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교전 생존 장병들의 비참한 말로 (조선일보 기사)

달을쫓는파도 작성일 06.06.28 13:2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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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탁상훈기자, 김진기자]

우리나라엔 월드컵이 고통스러운 사람들이 있다. 4년 전, ‘한일 월드컵’ 결승 전날(6월 29일), 북한 경비정의 선제 기습 공격으로 꽃 같은 청춘의 해군 6명이 숨졌다. 그리고 18명이 부상당했다. 이들은 몸에 깊숙이 박힌 파편을 빼내지 못하고, 화염에 휩싸인 전우의 모습을 악몽으로 안고 산다. ‘대~한민국’을 외치는 함성 속에서 포성을 듣고, 붉은 응원의 물결 속에서 동료의 피를 연상하는 ‘서해교전’의 부상자들. 본지는 이들 가운데 제대한 10명을 추적했고, 해외로 이주한 사람을 제외한 6명을 인터뷰했다.



2002년 해군 병장으로 소총수를 맡았던 김승환(25·경기도 안양시)씨. 그는 왼쪽 겨드랑이·엉덩이·허벅지에 8개의 포탄 파편을 그대로 지닌 채 살고 있다. 부상당한 그의 몸은 4년이 지났지만, 정밀 검진을 거부하고 있다. 정밀 검진시 사용하는 MRI(자기공명영상법) 장비를 김씨 몸에 갖다 대면, 몸속에 박힌 날카로운 쇳조각들이 반응한다. 움직이면 바로 옆 살을 파고드는 것이다. 김씨는 “워낙 아파서 엉덩이 쪽 파편 하나만 검사하고 그 후로는 꿈도 못 꿨다”고 말했다. 교전 때 그의 몸에 박힌 파편은 20개. 12개를 빼냈지만 워낙 깊이 박힌 8개는 그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 김씨는 “이번 월드컵 때 용기를 내 친구들과 함께 길거리 응원에 나섰다가 옆에서 터뜨리는 폭죽에서 나오는 화약 냄새에 놀라 도로 집으로 뛰어 들어왔다”고 했다.



역시 소총수였던 김택중(25·전북 정읍시)씨. 모 대학 토목공학과 4학년인 김씨는 “입대 전 공사 현장을 주름잡고 싶다”며 토목과를 지원했으나, 이제 그 꿈을 접고 9급 행정직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축구와 농구를 좋아했던 그는 담담히 말했다. “토목과는 건설현장에서 활동적인 일을 해야 하는데 몸이 그러니까 다분히 현실적으로 생각한 거죠. 몸 안에 파편이 4~5개쯤 있거든요.” 김씨는 “어느 날 밤인가는 우연히 서해교전 전사자 6명의 얼굴을 떠올렸는데 그중 한 사람의 이름이 생각이 안 나 밤새 울었다”고 말했다.



불면의 밤과 악몽에 등판이 젖어 새벽을 맞지만, 외상이 없는 부상자들은 국가유공자 지정조차 받지 못하고 있다.



당시 소총수였던 고경락(25·경기도 오산시)씨는 “사고 직후 1년 넘게 하루 3시간 이상을 자지 못했다”고 했다. 고씨는 당시 불바다로 변한 함정 위에서 동료들이 화염에 휩싸여 까맣게 타고 포탄에 머리가 날아가는 현장을 목격했고, 엄청난 함포 소리로 가는 귀까지 먹었다. 하지만 국가유공자 자격 심사를 위해 군 병원을 찾았다가 냉대만 받았다고 했다. “담당 의사가 정신적인 것은 무시하고 다친 것만 보여달라고 그러더군요. 그러더니 ‘이런 정도까지 국가유공자를 해 주면 국가 예산에도 안 좋다’ 그런 식으로 얘기를 하더군요. 너무 슬펐습니다. 제가 무슨 나라 돈 뜯어먹는 사람도 아니고….”

고씨는 “비록 유공자 선정 기준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제가 당한 고통을 짐작이나 하셨을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모 전문대 일본어과를 전공한 그는 2002년 7월 제대 이후 오랜 방황기를 거쳐 현재 경기도의 한 자동화기계 공장에서 일하고 있다.



요즘도 서해교전 당시 악몽을 꾼다는 참전자 김면주(26·경기도 안양시·회사원)씨 역시 국가 유공자를 두 번 신청했다가 모두 떨어졌다. 그는 “다친 외상은 크지 않지만, 정신적 후유증이나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노력한 것들이 외면받는 것 같아 그저 서운할 뿐”이라고 말했다. 당시 함정 탄약고를 관리했던 대학생 김상영(24·광주(光州)시)씨는 “이제 정부에 더 기대도 안 한다. 지정해 주었을지는 모르겠지만, 국가유공자 신청도 아예 안 했다”고 말했다.



본지가 인터뷰한 6명 가운데 3명은 직장인으로 3명은 학생으로, 힘들지만 열심히 미래를 만들어가고 있다. 이들이 우리 사회에 희망하는 것은 단 한 가지. 지금으로부터 4년 전, 우리 영토를 지키기 위해 많은 젊은이가 목숨을 걸고 싸우다 죽고 다쳤다는 사실 하나만을 기억해달라는 것이다. 당시 부상자 이재영(서울시 강동구·25)씨의 소망. “그저 알아만 주셨으면 한다. 다만 일 년에 한 번씩 흘려 듣는 얘기로라도 기억해주셨으면, 그저 그것밖에 없다.”



키워드 ▶서해(西海)교전 한·일 월드컵 폐막을 하루 앞둔 2002년 6월 29일 서해 연평도 근해에서 북방한계선을 침범한 북한 경비정의 선제공격으로 벌어진 남·북한 간 해상 교전을 말한다. 당시 북한 해군은 85㎜ 함포를 기습적으로 발포했고, 우리 해군의 156t급 357호는 조타실이 명중돼 침몰했다. 이 교전에서 탑승하고 있던 해군 6명이 전사하고 18명이 부상했다.



당시 이 전투는 이보다 3년 앞선 1999년 6월 역시 북방한계선 부근에서 우리가 북한 경비정들을 대파한 ‘연평해전’ 때 대참패를 겪은 북측이 수년간 벼르다 기습공격을 해 온 것으로 분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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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요청과 압박으로 우리 정부는 서해교전 당시의 장교들에게 불이익을 주거나
그 당시의 제독이 군복을 벗어야 했다고 들었습니다.

진정한 장병 복지는 열린우리당이 군인 월급을 8만원으로 올려주는 것이 아니라
전쟁터에서 조금이라도 살아남을 수 있게, 군 장비를 개선하고 전투력을 증강시키며,
북한이 도발 못하도록 정책을 강화하고,
군 복무중 육체적, 정신적인 상해를 입는 군인들에게 끝까지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나라를 지키고도, 국가 유공자 혜택도 못받는
서해교전 생존 수병들이 불쌍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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