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황하는 악령 2

씨바둥 작성일 17.07.10 00: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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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자꾸만 철규의 뒷모습에서 교수대를
향해 꿋꿋하게 걸어가는 사형수의 모습이 떠
올랐다. 나는 애써 머리를 저어 불안감을 떨쳐
버렸다.
서울로 돌아오는 버스에 몸을 실은 나는 창
밖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올 때와는 정반대로
지영도 침묵을 지켰다.
몸이 한없이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타인의
죽음을 수수방관할 수밖에 없는 데서 무력감
이 나의 전신을 무겁게 짓눌렀다.
지영이도 비슷한 기분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면회 가서 철구를 난처하게 만들고 말았다는.
버스는 양평을 지나고 있었다. 창문을 통해
서 굳어 있는 나의 얼굴과 지영의 얼굴이 비쳤
다. 한없이 무기력해 보이는 두 사람의 모습이
혼불처럼 허공에 떠 있었다.
“철규 괜찮겠죠?”
지영이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이 상황에서
나의 대답이란 뻔할 수 밖에 없었다. 지영도
그걸 알고서 위로받기 위해서 물었으리라.
“그렇겠지. 아무 일도 없을 거야. 철규 이외
로 강한 놈이야. 그리고 너 들어 봤니? 귀신이
사람을 죽였다는 걸?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
났다고 하면, 신문에도 나고 그랬을 것 아니겠
어?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는 결코 귀신이나
유령이 사람을 죽이는 일이 일어날 수 없어.”
썩 내키지 않았지만 지영을 위해서 위로의
말을 했다. 하지만 나는 나의 말에 얼마나 많
은 거짓이 숨어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인간은 자기가 이해하고 싶은 대로 사건을
이해하려는 본성이 있다. 그러기에 귀신이나
유령의 존재는 한낱 미신으로 치부되고 있다.
하지만 얼마나 많은 불가사의한 일들이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가? 또한 그것은 얼마
나 왜곡된 채 세상에 알려지는가?
이 세상에 범인을 알 수 없는 죽음은 수없이
많다. 우리는 그런 죽음에 대해서 범인이 잡히
지 않았을 뿐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표현은
정말로 옳은 것일까? 부분적으로 옳은 면도
있으리라. 하지만 귀신이나 유령에 의해서 저
질러진 범행을 잡을 수 없다고 표현해야 하지
않을까?
나는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불가사의한
일들이 어떻게 왜곡되고 있는지 그 동안의 경
험이나 윤석의 이야기를 통해서 잘 알고 있었
다. 우리는 모두 장님이다. 자신이 믿고 있는
세계 밖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대해서는 철저
히 눈을 감고 사는.
버스는 밤 10시가 넘어서야 서울에 도착했
다. 나는 지영을 집 앞까지 바래다 주었다. 지
영은 초인종을 누르려다 말고 갑자기 몸을 부
르르 떨었다.
“오빠, 무서워요. 지금쯤 철규는 초소로 올라
가 있겠죠? 제발 아무 일도 없어야 할 텐데.”
“아무 일 없을 거야. 난 믿어, 내 예감을.”
“오빠, 난 오늘 밤 밤새도록 기도할 거야. 철
규를 지켜 달라고.오빠도 철규를 위해서 기도
해 줘.”
“알았어. 들어가 봐.”
난 금세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지영의
어깨를 다독거려 주곤 돌아섰다.
“오빠, 고마워요.”
등 뒤에서 지영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나는
돌아보지 않고 고개를 끄덕인 뒤에 걸음을 옮
겼다.
집으로 오자마자 나는 따뜻한 물에 샤워를
했다. 잠을 이루려 했지만 철규 생각 때문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나는 한참을 뒤척이다가
가까스로 잠이 들었다.
철규에게서는 며칠이 지나도 전화 한통 없
었다. 나는 매일 군부대 관련 소식이 신문에
실리지 않았나 꼼꼼히 살펴 보았지만 단 한 줄
도 찾아볼 수 없었다. 새삼 군대라는 곳은 국
방부에서 정식 발표가 있기 전까지는 언론도
통제되어 있는 특수한 지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생각다 못해 국방부 민원실에 전화
해 문의해 보았으나, 그런 문의는 접수할 수
없다며 전화를 매정하게 끊어 버렸다. 지영이
도 끊임없이 걱정하고 있었지만 대책이 없기
는 마찬가지였다.
