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해적시대 악명높았던 해적들

부엉잉잉 작성일 16.01.22 13: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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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전역에 근대화와 패권주의를 몰고 온 '대항해시대'

 

그리고 16세기 후반 영국에서 발행된 '허가증'

 

 

"지금부터 이 허가증을 발부받은 선박에는

적국의 함선을 공격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한다.

 

그리고 거기서 얻은 적국 함선의 화물 또한 취득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한다.

 

이 '사략 허가증'을 발부받고 싶은 자는 지금 바로 국가에 허가료를 지불할 것!"

 

 

이처럼 사략(privateer, 민간 소유의 선박에 정부가 적국의 함선을 

공격 또는 약탈할 권리를 부여하는 것)이라는 미명하에 

적국에 대한 해적 행위를 합법화하던 사략 허가증은 

곧이어 유럽 각국에서 남발하는 실정에 이르렀고,

이러한 사략 행위로 인해 유럽 각국들 간의 해상 견제는 더욱 심화되었다.

 

바야흐로,

'대해적시대'의 창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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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자민 호니골드 해적단 

 

 

벤자민 호니골드(? - 1719. ?)

 

해적에서 해적 사냥꾼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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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노퍽 주에서 태어났을 것이라는 것 외에, 해적 생활 이전 그의 생애에 대해선 알려진 바가 없다. 

 

벤자민 호니골드는 당시의 해적들 대부분이 그러했듯,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중 사략선에 몸을 담았다. 이후 해적단을 이끌면서 다른 해적들과 마찬가지로 불법적인 해적질을 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아메리카 해안과 카리브해를 기점으로 해적질을 하던 그는, 1716~1717년간 짧은 해적 생활을 하면서 10척 이내의 함선들(주로 프랑스 선박)을 나포했다. 

 

벤자민 호니골드는 다른 해적들과 달리 잔학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어느 날은 그가 한 함선을 나포하고는 그 배에 승선했는데, 여기서 그는 미안해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우리 선원들이 전날밤 술에 취해서는 그만 모자를 바다에 던저벼렸다고 하오. 모자가 없는 해적이라니! 그러니 우리가 바라는 것은 하나라오. 지금부터 그대들의 모자를 받아가겠소."

 

 

여기서 나포한 선원들의 모자를 수거한 벤자민 호니골드 해적단은, 유유히 자신들의 배로 돌아갔다고 한다. 

 

한편 1717년까지 해적질을 이어오던 벤자민 호니골드는, 1718년이 되자 영국령 바하마의 초대 총독으로 취임된 우즈 로저스에게 그때까지의 불법적인 해적질들을 사면해줄 것을 요구한다. 이는 당시 영국의 왕이었던 조지 1세가, 1718년을 기해 해적들을 대상으로 해적질을 그만두는 자에게 사면권을 주겠다고 발표했기 때문이다.

 

우즈 로저스는709년부터 1년여간 해적 생활을 하던 이였는데, 총독으로 임명되고서부터는 바하마 내의 해적들을 소탕하는 데에 앞장선다. 그리고 여기서 우즈 로저스는 사면을 요구한 벤자민 호니골드가 역량있는 자라 판단하고는, 그에게 사면을 조건으로 다른 해적들을 소탕할 것을 제시한다. 

 

그렇게 해적 찰스 베인과 스티드 보넷을 주타켓으로 잡은 벤자민 호니골드는, 그러나 1719년 멕시코로 교역을 떠난 길에서 그만 허리케인으로 인해 암초에 부딪히면서, 자신의 선원들과 함께 좌초된 채 사망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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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어쌔신 크리드 4: 블랙 플래그'에서의 벤자민 호니골드> 

 

 

  

에드워드 티치(1680? - 1718. 11. 22)

일명 '검은 수염'

 

가장 오랫동안 언급되는, 그리고 가장 캐릭터 강했던 해적들의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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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0년경 영국의 항구도시 브리스틀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에드워드 티치 또는 에드워드 태츠. 그러나 생년과 마찬가지로 그의 고향과 본명 또한 불분명하며, 해적이 되기 전의 생애에 대해서도 역시 알려진바가 없다. 

