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치민과 목민심서
베트남 민족운동의 최고 지도자였으며 베트남 민주공화국 초대 대통령을 지낸 ‘베트남의 아버지’ 호치민(胡志明. 1890~1969). 1969년 사망한 호치민의 머리맡에는 생전에 애독했던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牧民心書)'가 놓여있다.
호치민은 독립운동가로 활동하던 시절 다른 소지품은 못 챙겨도 목민심서 만큼은 꼭 챙겼을 정도로 목민심서를 아꼈다. 덕분에 목민심서는 베트남 공무원들의 지침서로 채택되기도 했다.
다산은 이 책을 통해 관리의 청빈을 강조하고 있다. 목민심서의 2장 '율기육조(律己六條)'에서는 “청렴은 관리의 본분이요, 갖가지 선행의 원천이자 모든 덕행의 근본이니 청렴하지 않고서는 목민관이 될 수 없다”며 “자신이 쓰는 돈이 백성의 피와 땀으로 이뤄진 것이란 사실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1장 '부임육조(赴任六條)'에서도 “수행하는 사람이 가진 게 많아서는 안 된다. 청렴한 목민관의 행장은 겨우 이부자리에 속옷 그리고 고작해야 책 한 수레쯤 싣고 가면 될 것”이라며 청빈, 검소함 그리고 끊임없는 배움을 목민관이 지녀야 할 가장 기본적인 덕목으로 제시하고 있다. 심지어는 “부를 탐하는 수장은 그 아랫사람들까지 물들여 하나같이 축재만을 일삼게 되며, 이는 곧 국민의 피를 빨아먹는 도적떼와 같은 존재”라고 경계하고 있다.
목심심서를 자신의 몸처럼 아꼈던 호치민은 다산 정약용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했다. 호치민 국민이 있음으로 관(官)이 있다고 역설하며 철저히 국민들 속에 들어가 함께 살고자 했다. 호치민은 '3꿍정신'을 실천한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3꿍정신'의 첫째는 국민과 함께 산다는 꿍아. 둘째는 함께 먹는다는 꿍안. 세째는 함께 일한다는 꿍땀이 그것이다.
호치민은 사망할 때 지팡이 하나와 옷 두벌, 목민심서를 비롯한 책 몇 권만을 유품으로 남겼다.
호치민의 묘소는 호치민이 1945년 9월2일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바딩(ba dinh) 광장에 있다. 대리석을 사용해 러시아양식으로 지어졌다. 호치민의 시신은 방부처리된 상태로 유리관 내에 보관돼 있다. 지난달 10일 노무현 대통령이 한국 국가원수로는 처음으로 헌화했다.
목민심서는 목민관이 지켜야할 실천윤리를 밝히면서 관리들의 폭정을 비판한 다산 정약용(1762∼1836)의 대표적 저작. 다산은 부패상이 극에 달한 조선 후기 사회의 정치상황과 민생문제를 수령의 책무와 결부시켜 고발했다. 시대를 초월한 그의 애민사상은 「한국판 사회계약론」으로 주목받을 만큼 민주주의 세계관이 녹아들어 있다.
목민심서는 모두 12편 72조로 구성됐다. 다산이 19년간의 귀양살이를 마치던 해에 지어졌다. 자신이 경기도 암행어사로 나가 직접 목격한 지방행정의 문란과 부패상이 저술의 직접적인 동기가 됐다.
『오늘날 백성을 다스리는 자들은 오직 거두어들이는 데만 급급하고 백성을 부양할 바는 알지 못한다』
그는 백성들의 억울한 처지와 지배계층의 제한없는 특권에 대해 신랄히 비난하고 나섰다. 특히 부임·율기·봉공·애민등 4편에서 백성을 대하는 목민관의 기본자세에 대해 상세히 적고 있다.
그는 수령은 백성과 가장 가까운 관직이므로 덕행·신망이 있는 적임자를 임명해야 하며 수령은 언제나 청렴을 생활신조로 명예와 재리를 탐내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나아가 수령은 민중에 대한 봉*신을 기본으로 국가의 정책을 빠짐없이 알리고 민의의 소재를 상부관청에 잘 전달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전·호전·병전등 나머지 8개편에서는 토지 및 조세, 국방등에서의 국가개혁을 주장하면서 백성의 인간답고 풍족한 삶을 보장할 것을 주장했다. 「낡은 우리나라를 혁신하자」(신아지구방)는 그의 외침은 시대의 제약을 넘고자 하는 몸부림이었다. 베트남 독립의 아버지 호치민의 머리와 가슴을 움직였다는 사실은 시대를 뛰어넘은 다산의 선진사상이 읽혀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