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급관님 뒤통수를 칠 뻔한 사연

어쩌라구우웃 작성일 07.10.13 17:2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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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기간에 공부는 안하고 게시판 눈팅하다가

 

군 시절 있었던 해프닝 하나가 생각나서 글 올려 봅니다.

 

 

 

 

전 12사단 37연대에서 복무했던 04년 군번입니다. 보직은 소총중대 병기계원이었군요;;;

 

 

 

 

전장비(전투장비지휘검열)아시죠?

 

원래 수리부속(부품)은 필요한만큼만 청구해서 사용해야 하는게 원칙인데, 실질적으로 그게 불가능하지요.

 

청구해도 잘 안나오니까... 병기계원들은 보통 전장비 등의 검열에 대비해서 이런저런 수리부속들을 많이 짱박아 둡니다.

 

물론 규정에 어긋나지요. 걸리면 징계먹습니다.

 

 

 

 

행정병 초기에 보급관님이랑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이런저린 이유가 있지만 주원인은 지역감정. 보급관님은 전라도 해남출신이고 저는 경상도 대구출신이지요. 보급관님이 절 싫어하시더군요;;;)

 

하필 재수없게 전장비 준비할 때 짱박아 둔 수리부속을 보급관님한테 걸린겁니다.

 

 

 

 

보급관님이 평소 절 싫어하는 건 알고 있었는데, 참 어이가 없었던게

 

내일모레 전장비 검열받는 시점에서 수리부속 짱박아 놓았다는 이유로 온갖 꼬장을 부리는 겁니다.

 

평소에 안 하던 상소리도 하시고.... 부대일지랑 전화기도 마구 집어던지시고....

 

그렇지 않아도 전장비 준비로 바빠 죽겠는데 짱박은 수리부속 내역을 정리해서 보고하라는 둥....

 

 

 

 

뭐, 직속상관 지시니까~

 

내일 모레 전장비지만 전장비 준비는 접어두고 보급관님이 지시하신 '짱박은 수리부속 내역'을 표로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보급관님 스타일에 맞춰 일련번호까지 일일이 넣어가면서~

 

 

 

 

낮에 대략 5시간 정도 행정반에 서서 욕먹고, 밤에 잠도 못자고 쓸데없는 작업하고 있자니 슬슬 스팀이 돌더라구요;;

 

수리부속 모아서 팔아먹으려고 한 것도 아니고... 그래도 나름 중대를 위해서(;;;) 전장비 잘 받아 보려고 한 짓인데...

 

그리고 보급관님 짬도 있으니 병기계원이 수리부속 모아두지 않으면 전장비 잘 받는거 불가능하다는 사실 쯤은 분명히 알거란 말입니다.

 

생각할수록 열이 받아서, 새벽 4시쯤 되니까 아주 뇌가 하얗게 되어 버렸습니다.

 

하지만 원체 소심한 성격이라 하극상 같은 건 생각도 못 하고 이른 결론이,

 

 

 

 

때려치우자. 

 

 

 

 

그런데 우리 중대에서는 행정병이 그만두겠다고 해도 잘 안 놓아줍니다;;;

 

뭔가 사고를 치기 전에는 말이지요. (영창 한번 갖다오면 보직 바꿔줍니다.)

 

그래서 전 8시간동안 작업하던 한글문서를 끄고 새벽 4시에 어두침침한 병기창고로 들어갔습니다.

 

 

 

 

규정상 병기창고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랜턴 외에는 불을 밝힐 수단이 없는데다..

 

우리중대 병기창고는 유난히 어두운 곳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게다가 바로 옆이 세면장이라 습하기도 하고...

 

정말 밤에는 들어가고 싶지 않은 장소였지요.

 

병기창고 문을 열고 들어갈 때마다 '누가 목 매달고 있는 거 아냐?' 란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음침한 장소였습니다.

 

 

 

 

새벽 4시에 병기창고에 홀로 앉아 한시간 가량을 다시 숙고했습니다. (전 소심하거든요)

 

결국 마음을 굳히고 의자와 드라이버를 가져와서 병기창고 천장의 텍스를 뜯어내기 시작했습니다.

 

천장 텍스를 뜯어내면 철제로 된 프레임이 보이지요.

 

 

 

 

 

 

제가 병기계원을 인수인계 받을 당시, 사수가 제게 남기고 간 것이 3가지 있었습니다.

 

그 첫번째가 이번에 문제가 된 수리부속들. (물려물려 받아서 수년간 모은 방대한 양이었습니다.)

 

두번째가 소주 한 병과 휴대용 가스버너 (짬 되면 병기창고에서 라면 끓여먹으라고 전역할 때 일러주더군요;;)

 

그리고 세번째가 60m 고폭탄 한 발.

 

 

 

 

그 모든 것은 이 병기창고에 짱박혀 있었지요.

 

수리부속은 워낙 양이 많았기에 이번에 보급관님에게 걸리고 말았지만,

 

소주 1병/가스버너와 60m 고폭탄은 병기창고의 천장 프레임 위에

 

그것도 텍스를 뜯어봐도 웬만해선 잘 보이지 않는 사각지역에 잘 숨겨놓았었습니다.

 

 

 

 

사수에게 인수인계 받은 이후로 여태껏 봉인해 두었던 60m 고폭탄을 꺼냈습니다.

 

떨어뜨리면 끝장이라는 생각에 솔직히 손이 좀 떨리더군요.

 

사실 사수에게 인계받을 때는 '이걸 나보고 어떻게 처리하라고' 하고 막막한 느낌도 들었지만,

 

이번에는 아주 유용하게 사용될 것 같았습니다.