 

에드워드 티치는 성인이 되자마자 사략선의 선원으로 들어가는데, 이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막바지였던 1710~1713년 시기로 자메이카를 거점으로 두고 있던 사략선이었다. 

 

1716년경에는 서인도 제도 바하마의 뉴프로비던스 섬으로 거취를 옮긴다. 그리고 이즈음 자메이카를 거점으로 하며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당시 영국 측의 사략선으로 활동했던 유명 해적, 벤자민 호니골드의 밑으로 들어간다. 

 

1717년 11월 18일에는 카리브해에 있는 프랑스령 마르티니크 섬 근처에서, 40문의 대포를 실은 300톤의 호위함과 맞닥뜨린다. 여기서 배의 지휘를 맡은 에드워드 티치는, 각각 12문과 8문의 대포를 싣고있던 소형 선박 2척과 250명의 선원을 데리고서 이 거대 선박을 사로잡는 데에 성공한다. 그리고 그렇게 사로잡은 배에 '앤 여왕의 복수호'라는 이름을 붙이고선, 자신의 해적선으로 사용한다. 

 

벤자민 호니골드 해적단에서 두번째 배의 지휘를 맡고있던 에드워드 티치는, 이후 대서양 연안과 서인도제도 부근을 휩쓸면서 유명세와 악명을 동시에 떨치게 된다. 그는 주로 항해중인 선박을 습격한 뒤 선원들을 승선시켜 모든것을 약탈하는 방식을 사용했는데(물론, 항구 주변의 마을들 또한 그냥 지나치지 않았음), 여기서 선박의 선장이 순순히 화물들을 넘긴다면 그대로 무사히 풀어주고 만약 저항을 시도한다면 즉각 선박 내의 모든 선원들을 살해했다. 

 

특히, 에드워드 티치는 30문의 대포를 실은 영국측 함선 '스카버러 호'마저 격퇴시키면서 더욱 유명해진다. 여기에 상대 선박에 승선할 때 자신의 풍만한 수염 주변으로 도화선을 설치(이러한 도화선은 그의 모자에 고정)한 뒤, 거기에 불을 붙이고는 총 칼을 든 채 습격하는 모습이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되면서 사람들은 그를 '검은 수염'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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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승승장구하던 에드워드 티치는 영국령인 바하마의 수도 나소와 캐롤라이나에 거점을 마련하기에 이르렀고, 곧 카리브해 일대는 '해적 공화국'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에드워드 티치는 그러한 공화국의 왕으로 받아들여졌다. 이처럼 에드워드 티치의 본격적인 해적 경력은 그리 길지 않았으며 그가 나포한 함선의 수 또한 40여척에 불과(?)하지만, 지금까지도 그는 해적 역사상 가장 악명높은 해적으로 꼽힌다.

 

한편 이즈음 벤자민 호니골드가 바하마의 초대 총독 우즈 로저스에게 그때까지의 불법적인 해적질에 대한 사면을 조건으로 다른 해적들(불법적인 해적질 또는 사략 허가증을 받지 않은)을 토벌하기로 하면서, 에드워드 티치는 자신만의 해적단을 이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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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피치가 사용했던 해적 깃발> 

 

 

그런데 여기서 정세가 뒤바뀌고 만다. 본래 에드워드 티치는 노스캐롤라이나의 총독에게 전리품 일부를 바치면서 일종의 사면을 받고 있었는데, 바하마의 총독이 해적 퇴치에 나서면서 해적단들이 하나둘 사라지기 시작한 것. 이는 당시 영국의 왕이었던 조지 1세가, 1718년을 기해 해적들을 대상으로 해적질을 그만두는 자에게 사면권을 주겠다고 발표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사면권을 포기한 채 계속해서 해적질을 하려던 영국령 내 해적들은 모두 타켓이 되었다. 이에 결국, 에드워드 티치는 나소에서 물러난 채 잠시 상황을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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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몇 주 되지 않아 에드워드 티치가 다시금 악명높은 해적 행위를 저지르자, 끝내 노스캐롤라의 총독 또한 그를 수배하기에 이른다. 그렇게 에드워드 티치는 노스캐롤라이나의 오크라코크 섬에서, 영국측 함선인 '펄(pearl) 호'와의 전투 중 목숨을 잃게 된다. 

