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소의 게르니카 와 1937년 폭격에 살아남은 게르니카 가로수를 표현한 석판화)
2차대전이 발발되기 2년전 스페인의 프랑코 반군은 독일의 히틀러에게 반대파 자국민 살상에 대한 독일폭격기의 지원을 부탁하였다.
독일은 폭격기의 성능테스트와 앞으로 진행시킬 침략폭격을 위한 시험의 기회로 삼아 프랑코의 뜻을 따라주었다.
1937년 독일공군 루프트바페의 볼프람 프라이헤르 폰 리이트호펜 중령은 하잉켈111 폭격기와 도르니에(Do-17z) 폭격기 그리고 융커스 급강하 폭격기 편대를 몰고 스페인 북부 바스크지역 게르니카에 폭격을 퍼부었다.
4월26일 오후 근 3시간15분에 걸쳐 3000여개의 소이탄의 비를 뿌렸으며 인명이 보이는대로 기총소사를 가하여 잔혹한 살륙을 저질렀다.
이날의 루프트바페 조종사들은 하나같이 이러한 전쟁범죄의 만행에 대하여 양심의 가책도 없었다.
그저 1진 폭격대가 귀환후 2진의 출격을 나가는 폭격수들에게 돌아온 조종사들은 웃으면서 쉽군 쉬워 라고 웃으면서 이야기할 정도의 비정한 집단들 이었던것이다.
이날의 폭격은 그때까지 유래없던 공중폭격의 처참한 장면을 보여주었다.
주민7000여명중 1600 명이 사망하였고 1000여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스페인 의 화가 파블로 피카소는 이날을 분노하여 게르니카를 그렸다.
집과 건물이 불타고 사람들과 짐승들의 죽음과 울부짖음의 지옥같은 묘사는 스페인 독재자 프랑코의 지배욕에 의한 동족상잔의 발로였다.
또한 그것을 나중에 스페인에 대한 정치적인 계산을 가지고 만행을 저지른 독일의 히틀러는 앞으로 보여줄 유럽에서의 대량살륙전을 예고하였던 것이다.
하잉켈111(HE-111)이 인류에게 준 이미지는 그야말로 침략과 살상의 상징이었다.
게르니카 폭격을 시작으로 영국에 대한 집요한 폭격과 소련 레닌그라드,스탈린그라드 폭격등 가는곳마다 인류의 살륙을 자행하고 다녔다.
이 폭격기는 게르니카 폭격이후 독일군의 자만심으로 전쟁후기까지 계속 사용되었다.
그러한점은 한가지의 다행스러운 점으로 작용했다고 볼수 있겠다.
독일은 전쟁초부터 폭탄량을 대량으로 적재할수있는 4발형의 발동기를 가진 대형장거리 폭격기의 개발을 등한시 해온 결과 소련과의 전쟁에서 패할수밖에 없는 공군의 조건을 가지고 있었던것이다.
독일군의 소련침공에 따라 스탈린은 독일군에게 지푸라기하나 내어줄수없는 초토화정책을 실시하였다.
소련군의 중공업기자재 와 무기공장들이 일체 독일군의 수중에 떨어지는것을 허락치 않았다.
그래서 독일의 하잉켈 111 중형 폭격기의 짧은 항속거리가 훨씬 미치지 못하는 우랄산맥 너머로 모든공장을 뜯어 철도로 옮긴것이었다.
만약 독일이 전쟁초 부터 미국의 B-17 폭격기와 B-29같은 장거리 폭격기를 일찍개발 했었다면 독소전의 역사는 달라졌을것이다.
하잉켈111 로 시작된 게르니카는 이후 인류에게 참혹한 제2 ,제3 의 게르니카를 보여주었다.
인류는 스페인의 게르니카를 시작으로 2차대전 중의 유럽의 곳곳과 이후 한국 에서도 보았다.또한 1960~70년대의 인도차이나에서는 사상최대의 대규모로 보았고 최근의 코소보 와 르완다 ,소말리아 와 아프가니스탄 그리고 이라크에서도 누누이 보아왔다.
하잉켈111 로 시작되어온 게르니카는 다시는 그려져서는 안될 인류의 과제라 할것이다.
자료제공 : (주) 천년천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