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청마루에 걸터 앉아 걱정스러운 눈초리로 하늘만 바라보며
바닥에 닿지 않는 다리를 연신 휘저어댔다.
어려운 살림에 어머니와 함께 마을의 품앗이며 굳은 일 마다않고
악착같이 달려들어 마련한 작디 작은 논이었다.
처음으로 덕춘에게 땅이 생긴 그날 저녁, 어머니는 몇몇의 마을
사람들을 불러 조촐한 잔치를 여셨고 따스한 마을 사람들의
덕담에 더욱 복받쳐 잔치가 끝나가는 느즈막한 저녁까지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 없었던 덕춘이었다.
이후 친구인 만석에게도, 키가 작아 갓난쟁이라 얕잡아 부르던
두집너머의 천수에게도 울보, 물쟁이라 놀림받게된 덕춘이었으나
아무렇지도 않았다.
'모지리들 같으니라구.. 이제 나에게는 논이 있구먼..! 니들과 같은
철부지가 아녀. 어엿한 어른이라 이거여..'
허나 이런 덕춘의 마음을 모르는지 매정한 하늘은 굳은 장대비를
이틀째 뿌려대는 중이었고 일찍이 떼운 저녁밥은 코로 들어갔는지
연신 코끝이 아려왔다.
"육시럴 놈, 지 애미가 떠내려가도 저 지럴 궁상이나 떨라나 몰러."
"아니 엄니! 저 논이 어떤 논이유?"
걱정하는 덕춘의 마음을 이해하셨는지 긴 한숨을 내쉬며 옷감을
기우는 어머니는 나즈막히 그러면서 단호한 말투로 덕춘을 달랬다.
"니 심정을 모르는게 아녀.. 헌디 장마가 오는 어둑한 밤에 논은
절대 가면 안되는거여."
"엄니는 또 그 어둑서닌지 뭐시긴지 타령이유? 나는 이대로는
안되것구먼유. 이대로 가다가는 논이 죽든 내가 죽든 하것으니께
말리지마유. 시방 논에 가서 실뱀만한 도랑이라도 몇개 더 파놔야
편히 두발뻗고 잘 수 있것슈."
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괭이를 어깨에 이고 어둠속으로 사라지는
덕춘의 뒤로 애타게 자식을 부르짖는 어미의 소리가 닿을 수
없도록 하려는지 장대비는 더욱 세차게 내렸다.
마지막 도랑을 파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논을 둘러보는
덕춘은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옆사람과 대화하기조차
힘들만큼 쏟아지는 빗속에서 알 수 없는 고요함을 느낀것이다.
분명 질퍽거리는 발소리조차 들리지 않을만큼 엄청난 빗소리에도
덕춘이 파낸 도랑에서 흐르는 물소리가 느껴질만큼 고요했다.
잠시동안의 기묘함? 신비로움에 덕춘은 논 주위를 바라봤고
이윽고 시선은 논두렁 건너편의 검은 형상을 발견하였다.
"엄니유?"
이 빗소리에 덕춘의 부름이 들릴리 없었다.
"비도 세찬디 뭣허러 여까지 왔데유. 금방 끝내고 간다니께."
한참을 미동조차않는 검은 형체에 아까부터 느껴오던
그 신비로운 고요함은 덕춘을 점점 더 긴장하게 만들었다.
"엄니 잠시 계셔유. 도랑도 다 파냈슈."
검은 형체위로 사람이 손짓하듯 길쭉한 검은 무언가가 일렁였다.
어머니이길 바라는 마음일까 어머니일까.. 덕춘이 그 검은 물체를
향해 다가가려는 순간 그것은 천천히 덕춘이 있는 곳으로
가까워지고 있었고 그것이 논의 절반쯤 다다랐을때 점점 자라나
사람의 크기보다 기형적으로 거대해져 있는 깨달았을때
이미 덕춘의 발은 공포에 얼어붙어 움직일 수 없었다.
푹 젖어 늘어진 긴 머리카락, 촛점없는 검은 눈알, 새까만 얼굴..
기괴한 형상으로 꿈틀거리며 조금씩 길어지는 검은 여자가
덕춘의 지척에 다다랐을 때 극한의 공포에 온몸은 경련을
일으켰고 덕춘은 그대로 쓰러졌다.
"아이고 덕춘아 이제 정신이 드는겨??
"이놈아 그러게 왜 너거 엄니 말씀 안 듣고 지럴허다
봉변이여 봉변이!"
덕춘의 가슴팍을 치며 울먹이는 만석이와 어머니를 본
덕춘은 순간 자신이 잠시 무서운 꿈이라도 꾼냥 착각에 빠졌다.
"엄니 논은 어찌되고 나가 여기 있데유?"
"아이고 이놈아 시방 논이 문제여! 니가 죽다 살었는디.. 흑흑.."
"아니 엄니 논 때문이 아니라 그 거무스름한 그건 간거여?"
원망스러움 반, 한심스러움 반의 눈빛으로 자신에게
냉수를 건내는 만석에게 덕춘은 자초지종을 들을 수 있었다
"니가 본 것이 어둑서니가 맞을거여.. 니 놈 논두렁으로
뛰쳐나가고 너거 엄니께서 헐레벌떡 우리 집으로 오셔서
나를 끌고 논으로 뛰어갔당께. 논에 도착하니 논두렁 판다는
사람은 보이지않고 논 한가운데서 무릅꿇고 엎드려 논바닥에
얼굴 쳐박고 있는 너를 엄니와 내가 끌어낸겨.
조금만 늦었어도 니는 강을 건너부렀을 것이구먼."
"뭔 소리랴. 나는 분명 도랑을 몇개나 팠는디."
이윽고 가만히 듣고있던 덕춘의 어머니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너거는 잘 모르것지만 여기 마을만이 아니라 그 놈의 어둑서니
땜시 초상이 많다 안하냐. 어둑서니는 평소보다 더 어두운 밤에
혼자 밖에 있는 사람을 잡아죽이는 무서운 귀신이여."
"사람이 제 명 다하면 죽을 수 있는 거 아녀유? 나가 헛것을
보긴혔지만 참말로 여러 사람이 그 어둑서닌지 뭔지에게
홀려죽은게 참말이유?"
"어둑서니에게 죽은 사람들은 죄다 얼굴이 새까맣게
변해 죽었댜. 니도 만석이 이놈이 논에서 끄잡아 올렸을때는
얼굴이 거무튀튀했다 안허냐. 앞으로 다시는 밤에 나다니지 말어!"
검은 얼굴의 얘기를 들은 순간 그 여자의 얼굴을 도저히 어머니와
만석에게 얘기할 수 없었던 덕춘은 떨리는 손을 부여잡으며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었다.
일 하다가 짬이나서 한국전통요괴들을 호기심있게 읽어보던 중
어둑서니라는 요괴를 발견해서 부랴부랴 써봤습니다.
어둑서니는 어두운 밤 사람앞에 나타나서 바로 해코지를
하지는 않으나 바라볼수록 커지고 쳐다보지 않을수록 작아지는
요괴라고 하는데요.
계속 바라보면 점점 거대해져서 급기야 사람을 해치는
요괴라고 합니다.
아마도 컴컴한 곳에서 헛것에 의해 점점 커져가는
마음 속의 공포를 우리 조상님들이 요괴화 시킨건
아닐까 생각도 들었는데요.
아무래도 급하게 틈틈히 쓰다보니 내용이
좀 두서없어도 이해부탁드립니다. 그럼 짱공님들 좋은 하루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