 

여기서 에드워드 티치는 5발의 총을 맞고, 칼에 20회를 찔리고도 미친듯이 싸웠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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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어쌔신 크리드 4: 블랙 플래그'에서의 에드워드 티치(위), 

에드워드 티치가 모델로 사용된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아래)>

 

 

 

스티드 보넷(1688. ? - 1718. 12. 10) 

일명 '신사 해적' 

 

해적질에 빠진 귀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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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8년 영국령인 카리브해의 바베이도스 수도에서 태어난 스티드 보넷은, 지주 집안에서 태어난 이른바 부유층 자제였다. 그렇게 부유하게 자란 그는 1694년에 부친이 사망하자 가문의 재산을 상속받게되며, 1709년에는 결혼을 한다. 

 

이후 지역내 민병대에 가담하기도 했던 스티드 보넷은, 부부문제에 시달리던 중 뜬금없이 1717년 여름 해적이 되기로 한다. 그가 본래 민병대나 해적과 같은 것에 관심이 있어 일탈을 한 것인지, 아니면 어떤 알려지지 않은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그때까지 항해 경험이 전무하다시피 하면서도 본격적으로 해적이 되기로 한다. 

 

그렇게 조선소에 60톤짜리 범선을 주문하고는 거기에 '리벤지 호'라고 이름 붙인 스티드 보넷은, 돈으로 70여명의 선원들을 고용한 뒤 지금의 미국 동해안을 기점으로 해적질에 나선다. 물론, 이처럼 열정적이던 그가 당시 해적 공화국으로 불리던 카리브해를 모른채 할리 없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천부적인 해적은 아니었다. 결국, 바하마 부근을 항해하던 스티드 보넷은 스페인 함정들로부터 혼쭐이 나고는 부상을 입은 채 나소에 도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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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드 보넷이 사용했던 해적 깃발> 

  

 

뭐, 이러한 것도 그의 열정을 식힐 순 없었다. 나소에 도착한 스티드 보넷은 의기소침해할 새도 없이, 그곳에서 만난 악명 높은 해적에게 푹 빠지게 된다. 이 악명 높은 해적은 바로 해적들의 왕으로 통하던 검은 수염, 에드워드 티치였다. 

 

이후 스티드 보넷은 에드워드 티치에게 자신의 선박의 고문이 될 것을 요청하고는 자신 역시 검은 수염 해적단의 임시 일원으로, 일종의 수업을 받기로 한다. 그렇게 당대의 일류 옆에서 해적 생활을 하며 꿈을 이루게 된 스티드 보넷이었으나, 에드워드 티치는 곧 그에게 재능이 없음을 파악한다. 

 

설상가상으로 이즈음 스티드 보넷이 선박 나포에 실패하면서, 그에게 완전히 실망한 그의 선원들이 모두 에드워드 티치의 밑으로 들어가는 일이 생기고 만다. 이에 결국, 스티드 보넷은 에드워드 티치의 손님 자격으로 해적단에 머물고 마는 처지가 된다. 

 

그러던 1718년 여름, 스티드 보넷은 노스캐롤라이나의 총독으로부터 사면을 조건으로 스페인 함선을 사략할 것을 요구받는다. 스티드 보넷은 물론 사면받고싶어했지만, 해적에 대한 그의 열망은 그 이상이었다. 결국, 자신을 토마스 선상이라 칭하고는 자신의 리벤지 호를 '로얄 제임스 호'로 이름을 바꾼 스티드 보넷은 해적질을 재개한다. 

 

그러나 이를 알게 된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총독은 그해 9월 토벌군을 보냈으며, 이에 스티드 보넷은 항복한 채로 체포되기에 이른다. 여기서 스티드 보넷은 10월 24일 한차례 탈옥하는 데에 성공하나, 곧 다시 붙잡히면서 결국 교수형을 선고받는다. 

