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트남전쟁파병전쟁의 재조명
한국의 베트남 전쟁 파병은 조약상의 의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고,
자유우방에 대한 신의라는 명분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야당은 파병에 대해 반대했고, 1966년 추가파병시에는
야당뿐만 아니라 여당 및 정부측 일부에서도 강력히 반대했다.
반대의 이유는
맹호·청룡 부대의 파병만으로도
미국이나 자유세계에 대한 신의를 다한 것이며,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전투사단을 빼돌린다는 것은 그만큼
한국군의 전력을 약화시키는 것이고, 세계 여론이 베트남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원하고 있기 때문에 외교에서 한국의 입장이 난처하다는 것 등이었다.
그러므로 더이상의 파병이 있을때는 한국에 뚜렷한 국가이익을 가져올 수 있는 반대급부가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정부는 미국측과 수차례의 회담을 거쳐 한국군 전력증강과 경제개발에 소요되는 차관 공여 등 14개항의 사전보장을 받았으나 이후에 국회에서는 이 보장의 효력 등에 대해 많은 시비가 있었다.
논란 속에서도 한국은 월남파병으로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까지 많은 외화를 획득하여 한국 경제발전에 기여했으며, 군사기술 및 군장비 등의 현대화에 기여했다. 또한 미국과 군사적 관계를 증진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한국군 근대화
한국군의 월남파병은 정부가 국내외적으로 여러 가지로 어려운 상황에서 결정한 국가의 생존 및 발전전략으로서 한국역사의 큰 획을 긋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한국은 파월로 인하여 공산권은 물론 일부 비동맹 국가와의 관계에서 외교적 손실을 보았고 군사작전과 경계활동에서5,400여 명의 인명손실을 가져오기도 했으나 군사 , 경제, 외교적으로 많은 긍정적 성과를 얻음으로써 국위를 선양하고 경제발전을 이룩하여 소위 한강의 기적을 이룩하는데 초석을 놓았다.
한국은 전투병력 파병을 통하여 국가안전보장은 물론한미간의 현안들을 해결 하였을 뿐만 아니라 월남특수를 통한 경제 발전을 도모하였다.
한국은 월남참전을 통하여 껄끄럽던 미국과의 관계를 우호적인 협력관계로 발전시킴으로써, 정치·경제·군사적으로 많은 도움을 받게 되었다.
한국군의 파병으로 주한미군의 월남이동을 저지하여 국가안보를 튼튼히 하였고,월남경제 진출 등으로 많은 외화를 획득하여 경제발전을 이룩하였으며, 미국으로부터 많은 군사원조를 받음으로써 국군의 장비 현대화를 달성하였다.
부흥의 원동력
한국은 월남파병으로 인한 경제활동, 전투수당, 경제원조, 외국으로부터의 차관 등으로 많은 외화를 획득하여 경제발전에 충당하였다.
월남참전으로 인한 경제적 이익은 미국의 경제 및 군사원조, 차관도입,대미수출 등을 제외하더라도 월남으로부터의 외화수입은 무역과 무역 외 부문을 포함하여 약 9억 달러에 달했는데, 이는 그 어려웠던 한·일 협상을 통해 일본으로부터 청구권이란 명목으로 받아낸 돈이 겨우 6억 달러였던 점을 감안하면 월남파병으로 인한 외화수입은 당시로서는 대단한 금액이었다.
일부 비판론자들은 월남파병으로 국가가 정치·경제·군사적으로 많은 발전을 하였음에도 파병이 경제이익과 전투수당을 전제로 이루어졌으므로 파월 한국군을 용병이라고 비판하였는데 이는 잘못된 시각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으로부터 경제적 도움을 받았고 전투수당을 받기는 하였으나 처음부터 파병목적이 명확하였고 독자적인 지휘권을 행사하였다.
용병이란 말은 군사적 지식이 없는는 識者들의 잘못된 표현이다. 한국군은 월남에서 공산주의와 당당히 맞서 용감히 싸웠으며 이들의 희생의 결과로 국가가 여러 분야에서 발전하였고,특히 경제가 획기적으로 발전하여 국력이 세계로 뻗어나가게 되었다. 우리는 현대사에서 큰 획을 긋는 월남파병의 意義나 그 결과를 올바르게 인식하여야 할 것이다
이 달러들은 경제개발을 위해 필요한 외화 자금원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하지만, 베트남 전쟁에서 부상당한 2만여명의 파월용사에 대한 복지와 고엽제피해자들에 대한 보상은 오랫동안 잊혀져 왔다.
이 부분에 대해 명확한 해명이 있어야 한다.
베트남특수
8년여의 한국군 월남파병 기간중에 한국과 베트남 간에 주월한국군원조단의 지위에 관한 협정(1964.10), 한월항공운수협정(1967.9), 한월경제 및 기술협력에 관한 협정(1971. 6) 등이 체결되어 양국간의 경제협력관계가 더욱 밀접해졌다.
1965년 9월 처음으로 한국 기술자 42명이 사이공(호치민)에 파견되고, 국내 기업의 베트남 진출이 활발하게 전개되면서수많은 한국 기술자들이 베트남에서 일했다. 베트남에 진출한 국내 기업수는 1966년 9개 기업에서 1970년 56개 기업으로 늘어났다가 한국군이 철수하면서 줄어들었다.
1966~72년에 달러 수입은 군인 및 기술자 송금, 용역 및 건설군납, 특별보상지원 등에 의한 무역외수입이 6억 4,190만 달러, 수출 및 물품군납이 2억 1,560만 달러였다.
한국군의 월남 파병에 따른 경제적 이득은 직접적인 달러 수입에만 한정되지 않고 국내 인력상품의 동남아시아 진출, 특별 미국 국제개발국 차관 공여,각종 민간경제협력의 추진 등에도 기여함으로써 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 초반까지한국 경제의 성장에 큰 역할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