나는 혹시나 해서 윤석이 속해 있는 심령학
학회에 전화해 보았으나 사무실이 빈 건지 아
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서 철규에 대한 걱정
도 잊혀져 갔다.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귀신이 있겠느냐면서 마음 편하게 생각을 하
기 시작했다.
면회 갔다 온 지 이 주일쯤 지났을 때, 그러
니까 철규에 대한 걱정이 잊혀질 갈 즈음이었
다. 잊고 있었던 그 일이 현실감으로 다가오기
시작한 것은 신문기사를 읽고 나서였다.
나는 눈을 뜨자마자 습관처럼 신문을 펼쳤
는데 신문 한 귀퉁이에 자그마한 군부대 관련
기사를 발견할 수 있었다. 바로 철규가 속해
있는부대였다.
놀라 다급히 기사를 읽어 나갔다. 비축 창고
에서 원인 모를 불이 나 거기에 있던 사병 3명
과 장교 한 명이 죽었다는 아주 짧은 기사였다.
구체적인 사망자 명단도 나와 있지 않았다.
나는 순간적으로 철규를 떠올렸다. 화제 발
생일은 그저께 밤으로 나와 있었다. 아무래도
철규가 말했던 그 불가사의한 일과 무슨 연관
이 있지 싶었다.
지영이에게 얘기해 줄까 고민하고 있는데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아침부터 누구의 전
화일까 궁금해하며 수화기를 들었다.
“일한이 형이에요? 저 철규예요.”
너무도 반가운 전화였다.
“야, 너 어디야?”
나의 목소리는 잔뜩 흥분해 있었다.
“지금 터미날이에요.”
“철규야, 아무 일 없는 거지? 그렇지 않아도
니네 부대 기사 보고 걱정하고 있었다.”
“형, 한번 봐야죠. 나올래요?”
“어? 물론 봐야지. 언제 어디서 볼까?”
철규의 목소리를 들으니 마치 생사를 알 수
없던 동생에게서 전화를 받은 것처럼 반가웠다.
“야, 너 거기 시계탑 밑에서 기다려야. 내가
금방 나갈 테니까.”
나는 대충 씻고서 터미널로 달려갔다. 아침
의 터미날은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철규는 시계탑 밑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한 손
에 등산배낭을 들고서.
“야, 철규야.”
손을 흔들며 부르자 철규가 돌아보았더. 걸
음을 옮기던 나는 깜짝 놀라 멈춰 섰다. 철규
는 얼마 전에 보았을 때보다 눈에 띄게 늙어
있었다. 도저히 갓 스물을 넘긴 젊은이로는 보
아 줄 수 없는 정도였다. 못 먹었어도 한 서른
은 되어 보였다.
“자식, 여전하구나.”
나는 속마음을 감추고 철규와 악수를 했다.
철규의 눈동자는 더없이 공허해 보였다.
“배 고프지? 밥 먹으러 가자!”
“형 아침은 됐어요. 버스 타고 올라오면서
휴계소에서 김밥하고 계란을 사 먹었더니 생
각이 없네요. 우리 어디 조용한 데 가서 이야
기나 하죠.”
“그래? 아직 커피숍은 문을 안 열었을 텐데.”
“그럼 한강 고수부지나 가요.”
“한강 고수부지?”
나는 철규의 얼굴을 힐끗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할 이야기가 있는 듯했다. 우
리는 택시를 잡아타고 한강 고수부지로 갔다.
한강에는 아침 운동을 하는 사람들 외에는 인
적이 뜸했다.
우리는 강 저편에 한남대교가 바라보이는
강변에 걸터앉았다. 담배를 꺼내 한 개비를 묵
묵히 피우고 난 철규가 손가락으로 담뱃불을
짓이겨 끄면서 입을 열었다. 담뱃가루가 강바
람에 날렸다.
“그 기사 난 신문 저도 봤어요. 원인 모를 화
재로 죽었다고 났더군요. 하긴 불이 나긴 났었
죠. 저도 그 자리에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그
때 죽은 사람들은 결코 불에 타 죽은 게 아니
에요. 참혹하게 죽음을 당했죠.”