 

여기서 스티드 보넷은 총독에게 만약 자비를 베풀어준다면 다시는 해적질을 못하도록 자신의 팔 다리를 자르겠다고 다짐하나 받아들여지지 않으면서, 결국 1718년 12월 10일 사우스캐롤라이나 찰스턴에서 교수형에 처해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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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어쌔신 크리드 4: 블랙 플라그'에서의 스티드 보넷>

  

 

 

찰스 베인 해적단 

 

 

찰스 베인(1680~1721) 

 

레인저 호의 악명 높은 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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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인 해적이었던 찰스 베인은 1716년부터 본격적으로 해적질에 뛰어 들었으며, 그 이전 사략선에서 일했을 것이라는 추정 외엔 잘 알려진 바가 없다. 현재까진 1715년 여름무렵 보물을 실은 스페인의 함선이 허리케인으로 인해 난파되어 해안에 캠프를 꾸렸고, 그러한 캠프를 급습해 많은 재화를 뺏은 뒤 본격적인 해적 선장이 되었다고 알려졌다.

 

이후 주력선인 12문의 대포를 실은 쌍돛대 범선에 '레인저 호'라는 이름을 붙이고서 해적질을 일삼던 찰스 베인은, 카리브해에서 악명과 유명세를 높여갔다. 특히, 그는 당시 영국의 왕이었던 조지 1세가 1718년을 기해 해적들을 대상으로 해적질을 그만두는 자에게 사면권을 주겠다고 발표한 뒤로 유명해졌다. 이는 왕의 발표를 조롱하며 해적질을 지속하는가 하면, 바하마의 총독이었던 우즈 로저스가 끌고 온 2척의 영국군 함정을 단신으로 격퇴했기 때문. 찰스 베인은 당시 폭발물을 실은 선박을 이용해 영국군의 함정을 격퇴했다.

 

찰스 베인은 다른 어떤 해적들보다도 악질적인 모습을 보이면서 악명 또한 높았다. 상대 선박의 선원을 고문하거나 또는 자비를 약속한 뒤 항복해오는 선원들을 살해하기도 하는 등, 그의 악행으로 인해 그의 활동반경에선 무역선이 얼씬도 못했을 정도였다. 특히 그는 약탈한 재화들을 자신의 선원들에게도 제대로 나누어주지 않은며 해적들의 법도를 무시하기 일쑤였는데, 이 때문에 내부에선 점차 그에 대한 미움이 커져만갔다.

 

1718년 9월 중순에는 노스캐롤라이나의 오크라코크 섬에서 열린 검은 수염 에드워드 티치의 파티에 참석, 당시 영국군 함정 격퇴사건 이후로 심해진 감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선 몇 주간이나 파티를 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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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여기서 그는 에드워드 티치에게 나소를 공격해 해적들의 거점을 되찾자고 제안하나, 에드워드 티치는 그로 인해 너무 많은 것을 잃게 될 것이라며 거절한다. 

 

이후 11월 23일에 뉴욕으로 향하던 찰스 베인은 프랑스군의 함정과 맞닥뜨리는데, 여기서 상황이 불리하다고 판단한 그는 싸움을 중지하고 퇴각할 것을 명령한다. 한편 해적단의 조타수였던 존 래컴을 필두로 찰스 베인의 선원들은 그가 겁을 집어먹었기 때문에 도망을 간 것이라고 비난하며, 다음날 다시금 선장을 뽑도록 투표를 실시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존 래컴이 새로운 선장이 되자, 찰스 베인과 그를 따르던 15명의 선원들은 작은 보조 범선에 실린 채 쫒겨나고 만다. 

 

이때만해도 찰스 베인은 커다란 배를 빼앗아 다시 재기를 하리라고 다짐한다. 그러나 1719년 2월에 허리케인을 만나 난파되면서, 온드라스 만의 한 무인도에 표류하고 만다. 모든 선원을 잃은 채 홀로서. 그렇게 몇달간 무인도 생활을 하던 그는, 지나가던 선박에 올라타지만 그곳 선원들이 곧 악명높은 그의 정체를 알아차리면서 자메이카로 연행되고 만다.

