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이야기는 1970년대 충청남도 청양에서 일어난 실제 이야기를 각색한 것입니다.
2월이 지났는데도 동장군의 기승은 멈출 줄을 몰랐다.
따뜻한 남쪽 지방이라 이사를 왔건만, 창틀 위의 고드름은 날카롭게 돋아있다.
이렇게 추운 겨울이면 항상 옛 생각에 사로잡히곤 한다.
벌써 40년이 훌쩍 넘은 이야기... 매년 겨울이 되면 한파주의보 보다
어릴 적 추억 속에 숨어있는 무서움 때문에 온 몸이 떨려온다.
특히 눈이라도 내릴 때면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가슴에 통증이 심해진다.
눈... 누군가에게는 희망의 상징이며 설렘의 시작이겠지만 희경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어릴 적에... 백발의 살인귀라고 불리는 설녀를 봤어.
하얀 눈 속에 모습을 감췄다가 아이 하나가 지나가면
슬며시 모습을 드러내어 아이 옆에 함께 걷지.
어느 덧 아이는 누군가가 자신의 옆에 있는 것을 알게 되어
옆을 바라볼 때면, 설녀가 빙긋이 웃으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지.
그러나 이내 무서운 표정을 지으며 날카로운 손톱과 이빨을 사납게 세워
아이를...”
때는 1970대 초, 소덕말에도 어김없이 겨울이 찾아왔다.
날씨가 한동안 꾸물거리더니 이내 하늘에서 눈송이가 내렸다.
처음에는 천천히 내리던 눈송이가 이내 함박눈이 되어 빠르게 내렸다.
논밭 할 것 없이 마당이며 지붕이며 순식간에 눈이 쌓였다.
다른 지역의 아이들이라면 신이 나서 눈싸움도 하고 썰매도 타고 할 것인데
최근 마을에 흉흉한 사건이 생기면서 모두들 집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니들도 알고 있지? 방앗간 창식이 말이여.
나쁜 놈의 들짐승 새끼들, 어떻게 애를 그렇게 만든데?
요즘 세상에도 들짐승새끼들이 이렇게 활개를 치니,
이 참에 마을 곳곳에 덫을 놔야 하나, 엽총을 구해야 하나...”
희경네 아버지는 세 남매에게 외출을 삼가하며 당부를 했다.
이렇게 극성인 이유는 방앗간 주인의 막내아들 창식이가 사방이 눈으로 뒤덮인 날,
싸늘한 주검이 돼서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아침댓바람부터 땔감을 주우러 나간 영택은 여우로 보이는 짐승들이
논 한복판에서 무리지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먹을 것이 하나 없는 눈만 쌓인 논에
들짐승이 모여 있는 것을 희한하게 여긴 나머지,
심심하던 찰나에 짱돌을 던져보았다.
들짐승들은 날아오는 돌에 놀라며 요란한 울음소리를 내며 도망갔다.
그것이 재미있어 한참을 깔깔대며 웃고 있는데,
여우가 도망친 자리에 사람의 모습을 한 무언가가 쓰러져있었다.
처음에는 허수아비라고 생각해서 대수롭지 않게 다가갔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갈수록 붉은색이 선명하게 보였다.
이윽고 그곳에 당도했을 때, 경악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차.. 차... 창식아... 차.. 창식...
큰일났슈, 큰일이에유.. 아저씨, 아저씨... 빨리 여기 좀 와봐유...”
복부에는 짐승에게 뜯어 먹혔는지 뱃속의 내용물들이 사정없이 쏟아져 나왔고
칼바람이 부는 추위 속에서 죽어갔던 터라,
동사에 걸린 듯 온 몸이 멍이 난 것처럼 새파랬다.
경찰이며, 의사며 할 것 없이 들짐승으로 인한 사고사(事故死)라고 소견했다.
소식을 들은 방앗간 집 사람들은 통곡하기 시작했다.
딸만 셋이었다가 어렵게 얻은 막내아들이었는데 사고를 당한 것이었다.
그런데 동네에서 잡학다식하기로 유명한 상구네 아버지가
창식의 시신을 빤히 바라보며 이상한 듯 고개를 갸우뚱댔다.
“강순경, 근데 말이여?
나가 어릴 적에 동네에서 늑대한테 물려 죽은 친구가 하나 있었는디...
이렇게 배가 깨끗하게 열리지 않았어.
들짐승은 말이여, 사정없이 물어뜯기 때문에 물린 부위가 아주 엉망이 되는 겨.
그리고 창식이 배는 말이여 자세히 보면 날카로운 걸로 찌른 자국이 있잖여?
칼이나 뾰족한 걸로 찔린 뒤 배를 열은 것 같단 말이지.”
하지만 정확한 증거가 없는 이상, 상구네 아버지의 말을 신뢰할 수 없었다.
경찰에서 내린 사인은 짐승에게 봉변을 당한 사고사(事故死), 확고했다.
창식이는 종대네 집에서 놀다가 잠이 든 뒤,
이른 아침에 일어나 자신의 집으로 가는 길에 변을 당한 것이었다.