철규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나는 한남대교
위로 지나가는 차량들을 바라보며 철규의 이
야기가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철규는 담배꽁
초를 완전히 분해해서, 허공에 날려 보낸 뒤에
조금은 지친 듯한 허스키한 목소리롤 이야기
를 시작했다.
그 전의 상황은 알고 있을 테니까 형이 면회
온 날부터 시작하지요. 형하고 지영이하고 면
회 온 날 밤, 저는 혼자서 초소로 올라갔어요.
교대 없이 혼자서 저 혼자 밤새도록 근무를
서야 했죠. 물론 국군 규정에는 이인이 일조가
되어 교대로 서게 되어 있었지만 위에서 시키
니 어쩔 수 없었어요.
내무반원이 저를 위로해 줬죠. 하지만 그들
의 어투는 마치 죽으러 가는 사람에게나 할 법
한 말들 뿐이었어요. 사형수에게 묻는 것처럼
‘마지막으로 할 말 없느냐?’는 식이었죠.
저는 그들의 동정을 뒤로 하고 초소로 올라
갔어요. 밤 여섯시부터 여덟시까지 서는 마지
막 근무조와 교대를 했어요. 혹시나 내가 안
오면 어떡하나 전전긍긍하고 있던 병사들은
나를 무척이나 반기더군요.
김 상병은 나에게 행운을 빈다면서 자신이
차고 있던 목걸이를 내 목에 걸어 주었죠. 그
리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려갔어요.
혼자 남자 겁이 나기 시작했어요. 사방은 몹
시 몹시 깜깜했어요. 사방을 아무리 둘러봐도
불빛 하나 찾아볼 수 없었죠.
저는 일단 초소 안으로 들어갔어요. 초소 안
은 바깥보다 더 으시시했어요. 며칠 전에 죽은
소대장의 핏자국이 여기저기 보였죠. 죽기 전
에 처절하게 몸부림을 친 것 같았어요.
저는 엉겨 붙은 핏자국을 보다가 초소 입구
쪽으로 나갔어요. 여차하면 튈 생각으로요.
겁도 나고 무료해서 노래를 하기 시작했어
요. 내가 알고 있는 노래들을 모조리 불러 보
았죠. 한 백여 곡이나 불렀을까? 그 사이에 두
시간이 흘렀는지 취침 나팔이 울렸죠. 비로소
열시가 된 거죠.
초소 주위는 누군가 접근했을 때만 불을 밝
히게 되어 있어요. 하지만 저는 무서움을 참을
수 없어 아예 전등을 켜 놨어요.
그랬더니 다소 마음이 놓이더군요. 불 밖에
서 누군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을지도 모른
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둠 속에 있는 것보다
는 한결 나았어요.
나는 다시 노래를 불렀어요. 불렀던 노래를
다시 부르기도 하고 유년시절에 교회에서 배
운 찬송가도 기억을 더듬으면서 불러 봤죠. 목
이 잠기도록 쉬지 않고 노래를 불렀지만 시간
은 더디게 가기만 하는 거였어요.
얼마나 지났나 시계를 보면 십 분이 흘렀거
나 오륙 분이 지나가 있곤 했어요. 저는 더 이
상 노래도 생각나지 않고 해서 이 주 동안 휴
가를 받으면 무얼할까 궁리하기 시작했어요.
하지만 무섬증 때문에 정신 집중을 할 수 없었
어요.
형도 아시다시피 저는 원래 내성적이잖아
요. 그래서 혼자 있는 것에 남들보다 익숙해
요.. 그런데 그때처럼 뼈저리게 혼자 있다는
느낌이 든 적은 없었어요. 마치 우주 공간에
결박된 채로 떠서 창이 날아와 내 몸에 꽂히기
만을 기다리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어요.
공포에 질리면 누구나 민감하게 되죠. 저도
그때 극도로 민감해 있었어요. 먼 데서 솔방울
이 떨어지는 소리, 산새들이 풀숲을 헤치고 후
두둑 날아가는 소리에도 깜짝깜짝 놀라곤 했죠.
하지만 저는 한시도 긴장을 풀 수 없었어요.
초소 벽에 등을 기대고 전방을 뚫어지게 보고
있으니 희끄므레한 환영이 자주 보였죠. 어둠
속을 쳐다보면 뭔가 숨어서 움직이는 것 같기
도 하고.한마디로 미칠 지경이었죠.