 

결국, 교수형을 선고받고서 옥살이를 하던 찰스 베인은 1721년 3월 29일 자메이카의 포트로열에서 교수형에 처해지게 된다. 물론, 끝까지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은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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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어쌔신 크리드 4: 블랙 플라그'에서의 찰스 베인>
 

 

 

존 래컴(1682. 12. 21 - 1720. 11. 18) 

일명 '옥양목 차림의 잭'

 

해적 깃발의 창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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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2년 쿠바 태생의 영국인이라는 것 외에, 찰스 베인의 해적선에서 조타수를 맡기 전의 생애는 알려진 바가 없다. 

 

1718년부터 찰스 베인의 해적단에서 조타수를 맡던 존 래컴은, 빠르게 신임을 쌓으면서 곧 두번째 배의 지휘를 맡기도 한다. 그러던 그해 11월 23일, 뉴욕으로 향하던 찰스 베인 해적단은 프랑스군의 함정과 맞닥뜨리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 상황이 불리하다고 판단한 찰스 베인은 싸움을 중지하고 퇴각할 것을 명령하는데, 이에 대해 존 래컴과 선원들 대부분은 불만을 품는다. 그렇게 다음날인 11월 24일, 해적단의 선장을 다시금 투표로 정하자며 투표가 시작된다.

 

이러한 투표에서 존 래컴은 백 명이 넘는 선원들에게서 90표가 넘는 득표를 했으며, 찰스 베인은 고작 15표를 얻는 데에 불과했다. 해적단의 새로운 선장이 선출되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찰스 베인과 그의 지지자들은 보급품을 실은 작은 보조 범선에 실려 해적단에서 쫒겨나게 된다. 이후 주로 어선 등과 같은 소형 선박들을 대상으로 해적질을 이어오던 존 래컴은, 1719년 5월에 바하마의 총독 우즈 로저스에게서 사면을 받고는 해적질을 중단한 채 바하마에 정착한다. 그리고 이즈음 존 래컴은 술집에서 한 여성을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해적질을 그만두면서 재정상황이 한없이 나뻐지자 존 래컴은 다시금 해적이 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여기서, 그와 사랑에 빠졌던 여성 또한 남장을 한 채 그를 따르기로 결심한다. 그렇게 1720년 8월 20일, 한밤을 기해 10여명의 부하들과 나소에 정박 중이던 영국군의 범선을 교묘히 손에 넣고는 다시금 해적질에 뛰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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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래컴이 사용했던 해적 깃발> 

  

 

훔친 범선으로 서인도제도를 기점으로 예전처럼 어선 등과 같은 소형 선박들을 나포하며 눈에 띄지 않게 해적질을 일삼던 존 래컴은, 이즈음 나포한 한 선박에서 또 한명의 남장 해적을 부하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그의 두번째 해적생활은 오래가지 않았다. 1720년 10월, 당시 수배중이던 존 래컴이 영국 측의 무장 범선에게 포위되고 만 것. 여기서 항복 권유를 거절한 채 도망을 시도하던 존 래컴의 배는 결국 승선 공격을 받게 되었고, 이에  선원들은 전날밤 지나치게 취해 정신이 없던 터라 대부분 항복하거나 존 래컴과 함께 부둣가로 내달렸다. 그렇게 존 래컴의 해적단 중 남장 해적이었던 여성 2명만이 유일하게 끝까지 맞서 싸웠으며, 끝내 존 래컴을 비롯한 그의 선원들은 모두 붙잡히고 만다. 

 

1720년 11월 16일, 존 래컴과 그의 선원들 모두에게 유죄 판결이 내려지면서 곧장 자메이카의 포트로열에서 교수형에 처해지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처형된 존 래컴과 선원들의 시신은, 본보기로써 사슬에 묶인 채로 한동안 포트로열 중앙출입구에 전시(?)되는 처지가 되고 만다. 

 

한편, 그가 생전 디자인했던 해적단 깃발은 그 미적인 센스로 인해 현재 해적 깃발의 대명사로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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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어쌔신 크리드 4: 블랙 플라그'에서의 존 래컴>

 

  

 

전설이 된 여자 해적 

 

 

앤 보니(1702. 3. 8 - ?) 

