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전 재조명-아픔(안케페스전투)

eettvv 작성일 07.11.11 15: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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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케전투의 서막
                                                                 

저는 경남 진주에 거주하는 황진순 입니다.

 

이곳 '월남전과 한국' 홈페이지의 월남전 참전수기를 읽으면서
1972년 4월, 치열했던 안케패스전투의 현장에서 실전을 경험했던 참전용사로써
이역만리 낯선땅에서 산화한 전우들이 생각나고, 생과사의 기로에서 살아남은 내가
그 당시 전우들의 희생과 전우애 그리고 경험을 알려야겠다는 충동이 일어나서
글쓰는 재주가 없고 어슬픈 글이지만 체험한 것을 토대로 몇자 적어보려 합니다.

맹호기갑 1중대 전술기지는 '퀴논'에서 '푸레이쿠'로 가는 19번 도로옆 남쪽언덕위
안케패스 정상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638 고지'와는 능선을 따라 연결되어 있었고
1중대 화기소대 박격포 진지에서 *거리 약 270미터 정도의 거리에 있었습니다.
내가 경계 근무를 서는곳은 1초소인데 아래층에는 l.m.g(m60) 기관총이 거치되어 있으며, 
윗층에 샌드백 무개호(위사진참조)가 박격포반의 주, 야간 근무초소 입니다.

1중대 전술기지에는 외곽경계근무 초소가 5겹의 철조망을 따라 포진하고 있었으며
중대본부 벙커옆에 경계관찰용 관망대가 있었으며, 기지내에는 박격포 진지와 4.2인치포
그리고 전투지원중대에서 나온 106mm 무반동총이 장착된 찦차가 1대 있었습니다.

1중대 전술기지 내에는 1개의 관망대와 36개의 초소가 있습니다.
운명의 그날 1972년 4월11일... 그날따라 당시 정황이 좋지 않았는지
적색경보가 내려져 중대내의 모든초소에 야간보초가 투입 되었습니다.
나는 새벽 00:00시경에 임무교대로 진지에 투입된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날밤도 순찰하사가 야간 경계병들에게 새벽2시에 위협사격을 실시한다고 전달을 했다 .
위협사격이란 적이 침투하지 않더라도 시간을 정하여, 초소에 근무하는 병사들이
철조망 전방에 일제히 사격을 실시하여 적의 침투기도를 사전저지하는 예방조치입니다.

정확히 새벽2시... 모든 초소에서 m16 총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철조망바깥 전방을 향해 실탄사격을 일제히 개시 하였습니다.
주월 한국군 전투사 중 월맹군과 맞닦트린 경우는 별로 없었던지라
위협사격이 끝나고 다시 적막속에 묻히면 평소와 마찬가지로 샌드백으로 쌓은
초소 진지안에서 어둠을 주시하며 온갖 공상에 빠져듭니다

운명의 그날은 밤안개가 너무 짙어서 앞을 분간할 수 없는 습한 날이었습니다.
늘 그랬던 것처럼 안개비 같은 물방울이 온몸을 젖게하기 때문에 판초우의를 뒤집어
썼습니다. 누구도 vc 세이파들이 철조망을 뚫고 들어 오리라고는 예상치 못하였습니다.

위협사격이 있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2초소 전방 외각 철조망에서 조명지뢰가 터졌습니다.
내가 근무하는 1초소와 '홍문희'일병이 근무를 서는 3초소 사이에는 거리가 너무 짧아
(약 5m) 평소  2초소에는 근무자가 없었습니다.

안개가 짙어 무엇이 조명지뢰 인계철선을 건드렸는지 육안으로는 식별이 어려웠습니다.
간혹 낮에도 날짐승이나 떠돌이 들짐승이 조명지뢰를 건드려 터지는 사례가 있었기 때문에
3초소 근무자 홍문희 일병과 저는 아마 들짐승의 소행일 것이라고 얘기하고 기다렸습니다.
 
또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뒤 2초소 전방 조명지뢰가 또 한발 터지면서 순간적으로
짐승의 뒷발 같은 것을 봤습니다. 중대내에서 기르는 강아지 같은 느낌이 들어서 
본인은 3초소 근무자 홍문희 일병에게

“저 *끼 내일은 잡아서 보신탕 해 버려야 겠다!”