저는 가급적 즐거웠던 추억만을 떠올리려고
안간힘을 썼죠. 하지만 놀랍게도 즐거운 추억
은 많지 않대요. 도리어 괴로웠던 날들이 많았
어요. 정신 집중을 할 수 없어 무작정 떠오르
는 대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었죠.
이제 한 서너 시쯤 됐겠다 싶어 시계를 보았
더니 겨우 한시더라고요. 동이 틀려면 아직 5
시간이 넘게 남았다고 생각하니 암담한 거예
요. 나중에는 이왕 나올 귀신이면 빨리 나타났
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었어요.
두려움에 점점 지쳐 두려움 자체를 잊어 갔
죠. 너무 신경을 쓰고 있었더니 머리도 아프고
눈도 아파 왔어요. 아무 생각하니 멍하니 앞을
주시하고 있었죠. 낮에 마신 술도 있고 해서
조는 것처럼 몽롱한 상태에 빠졌어요.
그런데 갑자기‘지지직’하더니 초소 주변을
밝히는 전등이 나가는 것이었어요. 갑자기 주
변이 어두워지니까 겁이 덜컥 나더라고요. 본
능적으로 총을 꽉 쥐었죠.
어둠이 눈에 익숙해지기를 기다렸어요. 그
몇 초간의 시간 동안에 죽음이 밀물처럼 서서
히 밀려오고 있는 걸 느꼈죠. 저는 눈을 빠르
게 깜빡거리면서 어둠에 익숙해지기 위해서
안간힘을 썼어요.
이윽고 주위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다행히 귀신은 보이지 않았어요. 하지만 너무
무서워 몸이 저절로 덜덜 떨리는 거였어요. 나
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상황실과 연결되어
있는 긴급 전화기를 들었어요.
전등이 나갔다는 것을 보고라도 할 생각으
로 아니, 솔직히 이야기하면 너무 무서워서
살아있는 사람의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서.그
런데 전화기를 들었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거예요. 완전 불통이었어요.
전화기를 내려놓고 무심코 고개를 돌렸는데
그 순간, 심장이 얼어붙는 것을 느꼈어요. 바
로 초소 앞에 그 하얀 옷을 입은 귀신이 서 있
는 거예요. 제가 서 있는 거리와는 너무도 가
까웠어요.
저는 다리가 후들거려서 지난번처럼 튈 수
도 없다는 것을 느꼈어요. 조금도 손가락 하
나도 움직일 수 없었어요. 전신이 완전히 마비
된 듯했어요. 공포심만 제외하고요.
등줄기에서 기분 나쁜 식은 땀이 주루룩 흘
러내렸죠. 너무도 놀라서 눈조차 감을 수도 없
었어요.
대치 상태가 한참 동안 이어졌어요. 저는 간
신히 정신을 추스릴 수 있었어요. 일단 총을
집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런데 총은 내
가 전화를 하느라고 한쪽 구석에 세워 놓았기
때문에 총을 잡으려고 하면 걸음을 옮겨야만
했죠.
그런데 내가 움직이게 되면 이 미묘한 적막
함에 큰 균열을 생겨서 뭔 일이 벌어지고 말
것만 같았어요. 나도 다시 그녀를 유심히 봤어
요. 초소 입구를 막고 있는 그녀를.
구름에 가려 있던 달이 나와서, 저는 귀신의
모습을 좀더 자세히 볼 수 있었어요. 제가 지
금까지 흰 소복이라고 보았던 그 옷은 소복이
아니라 하얀 정장이었어요. 머리는 산발이었
고, 눈동자에서는 소름 끼치는 빛이 뿜어져 나
왔죠.
여자의 모습 중에서도 눈이 가장 무서웠어
요. 그녀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나를 뚫어지
게 쳐다보고 있었죠. 저는 무서워서 그녀의 눈
을 보고 싶지 않았지만 자꾸만 그녀의 눈으로
시선이 갔다.
홀린다는 말 알죠? 그녀의 눈은 모든 걸 빨
아들일 것만 같았어요. 저는 제 영혼이 빨려
들어가는 것을 느꼈죠. 정신이 점점 희미해지
고 그녀의 모습이 가까이 다가왔다 멀어져 가
고 했어요.