종대네 집에서 자고 가는 일이 빈번했기에 그러려니 했건만,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다는 사실에 가족들은 억장이 무너졌다.
며칠 뒤, 그렇게 마무리되던 창식의 죽음에 목격자가 나타났다.
아침에 소변이 마려워서 뒷간에 물을 주러 온 같은 반 친구인 영규가
개천 건너로 창식이가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아니, 정확하게는 창식이가 영규를 먼저 발견해서 불렀다고 했다.
눈이 나쁜 영규는 목소리를 알아듣고 창식에게 손을 흔들었다.
창식이와 인사를 하고 소변을 누며 친구가 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는데...
하얀 소복을 입은 여자도 창식이 뒤에서 걷고 있다는 걸 발견했다.
눈(目)이 잘 안보여서 모르겠지만,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하얀 여자였다고 했다.
이른 아침에 눈(雪)이 많이 와서 그것이 사람이란 것을 몰랐다.
나무들이 많은 곳에 창식이가 걸어가자,
뒤에 여자가 쫓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말을 들었던 마을 사람들 몇몇이 사색이 되었다.
종대엄마는 벌벌 떨면서 주저앉았고, 희경이네 할머니는 겁에 질렸다.
“서... 설녀.. 설... 설녀인 것이여...
어린 아이들을 홀려서 간을 빼먹는다는 설녀말이여...”
온 동네에 설녀(雪女)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퍼졌다.
경찰은 목격자가 말한 것이 설녀인지 무엇인지 알 수 없었지만
진술이 허술하다는 점에서 신뢰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동네사람들은 믿었다.
광복을 하던 해에 홀로 아이를 키우던 설씨(薛氏)성을 가진 여자가 있었다.
그녀의 아이가 썰매를 타다가 그만 얼음이 깨져서 개천 빠져버렸다.
많은 사람들에게 아이를 살려달라고 소리쳤지만 누구하나 구해주는 이가 없었다.
결국 자신이 아이를 구하기 위해 빙판이 깨진 자리에 몸을 던졌다.
하지만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엄동설한의 물속에서 그녀는 나오지 않았다.
마을에서는 난리가 났지만 당장 물속을 볼 수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봄이 올 때까지를 기다렸고,
얼음이 녹으면서 모자(母子)의 시체를 찾기 위해 개천 전체를 뒤졌다.
이상하게도 아이의 시체는 물에 떠올랐지만 설씨의 시체는 나오지 않았다.
긴 작대기로 물속을 휘익 저어보기도 했고 사람을 불러서 물 안 속을 살펴봤다.
소용없는 일이었다. 결국 그녀의 시체를 찾지 못하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경으로 무당을 불렀다.
“천지신명이시여, 불쌍한 여인네를 찾습니다.
아이의 혼령이 어미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
무당은 방울을 세차게 흔들다가 뭔가가 느껴졌는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다른 영혼과 접신을 하려는 듯 괴이한 표정으로 얼굴이 일그러지다가
이성을 잃은 듯 눈을 뒤집었다. 잠시 후 가늘고 높은 음성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그날... 그날 말이여. 그렇게 도와달라고 애원을 했는데,
왜 안 도와 준 거여. 불쌍한 내 새끼, 엄동설한 차가운 물속에서
얼마나 춥고 무서웠을까? 으흐흐흐 나쁜 사람들...
내 새끼도 중요하면 남의 새끼도 중요한 것이여.
당신들 여러 명이 도와줬더라면 충분히 구할 수도 있었잖여... 으흐흐흐...
참말로 그러는 거 아니여.. 이 사람들아!
내 언젠가는 복수를 할 것이여, 오늘같이 눈 오는 날을 조심혀... 눈 오는 날을!!!
겨울마다 나타나서 복수 할 것이니까..”
무당은 눈을 부릅뜨면서 마치 들짐승이라도 된 것처럼
이빨과 손톱을 사납게 드러냈다. 그리고 주위에 있던 사람들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동네사람들은 설씨의 원혼이라 생각하여 혼비백산 도망가기 바빴다.
무당은 꽤 오랜 시간을 요상한 울음소리와 웃음소리를 반복하며
미친 여자처럼 동네를 날뛰었다. 그 광기(狂氣)가 얼마나 살벌했는지,
무당의 눈에서는 피눈물이 흘렀고 머리카락은 새하얗게 세어 있었다.
결국 설씨의 원혼을 주체 할 수 없었던 무당은 피를 토하고
동네 한 복판에서 숨을 거뒀다. 무당의 모습은 처참했다.
새하얀 머리, 새하얀 얼굴, 새하얀 소복에 얼굴은 피와 눈물이 뒤섞였다.
손톱은 모두 부서져서 간을 빼먹은 구미호처럼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무엇보다 무당의 몸이 물에 빠진 사람처럼 젖어 있었는데 사람들은 영락없이
설씨처럼 죽었다며 시체에 절을 올리고 살려달라고 빌었다.
이후 매년 제사를 지냈지만 눈이 오는 겨울이 되면 멀쩡한 아이들이
객사하는 사고가 이어졌다.