라고 고함을 질렀으나 3초소 홍문희 일병은 대답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vc 세이파들이 3초소쪽으로 진입을 시도할려고 했는지도 모릅니다.

새벽3시쯤, 순찰하는 '박태균' 하사가 1초소 위로 올라와 근무이상 유무를 확인했는데
전방 조명지뢰 2개가 터졌다는 보고를 했더니 "근무 열심히 하라"는 지시를 하고
다음 3초소 쪽으로 교통호를 통해서 갔는데... 불과 수분 후에

"v.c 다!~"

하는 박태균 하사의 고함과 조명지뢰 앞에 수명의 v.c 들이 우왈좌왕 하는게 보여
즉각 3초소쪽 크레모어를 폭파 시킨 후 판쵸우의를 벗어던지고 3초소 전방 방향으로
m16 소총으로 불을 뿜기 시작했습니다. 연이어 수류탄 투척, 또 사격...
심상치 않은 소란에 내무반 사병들이 뛰어 나오고 모든 초소에서 사격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홍문희 일병이 1초소 아래로 뛰어와서 l.m.g(m60)의 사격을 시작했고,
본인은 다른 병사들이 투입되는 것을 보고, 본연의 임무인 박격포 진지로 뛰어 갔습니다.
박격포 반장님께 v.c 의 세이파 공격을 알리고, 위치는 3초소 앞 지점으로 보고하자
반장님은 즉각 사격각도 88°를 향해 조명탄, h2탄 병행 사격을 명하여 사격하였습니다.

그후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는지 조용해진 3초소... 그리고 여명이 밝았습니다.

본인은 손등에 크레모아 후폭풍 파편창을 입은지도 모른체 전투에 임했는데
그때서야 피가 흐르는 것을 보고, 내무반에서 압박붕대 2개를 가져와 손등 상처에 1개,
다시 손목에 동여매어 지혈을 하는 응급처치를 했습니다.

모두 전과확인에 들어갔습니다. 중대장의 전과확인결과 적 시체(v.c) 5명이 있었습니다.
v.c 1명은 창자가 터져 중상이었으나 목숨은 붙어 있었습니다.
나는 혹시 정보라도 얻을 수 있을 것 같아 상처난 옆구리에 창자를 밀어넣고 본인의 손목에
동여 매었던 지혈 압박붕대를 풀어 v.c의 옆구리에 돌려매어 응급처치를 해주었습니다. 
침투시 지참한 폭약통 등 기타장비 노획. 아군이 피해는 본인 한사람 파편창 뿐이었습니다.

아침을 먹고 1초소-3초소 전방 정리하고 있으니 많은 v.i.p 분들이 전과 확인차
중대 기지 내방하던 중, 19번도로 q 커브 지점 밑에서 월남군 수송부대가 v.c 의 공격으로
유류탱크 차량이 폭발하는 상황이 전개 되었습니다.
그 폭발 여파로 1중대 좌측편 270° 방향 벙커 창문이 떨어진 굉장한 폭발이었습니다.
처음엔 그들이 v.c인줄 알았으나, 뒤에 월맹정규군 들이란걸 알았습니다.
곧이어 기갑연대 수색 중대 중대장님이하 중대원이 투입되고 1중대 1소대 정찰조는
638 고지를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고, 박격포반은 638고지 쪽에 병력이 이동할때는 
항상 대기하여 고지의 360° 방향 거리 270m에 맞춰놓고 언제든지 발사할 수 있도록
대기상태로 있었습니다.(※ 박격포 진지에서 638고지 정상까지 정확히 275m)

"따다닥!~"

하는 콩볶는 소리에 1소대 첨병 일병 '부인호'(32제대 제주)가 쓰러졌다.
638고지에 매복해 있던 적의 사격을 받고 쓰러진 것이다. 
박격포 반장 최종대 하사님이

"a.k 소총이다!"