 

어두컴컴한 병기창고에서 지환통을 열어 60m 고폭탄을 한번 확인한 후,

 

고폭탄을 다시 지환통에 넣고 들고 나갔습니다.

 

 

 

 

고폭탄도 손에 들었겠다 크게 사고 한번 쳐 볼까~~ 하는 생각도 없는 건 아니었지만..

 

구속되면 곤란하잖아요? 

 

영창에 가는 선에서 그치기 위해 고폭탄을 중대장실의 책상 가운데에 얌전히 올려놓은 다음,

 

새벽 5시에 보급관님께 전화를 걸었습니다.

 

 

 

 

"보급관님, 저 60m 고폭탄 하나 가지고 있습니다."

 

 

 

 

딱히 다른 말은 필요없더라구요. 보급관님도 전화로 꼬치꼬치 캐묻지 않고 알았다며 조금 있다가 보자고 전화를 끊더군요.

 

병기계원이 탄 한두발 빼돌리는 거야 별일 아니지만, 제가 있던 대대는 유난히 탄관리에 엄격했거든요.

 

게다가 보통탄도 아니고 고폭탄인데다... 전날 보급관님과 저 사이에 썸씽도 있고 하니...

 

전화상의 한 마디 만으로도 뭔가를 감지하셨던거겠지요. 역시 짬이 되다보니....

 

아무튼, 보급관님이 전화를 끊은 뒤에 중대장님께도 전화를 드려 고폭탄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보고드렸습니다.;;

 

 

 

 

중대장님이랑 보급관님 6시쯤 되니까 중대로 달려오시더라구요.

 

짱박아 뒀던 고폭탄으로 중대장이랑 보급관 가슴을 한번 철렁하게 한 뒤,

 

탄 은닉죄로 15일 영창을 다녀왔다가 병기계원을 때려치운다....는 게 제가 세웠던 소심한 계략이었지만.

 

이것도 결국 뜻대로 되진 않았습니다.

 

 

 

 

중대장님이랑 보급관님 제 얼굴보자마자 문책은 뒤로 하고 고폭탄의 행방부터 물으시더라구요.

 

저는 중대장실에 있다고 말씀드리고 조용히 내무실로 가서 처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10분 후......

 

저는 바보가 되었습니다.

 

 

 

 

중대장님이 호출하기에 중대장실로 갔는데, 중대장님이랑 보급관님이 아주 만족한 듯한 미소를 짓고 계시더군요.

 

뭔가 이상한데...하고 중대장님의 책상 위로 눈길을 돌린 순간, 어라!

 

60m 고폭탄의 색깔이 파란색인겁니다. -_-;;;

 

 

 

 

그렇습니다.

 

밤에 음침한 병기창고에 앉아 무려 1시간동안이나 고민하고,

 

손을 떨며 꺼내 펼친 제 회심의 카드. 60m 고폭탄은 사실...

 

...교보재였던 겁니다.

 

 

 

 

병기창고는 워낙 어두워서 파란색인 걸 몰랐던 거지요. 전 사수한테 속았던 겁니다;;;

 

짬을 조금만 더 먹었더라도 알아차릴 수 있었을텐데, 불행히도 당시 전 갓 꺾인 않은 일병이었습니다.

 

 

 

 

쪽팔려서 억장이 무너지는 저의 심정은 아는지 모르는지.

 

망연자실 서 있는 저를 놔두고 중대장님과 보급관님은 즐겁게 대화를 나누시더군요.

 

"보급관님, 그래도 모르니까... 확인 해 보셨죠?"

 

"그럼요. 교보재지만 혹시 모르니까 제가 뜯어서 신관 분리했습니다. hahaha~"

 

이런 대화를 듣고 있는 당시의 기분은 참으로 아스트랄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이렇게 회심의 계략이 수포로 돌아가고... 중대장과 보급관님의 면담이 이어졌지요.

 

전례가 없을 정도로 깨질 줄 알았는데 의외로 따뜻하게 대해주시더라구요. 완전 투정부리는 어린아이 취급.... -ㅁ-;;;

 

뭐, 맞는 말이지요. 무기를 빼앗기고 뾰로퉁해 있는 어린아이를 달래듯..;;

 

중대장님과 보급관님의 회유로 저는 결국 병기계원을 그만두겠다는 생각을 포기하고... 결국 병기계원으로 전역하게 되었지요.

 

 

 

 

교보재였다고는 해도, 영창에 갈 수도 있었던 상황인데 그냥 넘어갔던 것은

 

그나마 평소에 제가 고분고분 말을 잘 들었던 점과 평소 중대장님이 저를 신임해 주셨던 덕분인 것 같습니다.

 

 

 

 

그 사건 덕분에 간부들에게 1년치 놀림거리를 제공했지만 더 이상 보급관님이 이유없이 꼬장부리지는 않더군요.

 

그렇게 악연이었던 보급관님과도 전역할 때쯤에는 완전히 화해해서,

 

전역 전날에는 유례없이(엄청 무뚝뚝하거든요) 만두와 김밥을 사다 주시기도 하더군요.

 

(내일 전역하는 사람에게 김밥 2줄과 왕만두 10개를 보는 앞에서 다 먹으라고... ㅎㄷㄷ)

 

 

 

 

haha~ 병기창고 천장에서 고폭탄 꺼낼 때는 정말 짜증나 죽을 것 같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재미있군요;;

 

정말 추억은 기억을 대책없이 미화시킨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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