 사실이 아닐 수도 있으며, 그를 정신감정 했던 의사의 진단(페루지아는 매우 단순명료한 사람으로, 모나리자 도난에서 어떠한 철학적 심오함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는)으로 미루어 단순히 자국의 천재가 남긴 유산이 다른 나라에 있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페루지아는 100년이 지난 지금도 이탈리아 내에서 영웅대접을 받고 있으며, 그의 고국에선 '모나리자 도난 사건'을 '모나리자 수복 사건'으로 부르고 있다. 그리고 이탈리아는 최근까지도 프랑스에 이 미소 짓는 여인의 '반환'을 요구하고 있다.
에필로그
역사상 가장 유명한 예술품인 모나리자는, 사실상 도난당했다가 돌려진 이후 그러한 명성을 손에 넣게 되었다.
예술품은 탄생과 함께 개인이든 국가든, 그들로부터 도난당하는 역사와 함께하고 있다.
현재까지 도난당한 예술품들은 한화로 수조원대에 다다른다.
'도난당한 예술품'은 세상에서 가장 찾기가 어려운 도난품이다. 한점에 수십억에서 수천억에 이르는 이러한 도난품들이 누구의 서재에 있는지는, 실질적으로 알아내기가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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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조문헌: 위키백과, TIME, Le roman vrai des chefs-d'oeuvre
[이상한 옴니버스] 일흔 번째 화, 모나리자가 사라졌다! 끝.
[출처] [이상한 옴니버스] 모나리자가 사라졌다!|작성자 메데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