하는 고함과 함께 발사명령을 내려 638고지를 향해 박격포 탄을 퍼붓기 시작했습니다.
1소대원의 후퇴와 함께 피아간 박격포 공격이 시작되어 1중대 쪽으로도 박격포가
날아 왔습니다. 중대 기지내 병사들은 모두 벙커내로 급히 대피했습니다.
적의 박격포 공격은 처음 당하는 공격이라 우왕좌왕 했으나 침착성을 잃지 않고
전투를 해 나갔으나 계속 전황은 우리에게 불리한 상황만 전개 되었습니다.
이때 적 박격포탄 파편에 1중대장 당번병 한건철 병장이 관망대 아래에서 안타깝게
전사하여 1중대 최초의 전사자가 되었습니다.

수색 중대장님 이하 소대장 전원 사망.
선임 중사님께서 수색중대를 지휘한다는 내용의 소문이 들렸습니다.
모두 우울하고 불안한 하루였습니다.
계속되는 적의 박격포 공격으로 낮에는 박격포 대응사격을 했습니다.
 
보급헬기가 날아왔는데 적의 박격포탄이 중대에 떨어져 착륙을 하지 못했습니다.
대대 포병 관측장교가 적 박격포 예포진지 공격요청에도 불구하고
적의 박격포는 중대기지에 계속 떨어지고 있어, 보급헬기들은 보급품을 19번도로쪽으로
우회하여 안케쪽에서 올라오면서 양쪽으로 보급품을 떨어뜨리고 날아가 버렸습니다.

그래서 적 박격포 공격이 뜸한 저녁(어두워지면 박격포 불빛에 위치가 탄로나므로 
사격 않음) 보급품을 수송하는 상태이며, 그래도 1중대는 물 및 보급품을 받을 수 있었으나
638고지로 향하는 다른 중대, 대대 장병들은 극심한 갈증 및 피해 보급품을 받지 못하는
어려움에 봉착하고 모든 정황은 정말 암울했습니다.

박격포 사격 중 바로 진지 50cm 본인 뒷쪽에서 ‘퍽’하는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불행중 다행으로 적 82mm 박격포탄이 불발된체 약 30cm깊이 벙커옆에 꽂혀 있었습니다.
포반장, 사수, 부사수, 나, 모두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빨리 메우라는 반장님 지시에 
그대로 흙으로 구멍을  메우면서 누군가 우리중에 하느님이 돌봐주는 행운아가 있다고 
서로를 격려 했습니다. 적의 예포 진지를 찾을 때 까지 대응 사격을 않고 기다리다가 
적 사격이 끝나면 나가서 사격하는 형태였습니다.
무려 보름동안 약 2,000여 발을 사격하였습니다.

80° 정도 위치 벙커에서 근무 하면서 적의 박격포 사격이 시작되어 "퐁~,퐁~" 하는
폭발음이 들려오면 저는 "폭탄낙하!" 고함을 지르며 m16소총으로 공중사격을 하면
참호 밖의 장병은 모두 벙커내로 들어가고, 곧이어 벙커 위에선 "쿵~쿵~" 하는 폭발음이
들립니다. 1초소쪽에 근무 않은 것은 638고지 진격 때문에 지휘부가 1초소 l.m.g 벙커에
모두 있어 박격포 근무지는 80° 각도의 초소에서 근무하게 된 것입니다.
포병관측장교가 적의 예포진지를 찾지못해 애를 태울때 아군은 크나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적 박격포탄이 80°-90° 쪽으로 날아와서 1중대 기지에 지원 나온 전투지원중대 탄약고에
떨어져 폭발하면서 4.2“장병 4명과 106mm 무반동총 반장 하사 박창일(본인의 국민학교
1회 선배임) 모두 5명은 시체도 없이 폭발과 함께 날아갔습니다.

박창일 하사는 월남전 근무가 끝나서 귀국발령이 나와서 원래 4월 15일이 귀국날이었으나
귀국 못하고 전투가 있기전 본인에게

"너의 어머님께 내가 귀국하면 안부 전해 줄께"

하던 말씀은 영영 못하시고 불행히도 본인이 철수후 귀국하여 선배의 부모님께 차마
폭사하여 시체도 없다는 말은 못하고 그냥 용감히 전투하다가 적의 박격포탄의 파편으로
전사하셨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저 역시 월남 도착 3일 후 어머님께서 돌아가시고 근 3개월 후 안케전투 끝난 후에
어머님 돌아가신 것을 알았습니다. 왜 무엇 때문에 우리가 이역만리 전장에서
귀중한 대한의 아들들이 흙으로 돌아가야 되는지 정말 괴로웠습니다.