순간, 목이 180도로 돌아간 채 죽은 소대장
이 생각났어요. 나도 이젠 죽는구나 하는 생각
이 들더군요. 나는 그녀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
는 파란 빛이 초소 안을 환히 비추는 걸 느꼈
어요. 그리곤 정신을 잃었죠.
제가 다시 눈을 떠 보니 어느 숲속이었어요.
날이 희미하게 밝아오고 있었어요. 일어나 보
니 군복이며 머리가 온통 새벽 이슬로 축축히
젖어 있더군요.
그녀가 초소 입구를 막고 서 있던 기억까지
는 생생한데, 그 뒤로는 전혀 기억이 안 나는
거였어요. 사방을 유심히 살펴 보았죠. 낯익은
철조망 커다란 느티나무가 보고서야 탄약고
뒤편의 숲 속이라는 걸 알았죠.
내가 왜 여기에 있지 하고 한참을 생각했지
만 더 이상 기억나지 않았어요. 동 터 오는 하
늘을 멍하니 올려다보는데 문득, 내가 살아 있
구나 하는 기쁨이 차올랐죠.
아, 이젠 휴가를 가는구나.이 지겨운 악몽에
서 벗어나서.내가 이 주 간의 휴가를 마치고
돌아오면 어떤 식으로든 해결이 나겠지!
나는 날아갈 것 같은 상쾌한 기분을 느꼈어
요. 하지만 즐거움도 잠시였어요. 어디서 고약
하고 이상한 냄새가 났어요. 나는 코를 벌름거
리다가 내가 누워 있던 자리 옆의 풀섶을 헤쳐
보았어요.
놀랍게도 시체가 누워 있었어요. 저는 그때
본 참혹한 모습을 잊을 수가 없어요. 흰옷을
입은 먼지를 잔뜩 뒤집어써서 누런 색으로
보였지만 흰옷을 입은 여자가 죽어 있는 거였
어요.
얼마나 오래 된 시체인지는 알 수 없지만 무
섭도록 부폐해 있었죠. 눈이나 콧구멍에서 구
데기가 쿰틀거리는 게 보였죠. 끔찍한 모습에
일단 시선을 돌렸다가 시체가 약간 부자연스
럽다는 느낌이 들어 자세히 살펴 봤죠.
등 위에 얼굴이 돌려져더군요. 그러니까 죽
은 엄 중위처럼 머리가 180도 돌려져 있는 거
였어요. 혀를 깨물고 있었는데 부폐하기 시작
한 얼굴 위로 수많은 구데기들이 기어다녔죠.
먹은 것도 없었지만 구역질이 나오더군요.
나는 돌아서서 몇 차례 구토를 했어요. 이 여
인이 바로 그 귀신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한참 토하고 있는데 나를 부르는 소리가 탄
약고 쪽에서 들려 왔어요. 저는 다급하게 그들
을 불렀죠. 달려 온 교대조는 시체를 보자마자
구역질을 하더군요.
한 명이 초소로 달려가 곧바로 상황실로 전
화를 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연대장을 비롯
한 고위급 장교들이 달려왔어요. 그런데, 그
시체를 보던 연대장하고 일부 장교들의 얼굴
이 흙빛이 되는 거였어요. 저는 그들이 잘 아
는 사람이 아닐까 하고 추측했죠.
연대장이 나에게 어젯밤 상황을 묻더군요.
나는 숨김없이 모든 사실을 보고 했더니, 수고
했다며 별도 지시가 있을 때까지 내려가 쉬라
는 거였어요.
일단 귀신 소동은 일단락 지어진 것 같았어요.
찜찜한 것은 여전히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누가 그 여자를 죽였으며, 그 여자는 누구이
며, 왜 소대장처럼 목이 돌려져 죽어 있나, 그
리고 장교들은 그 여자를 어떻게 알고 있느냐
하는 등등의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
났죠.
마침 소대장의 죽음을 수사하러 왔던 특검
단이 그 여자의 시체를 수거해 가 조사를 시작
했어요. 결과가 어떻게 나올까 궁금해하고 있
는데 하루는 내무반장이 들어와서, 그 여자는
북한 공비가 살해한 민간인으로 판명됐다고
하더군요.
