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이야기는 어린 시절, 마을 사람들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각색한 것이다.
때는 1963년, 박정웅이라는 사내가 철거 일을 시작했다.
처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뭐라도 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건물하나를 철거하게 되었다.
정웅은 쓸 만한 물건을 가져가기 위해 어김없이 일찍 도착했다.
사실, 작업반장이나 경력이 있는 인부들이 말하길,
“아무리 좋은 물건이라도 가져가면 안 뒤야, 괜히 재수가 옴 붙을 수도 있거든.
그래서 무조건 철거를 할 때 나오는 물건들은 소각을 하지...
자네도 조심하게. 좋다고 함부로 물건을 가져가면 안 되네.”
그러나 정웅은 듣지 않았다.
특히 오늘 같이 거대한 저택의 철거는 노다지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크고 화려한 집은 처음이었다.
집의 형태는 왜색이 짙었지만 방이 수십 개나 있었다.
어떤 방에는 일본 전통 옷들이 바닥에 아무렇게 널려있었고,
어떤 방에는 화장품 분통으로 보이는 것들과 과자 상자들이 뒹굴었다.
“6.25가 끝난 지가 언제인데 일본놈들이들이... 이상하구만?
겁을 상실한 일본놈들일세...”
정웅은 먼저 옷을 주섬주섬 챙겼다.
그 집에는 일본 민속풍의 그림이 곳곳에 걸려있었는데
무섭고 괴상하게 생긴 장면에 호기심이 생겨 유심히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흔히 말하는 ‘사무라이’같은 사내들이 무서운 표정을 지으며
칼을 휘두르거나, 적을 토막 낸 그림들이 다수였다.
정웅은 복도마다 걸려있는 그림을 우연히 따라,
마지막 방이 있는 곳으로 가게 되었다.
그 방은 좀 특이한 기운이 느껴졌다.
보통 방들은 여닫이 문이었는데, 그 방만큼은 서양식 문이었다.
이상하게 생각한 정웅은 손잡이를 돌렸지만 잠겨있었다.
“옳거니, 이곳에 분명 값 비싼 물건이 있어. 어차피 철거할 거...
그냥 문을 부셔 버리자.”
정웅은 손잡이를 부수고 문을 열었다.
그리고 잠겼던 비밀의 방을 열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온통 새빨간 벽지로 가득 찬 방안에는 오로지 제사를 지내는
제단만이 그곳을 지키고 있었다.
제단의 중앙에는 일본 전국시대에서나 볼법한 투구와 갑옷이 있었고
앞에는 엄청난 크기의 검이 놓여 있었다. 정웅은 조심스럽게 검을 뽑았다.
그러자 검은 ‘웅웅’거리는 소리를 내며 날카로운 날을 들어냈다.
오랫동안 사람이 없는 집에 있는 물건답지 않게 투구와 갑옷, 그리고 검이
매일 누군가가 손질 한 것처럼 깨끗했고 새것 같았다.
“굉장하구먼? 척 봐도 값비싸 보이는군. 허허허...
작업반장과 인부들이 오기 전에 냉큼 집으로 들고 가야겠다.
이걸 판다면 어마어마한 돈이 되겠어...”
서둘러 그곳에서 얻은 물건들을 가지고 집으로 왔다.
놀란 아내가 어찌 된 영문이냐며 물었지만, 정웅은 몸이 좋지 않다며 핑계를 댔다.
“이보게, 자네 말이야... 절대 방에 들어오지 마소.
나가 좀 몸도 안 좋고 머리 아픈 일이 있으니까,
누가 찾아오면 나 아프다고 하고... .”
정웅은 방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보자기를 풀었다.
그리고 조심스레 투구와 갑옷을 꺼냈다.
일본인의 옷을 입어도 보고, 검을 뽑아들어 그림 속 사무라이의 흉내를 내어보았다.
기분이 묘했지만 재미있었다.
바로 그때, 밖에서 누군가가 찾아왔다. 작업반장이었다.
“이보게 정웅이, 나 최반장일세... 어디 아프다고 들었네, 괜찮은가?”
정웅은 깜짝 놀랐다. 그 집에서 들고 온 물건들을 재빨리 다락에 넣었다.
그리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최대한 아픈 척을 하며 방문을 열었다.
“네, 반장님... 이거 죄송합니다.
아침 일찍 갔다가 몸이 안 좋아서 다시 왔습니다.”
반장은 정말 걱정이 되는 표정으로 정웅을 바라봤다.
다행히 그 집에서 물건을 가져왔는지 눈치를 채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보게, 오늘 철거작업을 하지 않았네.
오늘 작업자들이 자네처럼 아픈 사람이 많아서 말이지.
좀 이상한 일이지만 말이야, 그래서 하루 쉬고 내일부터 일을 시작할까 하네.
내일은 괜찮겠는가?”
정웅은 당연하다며 대답했다.
“하룻밤 푹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 질 것입니다.
그런데 뭐하나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작업반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철거할 집말입니다. 아침에 살펴보니 일본인들이 살았던 집 같은데요.
일본인들은 전쟁이 끝나고 자기 나라로 가지 않았나요?”
작업반장은 담배를 한 대 물며 불을 붙였다.
“아.. 그 집? 그거 일본 놈들 집이 아니야.