5명의 시체 중 유일하게 일부 수습할 수 있었던 1명은 4.2“ f.d.c 병장(부산출신/
이름 기억 없음)은 5명중 유난히 엉덩이가 커서 시체를 알 수 있었으며,
사지는 모두 파편에 날아가고 머리 부분도 반쪽만 남은체 30~40m 밑 철조망에
걸려 있는 것을 우리 중대원들이 고히 시신 수습하여 영현백에 모셔 106 후송병원으로
안치하였습니다.

전투지원중대 장병 시신 및 638고지 공격시 전사한 동료 전우 시신은 헬기로 수송 못하고
중대 헬기장에 안치하였다가 얼마 후 19번 도로 정상 (후에 전승비 세운 곳에서 약 50m
안케 쪽)에 시신 40~50구를 모셔 놓고서 1소대 일부와 화기소대의 저는 이렇게 몇 명이서
시체를 지키는 매복을 서야 했습니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당시 동료 전우들의 시체 썩는
냄새가 나는 것 같아 아직도 나의 마음 아프게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부모곁을 떠나 이국만리 낯선땅에서 죽은 것만도 서러운데 혹시 들짐승이 시신을 훼손
할까봐 우려해서 성심을 다해 시신을 지키다가, 보급용 지원 헬기가 며칠후 도착하여
수송용 그물에 시체를 차곡차곡 쌓아서 시누크 헬기에  매달아 106 병원으로 후송 보냈습니다.

638고지 상공에는 사단 항공대 l-19 정찰기가 638고지를 공격하는 우리사단 장병들의
사기를 북돋우기 위하여 군가와 격려의 방송을 틀어 주었으며, 638고지 공격시에는
연막탄을 638고지에 터트려 팬텀기가 폭격하도록 유도 하였습니다.

협소한 1중대 기지에 많은 병력이 모여 있어서 부상당한 전우들은
화기분대 옆에 1소대 l.m.g 벙커숙소가 있어 부상자 및 중상자는 그곳에 수용하고
위생병이 응급치료를 하면서 빨리 외과병원으로 후송해야 하나, 십자헬기(적십자)
병원용 헬기가 착륙하려고 해도 적의 박격포탄이 떨어지니 헬기가 내릴 수 없어
어쩔수 없이 내무반에서 부상병을 치료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연대 지휘관 (직위, 계급 기억없음)께서 우리 박격포반에
"적 예포 진지 지점의 좌표를 지적하라"하여 김병장이 좌표를 찍어줬는데 명중했는지
다행이 그 뒤부터는 적의 박격포 사격이 뜸해서 뒤에 김병장은 화랑 무공훈장을 수여받는
영예를 안았습니다.

그것도 잠시 638고지 우측 7부 능선에서 적의 75미리 무반동총 공격이 있었습니다.
박격포탄은 그런데로 벙커 안에 있으면 관계없었으나 75미리 직사포는
제가 보초 서있던 80° 방향 초소에서 70°-60°초소까지 무차별 사격을 하여 대응방법이
없었습니다. 대응사격하면 조용하였다가 또 조용하면 사격하고 불기둥이 번쩍하면서
날아오다가 쉿!~ 소리 내면서 벙커에 맞으면 마대자루 폭 2-3장은 그냥 부서지면서
뚫리는 굉장한 화력 이였습니다.

여기서 방향을 각도로 이야기 하는 것은 박격포 사격시 638고지가 360/6400도(mil)이며
그 오른쪽으로 각도를 정해 사격하기 때문입니다.

전투가 거의 끝날쯤 어느날 낮 11시 정각!
모두 땅바닥에 누워 귀를 막고 입을 벌리고 누워 있으라는 지시가 떨어졌습니다.

저는 그래도 임무가 경계 초병이라 그 광경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b52 융단폭격이 그렇게 무서운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11시 정각 b52 폭격기 2대가 퀴논 쪽에서 날라와서 638고지 후방에
모래알 같은 것을 수없이 뿌리며 지나갔습니다. 그것은 일부는 고폭탄, 일부는 네이팜탄,
네이팜탄은 은빛을 반사하며 서서히 내려와 불기둥을 내고
고폭탄은 터지면서 온 천지가 지진 온 것처럼 떨리는 것은 소름이 끼쳤습니다.