웬지 그 여자의 죽음을 흐지부지하려 든다
는 느낌이 들었어요. 저는 속으로 무슨 말 못
할 사연이 있는가 보다고 짐작했죠. 장교들은
쉬쉬했지만 사병들 사이에는 별 루머가 다 돌
았어요.
그 죽은 여자는 연대장의 정부였다는 둥, 죽
은 엄 중위와 그 여자가 치정 관계에 얽혀 있
었다는 둥, 수십 가지 루머가 돌았죠.
하지만 저는 엄 중위를 검시했던 군의관이
한 말이 자꾸만 마음속에 걸렸어요. 사람의 목
을 180도 돌려 놓는다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
는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그녀의 시체가 발견된 지 사흘이 지났어요.
부대는 여전히 어수선했지만 그런 대로 정상
적인 모습을 찾아가고 있었죠.
그 초소는 두 사람이나 죽은 곳이라 아직도
올라가기를 꺼려했어요. 하지만 군대라는 것
이 하고 싶은 대로만 할 수 있나요. 시체도 발
견되고 했으니 걱정할 것 없다면서 신병들 위
주로 경계 근무를 세웠죠. 고참들은 일종의 담
력을 쌓는 훈련을 하는 셈치고 근무를 서라고
신병들에게 주입시켰어요.
사병들 간에는 사라졌던 군기가 다시 서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장교들은 사병들과 달리
몹시 불안해 보였어요. 점호 시간에 실수하기
도 예사였으며, 꼭 어디를 다녀도 둘이나 셋씩
몰려다녔죠.
저는 한동안 훈련에서 열외된 채 내무반 청
소를 하면서 저에게 떨어질 2주간의 포상 휴
가만 기다렸죠. 그런데 이상하죠? 풀리지 않
은 의문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거예요.
귀신을 직접 두번이나 목격했다는 게 인연
으로 작용한 걸까요? 저는 그녀의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었죠. 그러던 중 화장실에서 우연
히 훈련소 동기를 만났어요. 그 자식은 빽이
좋아 연대장 당번병으로 빠진 놈이었는데, 그
놈이라면 뭔가 알고 있을 것 같더라고요. 그래
서 제가 물어봤죠.
처음엔 모른다고 잡아떼면서 귀신이 어떻게
생겼느냐고 도리어 나에게 묻더군요. 나는 그
친구가 궁금해하는 것을 모조리 풀어 주고는
그녀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게 있으면 이야기해
달라고 간절히 부탁했죠.
한동안 망설이더니 그 친구는 마침내 나에
게 모조리 털어놓더군요. 당번실에 있다가, 장
교들과 연대장이 하는 이야기를 엿들었다면
서.
놀랍게도 시체로 발견된 그 여자는 죽음 엄
중위와 남매라는 거예요. 그래서 장교들이 알
고 있는 거래요. 그리고 그 여자의 할아버지는
이 부대의 초대 연대장이었는데 별 세 개를 달
고 전역했다고 하더군요. 그는 퇴역 군인이지
만 아직도 힘이 막강하대요.
일설에 의하면 이 부대의 인사권을 좌우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입김을 지니고 있대요.
그는 지금은 80이 넘었는데 정정하대요. 아직
도 명절 때가 되면 국회의원들이 찾아가 세배
를 드린다고 하더군요.
그런 거물의 손자와 손녀가 부대 안에서 의
문의 죽음을 당했으니 참 별일이죠. 특히 그
손녀는 서울에 있는 친척집에 놀러가기 전에
남동생에게 면회왔다가 사라졌는데, 뒤늦게
발견된 거래요. 집에서는 그래서 서울에 올라
간 것으로 알고 있었다는 거예요.
그 친구도 한 가지 이해가 안 되는 점은 바
로 퇴역 장군의 태도래요. 귀여운 손자와 손녀
가 둘씩이나 죽었는데도 수사를 대충 마무리
지으라고 했다는 거예요.
당번병을 통해서 그녀가 누군지는 알았지만
여전히 궁금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어요.
그러던 차에 3중대 수색조가 수색 훈련을 하
던 도중에 수상한 사람을 잡았다는 소문이 들
려 왔어요. 그 사람이 살인 사건의 범인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도 파다하게 퍼져 갔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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