그러니까..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친일파의 집이라고 해야 하나?
과거 일제강점기에 일본 놈들에게 충성을 맹세한 김주용의 집인데 말이야.
광복을 했는데도 용케 살아남아 그 집에서 살았지.
그리고 전쟁이 끝났는데도 꽤 오랫동안 그곳에 살았어.”
정웅은 김주용이란 인물에 대해서 매우 궁금했다.
“김주용이란 사람, 힘이 좀 있었나보네요? 연줄이 세나?”
작업반장은 깊은 한 숨을 쉬었다.
“자네는 뭐가 그렇게 신이 나서 물어보나?
이게 다 친일파들을 모두 척결하지 못해서 문제인 거야.
자네가 몰라서 그래, 김주용이란 인간... 아주 미친인간이야.
아주 왜놈귀신이 들린 놈이지. 광복을 하고도 일본을 잊지 못해서
집에서는 일본 옷을 입고, 일본 말을 한다더군... ”
김주용은 본래 조그마한 사업을 했다.
일본이 강제로 나라를 빼앗자, 누가 뭐라 하기도 전에 먼저 머리를 조아렸다.
전쟁에 필요한 물품도 바치고, 무기에 필요한 돈도 바쳤다.
그것도 부족해서 같은 민족을 팔아,
젊은이들을 징병시켜야 한다며 동네방네 떠들어댔다.
결국 일본에게 인정을 받아, 더욱 많은 부와 권력을 쌓았다.
그리고 광복이 되자,
당시 함께 친일을 했던 사람들이 그대로 권력을 잡기 시작하면서
운이 좋게 살아남았다. 아니, 살아남은 정도가 아니었다.
갈수록 김주용의 재산은 쌓여만 갔고, 나날이 집안이 번창했다.
“그런데 김주용은 어디가고... 그 집을 철거를 하는 것입니까?”
작업반장은 누군가 들을까봐,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정웅의 귀에 밀담을 나누듯 속삭였다.
“그 새끼? 사라졌어. 마누라, 아이, 종놈들 할 것 없이...
어느 날 모두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어. 이상하지?”
한간에는 그 동안 악행으로 마을 사람 중 누군가가 일가족을 죽이고
뒷산에 파묻어 버렸다는 소문도 있고, 김주용이 일본을 병적으로 좋아해서
일가족 모두를 데리고 일본으로 떠났다는 말도 있다.
그렇게 약 7년 정도 집이 비워져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관청에서 친일파 김주용의 집을 철거하고
그곳에 관공서와 건물을 짓는다는 것이었다.
“아무튼 내일 보세. 나는 또 몇 사람한테 전달해야 하니까...”
정웅은 작업반장이 시야에서 떠나길 기다렸다가 방에 들어왔다.
그리고 다락방에서 다시 일본 전통 옷과 투구, 검을 꺼냈다.
이상했다. 자신도 모르게 심장이 심하게 뛰었다.
정웅의 아내는 남편이 그러고 있는 줄도 모르고,
식사를 챙기기 위해 문고리를 잡았다. 그런데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방 안에서 일본말이 들리는 것이었다.
“와따시와 무시다. 무시토시테 켄토히토츠니나루...”
아내는 혹시 자신이 부엌에 있는 사이에 누군가가 왔나 싶어서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그리고 방안의 광경을 보고 놀라 나자빠졌다.
방 안에는 남편 정웅이 일본 전통 옷을 갖추어 입고,
화장을 했는지 새하얀 얼굴을 잔득 찡그리며 긴 칼을 들고 있었다.
“다레나노까?”
아내는 자신이 잘 못 본 것이 아닌지, 눈을 씻고 다시 보았다.
남편 정웅이 평소처럼 앉아 있었다.
“자네, 왜 그러는가? 귀신이라도 본 것이야?”
아내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일어났다.
“아니에요. 식사하시라고요...”
그런데 아내는 다시 한 번 놀랐다.
방 안에는 일본 투구와 갑옷이 사람 형상처럼 벽 한 가운데에 놓여 있었고
그 앞은 긴 칼이 반듯하게 전시되어 있었다.
그리고 양쪽에는 촛불이 켜져 있어 마치 제사를 지내는 것 같았다.
“여보... 이게 뭐에요?”
정웅은 빙긋이 웃으며 그에 대한 답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의 아내에게 함께 일본 무사에게 기도를 하자며 손짓했다.
아내는 이해 할 수가 없었다.
“여보, 이게 뭐하는 거예요? 미신도 싫어하는 양반이...”
아내가 정웅이 가져온 갑옷과 검을 치우려고 했다.
그러자 정웅은 화를 불같이 내며, 냅다 아내의 뺨을 힘껏 내리쳤다.
“톳보이온나!!!”
한 번도 손찌검을 해본 적 없는 남편이었는데, 아내는 비참했다.
부끄럽고 겁이 나서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고 벌벌 떨며 엎드려 있었다.
“이 천한 년아, 여기 있는 물건들 손 끝 하나라도 건드려봐?!
아주 손모가지부터 온 몸을 토막 내 버릴 테니까..
애새끼들한테도 전해...”
정웅은 매우 신경질적이면서 날카롭게 쏘아대고 어디론가 나가버렸다.
끝나지 않은 지배 2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