하나같이 아이들의 복부에는 날카로운 것에 뜯긴 자국이 있었는데,
무당이 죽기 전에 남긴 행동과 일치해서 그런지 설씨의 짓이 틀림없다고 믿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서 그녀의 성씨인 설(薛)과
눈 내리는 날에 나타난다는 뜻의 눈 설(雪)자가 붙여져 ‘설녀’라고 불려졌다.
“그러니께 말이여, 창식이도 설녀가 죽인 것이여...
너희 아버지도 니들처럼 쬐끄만할 때,
동네에서 눈 오는 겨울만 되면 설녀 때문에 잠을 설쳤어야.”
할머니의 설녀 이야기에 희경과 오빠들은 겁을 먹고 이불 속에서 웅크렸다.
“나참, 엄니는 말이유 마을에서 얘가 죽었는디... 설녀라니유...
경찰이랑 의사도 들짐승이 물어 죽였다는데, 그런 소리 말어유.
설녀는 무슨 설녀에유, 요즘 세상에...
이 들짐승 놈의 새끼들 아주 씨를 말려야 혀.
아무튼 너네들도 눈 오는 날 돌아댕기지 말고 집에서 공부나 혀어.”
희경은 친구 창식이의 죽음이 믿어지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담벼락에서 부르면 금방 튀어나와 밤을 구워먹으러 갈 것 같았다.
하지만 장례식장을 생각하니 뜨거운 눈물이 연이어 나왔다.
많은 사람들이 창식이의 장례식장에서 대성통곡을 하며 울었다.
자식이나 손주, 형제, 친구가 있는 사람이라면
그 상황에서 눈물이 나는 것이 당연했다.
그런데 문득 그날의 기억에서 어디선가 세어 들어오는 웃음소리를 들었다.
“으흐흐흐... 으흐흐흐...”
짧았지만 귀에 거슬려서 잠깐 울음을 멈췄던 날이 생각났다.
“진짜, 할머니 말 대로 설녀가 창식이를 해친 걸 까...?”
창식이가 보고 싶은 마음에 천장을 보며 희경이는 이런저런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 보면 창식이는 다른 아이와 다르게 공부를 잘했고 운동도 잘했다.
집도 부유해서 옷도 세련되게 입었고 외모가 시골아이 답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난 척 같은 거 하지 않고 아이들과 곧잘 지냈다.
나이답지 않게 어른스러워서 또래끼리 놀 때에는 대장인 셈이었다.
“짠~ 니들 이거 하나씩 받어.
쩌기 공주에서 말이여, 우리 또래 얘 하나가 실종 됐데...
근데 말이여, 내 생각에는 실종이 아니라 유괴 같다고 봐.
걔가 사라지기 전날, 외지인 두 명이 마을에 들었다고 하더라고...
마을 지리를 손바닥 보듯이 하는 얘가 갑자기 사라진다고?
분명 그 두 놈이 납치해 간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혀.
그래서 내가 준비 해왔지, 호루라기... 삼촌보고 갖고 싶다니까 한 통을 사주더라.
니들도 위험한 일이 생기면 냅다 불어서 위험하다는 것을 알리는 겨.
어허 종대야, 밤에 불면 뱀 나오자녀... 하하하.”
불가 며칠 전 생각에 희경은 웃음을 지었다.
창식이가 준 호루라기를 목 밑에서 꺼내어 만지작거렸다.
“호루라기?!?!”
희경은 생각했다. 창식이가 들짐승을 만났다면 호루라기를 불수 있었을까?
문득 상구네 아버지와 희경네 아버지가 마당에서
막걸리를 마시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여, 어떻게 짐승 놈의 새끼들이 배만 물은 겨?
보통 들짐승이 몰이를 하면 팔도 물고, 다리도 물고...
심지어 목을 물어서 움직이지 못하게 할 거 아니여?”
희경네 아버지는 상구네가 못 마땅한 듯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이보게 또 그 소리여? 그만혀...
경찰이랑 의사가 짐승이 물어서 죽었다고 하지 않았나?
경찰이랑 의사 말을 못 믿으면 도대체 누굴 믿을 거여?
자네가 경찰이여? 자네가 의사여?”
배만 물렸다는 것은 들짐승과 정면으로 마주 쳤다는 의미로 볼 수 있었다.
덮치지 않은 것이라면 충분히 호루라기를 불 시간은 있었다고 희경은 생각했다.
“그렇다면... 정말 할머니 말대로 설녀가 창식이를 죽인 겨?”
희경은 그날 밤 정말 창식이가 설녀에게 진짜 죽은 것이라 생각하여
공포의 소용돌이에 갇혀 뜬 눈으로 밤을 보냈다.
설녀 : 백발의 살인귀 2부에서 계속
PS : 일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끝나지 않는 지배'를 마무리 못한 시점에서
다른 이야기를 쓰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길게 가지 않고 3편 정도로 끝날 것 같습니다.
사실 일을 저질렀다기 보다, 저의 글을 좋아하시는 분들께 선물을 드리고 싶어서
평소보다 조금 힘을 주어 써봤습니다.
부족하지만 재미있게 읽어주시고 응원해주시고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늘 건강과 행복한 하루 보내셔요. 다음 이야기로 찾아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