반경 폭탄 1개 살상거리가 4km 라는 말을 듣는 순간 등골이 오싹했으며
우리 중대 위에, 옆에 파편이 떨어졌는데 후에 그 파편의 크기를 보니 50-70cm 정도 였고
큰것은 1m가 넘는 것도 있었습니다.

얼마 후 이무표 중위가 638고지 점령했다는 낭보에 우리는 서로 얼싸안고 울었습니다.
수많은 전우들의 부상, 전사, 행불, 얼마인지는 모르나 그뒤 들은 이야기로는
우리 중대에서만 193명의 시신을 후송했다는 소릴 듣고 또 한번 모두 울었습니다.
638m 자그마한 고지를 점령하기 위하여 너무나 많은 젊은 목숨이 산화 했습니다.

 

과연 안케전투가 승리한 전투인지?
안케전투에 참가한 수많은 전우들은 모두 가슴의 한켠에 풀지 못한 의문이 있을겁니다
휴전선을 넘어 침투한 월맹 정규군 무장공비들은 토벌해야 했지만
638고지를 그렇게 재래식 방식으로 무작정 공격 했어야 했는지?
지루하고 무섭고 어두웠던 15일간의 전투,
지휘관들은 왜 그렇게 적정파악이 안 되었는지... 희생이 참으로 컸습니다.
그리고 전사자료를 찾다보면 너무나 축소 은폐 되어있는 아군의 피해...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손등의 상처만 보면 그때 전사한 수십 명의 전우들이
생각 납니다. 잊으려 잊으려 해 *만 그날들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나는 살아왔으니 인생에 있어서 그보다 더 어려울 일이 없는 소중한 경험일지 모르나,
고엽제 후유증으로 고생하시는 본인 주변의 파월전우들, 이국만리 낯선땅에
조국의 명을 받고 파월되어 장렬히 산화하신 동료 전우들을 생각하면,
죽어 이한몸 사라질 때까지 이 아픔은 지워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지금도 언뜻 그때의 장면들이 스치는 듯 생각나면 소스라쳐 진땀을 흘립니다
만약 v.c들이 1초소쪽 침입했거나 만약 순찰하사가 3초소 쪽에 없었더라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라는 이런 생각을 할라치면, 온몸에 소름이 끼칩니다.
31년이 지난 지금, 아직도 그날 새벽 "v.c다!“, ”a.k 소총이다!!“ 하는
고함소리가 환청으로 저의 귓전에 남아서 들리는 듯 합니다. 

1중대 본부기지 파월동기(7차32제대) 3명중 1소대 근무하던 제주출신 부인호(일병)는
세이파 공격이후 1소대 638고지 정찰중 적의 ak소총 사격을 받아 행방불명 되었고,
1소대 또 한명의 동기 이덕조 일병은 중대기지 탄약고의 적 박격포 공격으로
탄약고 폭발시 화상을 입어 파월 3개월만에 본국으로 후송되어 돌아왔으며,
유일하게 본인만 손등에 조그만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래도 나는 이렇게 살아 돌아왔고 가정을 꾸며 세 자녀 모두 대학 졸업하여 직장이 있으니
무엇을 바라겠습니다만, 먼저 안케패스에서 산화한 전우들의 명복을 빌고,
아직도 부상에서 고통받는 전우들 쾌유하시길 빌며 이만 펜을 놓을까 합니다.
짧은 글솜씨이고 다른 중대의 전우들과 다소 시간의 차이는 있을 수 있는 지는 모르나
내가 직접 보고 직접 듣고 직접 전투한 안케패스 638고지 전투 수기는 이것으로 마칩니다.
모든 공은 동료전우에게 돌리며...그리고 동작동에 잠드신 전우들의 명복을 빕니다..


2003. 11. 23.
경남 진주시 초전동

황진순 올림
기록편집: www.vietvet.co.kr




안케전투의 이미지는 문서화일에 속해 있어 이미지를 대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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