 

남장 해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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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 보니는 1702년 3월 8일, 아일랜드의 킨세일에서 부유한 변호사와 그의 하녀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에 그녀의 부친은 자신의 본처와 직장을 버리고선, 앤 보니와 그녀의 모친을 데리고 사우스캐롤라이나 찰스턴으로 이주한다. 이주 직후 모친이 사망하고 마나, 그녀의 부친은 상업으로 부를 축적한 뒤 대규모 농장을 구입하면서 그렇게 앤 보니는 부유한 어린시절을 보낸다. 

 

빨간머리인 그녀는 어려서부터 성질이 불같았는데, 13살 무렵엔 성질을 못이겨 집안의 하녀를 테이블 나이프로 찌른 적도 있을 정도였다. 이처럼 성질있던 앤 보니는 성년이 되어 한 삼류 해적선 선원과 사랑에 빠지면서 그와 결혼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녀의 부친은 이 결혼을 인정하지 않았고, 그렇게 부녀는 사실상 관계를 끊게 되면서 앤 보니는 남편과 함께 나소로 이주한다. 

 

이즈음 앤 보니는 나소의 술집을 돌며 해적들과 어울리기 시작하는데, 여기서 존 래컴을 만나면서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예의 성질 급한 앤 보니는 남편과 이혼하고는 존 래컴과 결혼을 하기에 이른다. 

 

이후 앤 보니는 해적으로의 복귀를 결심한 존 래컴을 따르기로 하면서, 당시 여성의 승선을 인정하지 않던 오랜 규칙으로 인해 스스로 남장한 채 해적이 되기로 한다. 물론, 존 래컴의 선원들은 앤 보니가 여성인 것을 알고 있었으나 어쨌든 그녀는 아무런 문제 없이 해적단의 일원이 되어 승선할 수 있었다. 이는 그녀가 선장의 아내였기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재능때문이었다. 즉, 앤 보니는 왠만한 해적들은 비교도 안 될 만큼 뛰어난 총 칼 솜씨(특히 총에 대해)를 보였던 것. 

 

그렇게 해적질에 뛰어든 앤 보니는 서인도제도에서 나포한 한 선박에서 미모의 청년을 만나게 된다. 이 청년은 존 래컴에게 자신을 해적의 일원으로 받아달라고 간청했고, 존 래컴은 이를 순순히 받아들인다. 물론, 성질 급한 앤 보니는 얼마 안가 이 미청년에게 애정을 표시했는데 여기서 그녀는 깜짝놀랄 사실을 마주하게 된다. 사실 이 미청년 역시 자신과 마찬가지로 남장한 여성이었던 것. 

 

이에 앤 보니는 존 래컴과 선원들에게 이 청년이 실은 여성임을 밝히나, 정작 그들은 이 문제를 별로 개의치 않아했다. 이는 물론 먼젓번 앤 보니의 경우가 있기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문제의 여성이 뛰어난 칼 솜씨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결국, 이 남장 여성 또한 정식 일원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고 앤 보니는 곧 그녀와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하지만 그녀의 해적생활은 오래가지 않았다. 1720년 10월, 당시 수배중이던 존 래컴이 영국 측의 무장 범선에게 포위되고 만 것. 여기서 항복 권유를 거절한 채 도망을 시도하던 존 래컴의 배는 결국 승선 공격을 받게 되었고, 이에 선원들은 전날밤 지나치게 취해 정신이 없던 터라 대부분 항복하거나 존 래컴과 함께 부둣가로 내달렸다. 그렇게 존 래컴의 해적단 중 남장 해적이었던 여성 2명만이 유일하게 끝까지 맞서 싸웠으며, 끝내 존 래컴을 비롯한 그의 선원들은 모두 붙잡히고 만다. 

 

1720년 11월 16일, 존 래컴과 그의 선원들 모두에게 유죄 판결이 내려지면서 곧장 자메이카의 포트로열에서 교수형에 처해지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 앤 보니와 그녀의 절친은 임신중임을 주장하면서 사형을 연기받는다. 

 

앤 보니의 이후 행적은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그녀의 사형집행 기록이 존재하지 않으며, 석방  또한 언급되고 있지 않기 때문. 일설로는 유력자의 자리에까지 올랐던 그녀의 부친에 의해 결국 비밀리에 풀려나게 되었고, 이후 1721년에 결혼한 남성과의 사이에서 8명의 아이를 낳고는 1782년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8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한편, 앤 보니는 투옥되었을 당시 남편 존 래컴을 향해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고 한다. 

 

 

"남자답게 싸웠다면 개처럼 목매달려질 일도 없을 거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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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어쌔신 크리드 4: 블랙 플라그'에서의 앤 보니>  
 

 

 

메리 리드(? - 1721. 4) 

 

남장 해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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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0~1698년 사이에 영국에서 사생아로 태어난 메리 리드는 복잡한 성장 과정을 거쳤다고 할 수 있다. 그녀의 모친은 본래 남편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두고 있었는데, 남편과 아들이 모두 사망하자 사생아인 메리 리드를 마치 아들인양 남장을 시킨 채 키우기 시작했다. 이는 남편 측 부모로부터 계속해서 재정적 지원을 받기 위함에서였다. 

 

그렇게 10대 시절을 남자로 산 메리 리드는 별다른 어려움 없이 영국군에 입대할 수 있었고,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동안 뛰어난 전투 실력을 발휘한다. 그리고 이즈음 벨기에 태생의 군인과 사랑에 빠진 메리 리드는, 군대를 나와 그와 결혼하고는 네덜란드로 이주한다. 하지만 그녀의 결혼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녀의 남편이 얼마 안가 사망하고 만 것. 결국 그녀는 다시금 군에 입대를 하나, 여기서 남장사실이 들통나면서 쫒겨나고 만다.

 

이후 1720년, 메리 리드는 서인도제도로 향하던 선박에 탑승하던 중 한 해적선에 의해 나포되는 처지가 되고 만다. 이 해적선은 바로 존 래컴의 해적선이었다. 

 

여기서 존 래컴의 선원으로 들어간 메리 리드는, 남장 해적인 앤 보니에게 구애를 받게 된다. 그리고 이에 메리 리드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이 여성임을 밝히고마나, 의외로 그녀는 순순히 해적단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졌다. 분명 여기엔 그녀의 뛰어난 칼 솜씨도한 한 몫 했을 것이다. 그렇게 메리 리드는 정식 일원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고, 앤 보니와는 곧 절친한 사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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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녀의 해적생활은 오래가지 않았다. 1720년 10월, 당시 수배중이던 존 래컴이 영국 측의 무장 범선에게 포위되고 만 것. 여기서 항복 권유를 거절한 채 도망을 시도하던 존 래컴의 배는 결국 승선 공격을 받게 되었고, 이에 선원들은 전날밤 지나치게 취해 정신이 없던 터라 대부분 항복하거나 존 래컴과 함께 부둣가로 내달렸다. 그렇게 존 래컴의 해적단 중 남장 해적이었던 앤 보니와 메리 리드만이 유일하게 끝까지 맞서 싸웠으며, 끝내 존 래컴을 비롯한 그의 선원들은 모두 붙잡히고 만다.  

 

1720년 11월 16일, 존 래컴과 그의 선원들 모두에게 유죄 판결이 내려지면서 곧장 자메이카의 포트로열에서 교수형에 처해지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 메리 리드는 앤 보니와 함께 임신중임을 주장하면서 사형을 연기받는다. 

 

메리 리드는 이후 1721년 4월, 감옥에서 출산을 하던 중 그만 열병으로 인해 사망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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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어쌔신 크리드 4: 블랙 플라그'에서의 메리 리드>

 

  

 

이와 같이 대해적시대를 열었던 사략선 제도는 1856년 '파리 선언'과 1907년 '만국평화회의'를 통해 완전히 폐지되었다. 한편, 당시 사략선 제도로 인한 국가의 수익률은 투자대비 수천 퍼센트에 달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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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조문헌: 위키백과

                A General History of the Robberies & Murders of the Most Notorious Pirates 

                The Pirate King

 

 

출처&펌 :http://blog.naver.com/medeiason

[출처] [이상한 옴니버스] 대해적시대의 악명 높던 해적들|작성자 메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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