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흥의 업적(?)-퍼온 글입니다.

건담0080 작성일 08.06.17 23:33:48
댓글 12조회 3,253추천 5

이 글은 개소문에서 한국전 당시에 중공군 개입 관련 글을 보고 여러 사이트에서 글을 모아 보았습니다.

* 한국전쟁 당시 유재흥의 과오와 책임 여부에 대한 진위는 지금에서라도 조사 규명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펌글 cafe.naver.com/booheong ]

우리는 역대 최고의 졸장을 꼽으라면 여러 장수를 꼽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이 장군을 능가할만큼 졸장은 없어보입디다. 자, 유재흥의 업적을 간단히 소개합니다.

 

1. 일본 육사 출신 친일파
생계형 친일 운운하지만, 전 기준을 하나로 봅니다. '알고 친일했냐? 모르고 친일했냐?' 일본 육사가 까막눈 모아서 가르치는 데도 아니고, 말 그대로 엘리트들 모아서 엘리트 교육시켜주는 데입니다. 말 그대로 유재흥..친일이 뭔지, 민족이 뭔지 아는 넘입니다. 뭐 일본 육사나와서 친일한 박정희, 유재흥같은 말종들도 있지만, 독립운동에 투신한 김경천 장군같은 분도 계시죠. 말 그대로 태생부터 말종입니다.

 

2. 제주 4.3 항쟁 학살의 주역!
대부분의 친일파들이 조국광복 이후, 친미 반공주의자로 둔갑했듯이, 유재흥도 다를 바 없습니다. 이승만 정권 시절 대령으로 활동합니다. 그리고 그 대표적인 전공이 제주도 4.3 항쟁의 학살 장본인이란 겁니다.
유재흥과 그의 직속부대만 해도 1949년 2345명의 `유격대` 를 살해했고, 1608명의 민간인을 살해했습니다. 제주도 인구를 단숨에 1/3로 줄여버린 제주 4.3 항쟁 학살의 주역 유재흥..근데 저항할 힘이 없는 자국 민간인에겐 이렇게 용감한 양반이, 적군에겐 왜 그리 졸전만 거듭한건지?


3. 의정부 전투에서 국군 제 7사단을 해체시켜버린 장본인!!

뭐 영천 전투의 영웅 운운해샀는데..같잖지도 않을 뿐입니다. 제공권을 장악당한 북괴군이 설령 영천을 장악했다해도, 무슨 수로 국군과 UN군의 보급선을 장악한단 말인지? 그리고 대구로 북괴군이 진출한다해도, 대구를 장악한다는 보장이라도 있는지?
당시는 심지어 경찰병력 수천명이 대구사수를 외치며 궐기했던 상황입니다. 뭐 원체 국군이 이긴 전투가 없다보니, '영웅' 하나가 반드시 필요했던 상황의 산물로 이해해둡시다.

 정작 웃긴 건 유재흥이 6.25 초반에 거둔 패전들을 다루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의 7사단이 승승장구하면서 영천까지 "뒤로 진격" 해왔을까요? 의정부에서 유재흥은 무려 자신의 7사단을 "해체" 시켜버리는 기염을 토해냅니다. 사단장일 땐 사단해체, 군단장일 땐 군단 2회 해체! 참으로 멋지죠?


4. 국군 2군단 해체의 장본인! 1.4 후퇴의 원인제공자!
 덕천에서 미 8군의 우익이던 유재흥의 제 2군단은 '해체' 되어 버립니다. 웃긴 건 중공군 38군과 42군이 유재흥의 병력을 둘러쌀 때까지 유재흥은 그걸 전혀 몰랐다는 것이죠. 방심하고 있던 국군 제 2군단 앞에 38군과 42군이 갑자기 꽹가리와 징을 두들기고 괴성을 지르며 나타나자, 당황한 제 2군단은 문자 그대로 자멸합니다. 아무리 승세에 있다지만, 제공권까지 완벽히 장악하고 있던 국군과 UN군이 중공군 수십만이 그들의 턱밑에 총검을 들이댈 때까지 전혀 몰랐다니..참으로 한심하죠? 뭐 그건 국군과 미군 전체 지휘관의 문제라고 말하고 싶겠지만, 웃긴 건 UN군이 2군단 괴멸 후에 터키 여단을 덕천으로 파견합니다. 비록 1개 여단으로는 중국군의 대군을 당해내지 못하고, 철수했지만, 그래도 터키여단은 조직을 유지한 채로 탈출에 성공합니다.
1개 여단은 무사히 빠져나오는데, 1개 군단은 깨끗이 군단해체..참으로 용장 밑에 약졸없죠?

결국 매카서(맥아더)는 크리스마스 대공세의 중지와 철수를 선언하고, 후퇴합니다. 그 와중에 미군 제 2사단은 중공군의 매복에 걸려 대패합니다. 결국 이 후퇴행렬은 서울까지 내어줬고, 이 서울을 내어준 날이 바로 1월 4일..고로 이 후퇴를 1.4후퇴라고부르게 되죠.


5. 국군 3군단 해체의 장본인, 군단장이 군단을 버리고 연락기 타고 도망가다!!
간단합니다. 인터넷에 국군 최대의 참패를 검색해보십시오. 곧바로 '현리 전투' 가 튀어나올겁니다. 그 주역이 바로 유재흥 입니다. 현리에서 유재흥의 3군단은 중공군에게 포위당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제공권과 보급, 화력에서 UN군과 국군은 절대 우위 속에 있었단 겁니다. 그리고 제 3군단의 전력은 거의 온전한 상태였다는 겁니다.

 그런데  유재흥은 무려 포위되자마자 곧바로 연락기타고 자신의 군단을 버리고 도망갔단 겁니다. 거기에 덤으로 더하자면, 항시 보급상태가 엉망이던 중공군은 제 3군단의 장비를 대량 노획해서 향후 전투에 유용하게 써먹었다는 겁니다. 군단장이 먼저 도망가버리자, 군단 수뇌부와 휘하 사단의 지휘부도 역시 군단장을 본받아 도망갔고, 결국 3군단은 전투 한번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모두 도망갔습니다. 중국군이 얘들을 가만 놔뒀을까요? 문자 그대로 괴멸적 타격을 입습니다. 웃긴 건 상당수 병력이 사로잡혔단 것인데, 뭐 국군포로를 인민군으로 재무장되어, 전선에 내보낸 것이나, 인민군 포로를 국군으로 재무장시켜 전선에 내보낸 건 양군 모두 동일하니, 알아서 상상하시길..껄껄. 참으로 쓰리쿠션을 넘어선 1석 8조쯤 되는건가요?

 

6. 그러고도 변명과 거짓말만 늘어놓는 유재흥
먼저 유재흥이의 변명을 간단히 들어봅시다. 유재흥은 휘하 사단장 최석에게 30연대를 보내서 요충지 오마치 고개를 점령하라고 했으나, 미군이 '관할권' 을 들먹이며 오마치에서 병력을 빼라고 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유재흥은 별수없이 병력을 뺐고, 덕분에 현리에서 포위당하여 군단이 해체됐다는 겁니다. 유재흥이 후에 국방부 장관까지 해먹은 관계로 국방부 편찬 '한국전쟁사'와 유재흥의 회고록에선 이 점을 들어, 유재흥은 책임없단 식으로 몰고갑니다.

그러나 정작 당시 30연대장 손희선은 이 주장에 대해 정면으로 반박합니다.
"저는 오마치 돌파 명령을 사단장으로부터 받은 적이 없습니다. 오마치 고개 북쪽 고지에 배치되어 군단의 철수를 엄호하도록 명령받았을 뿐입니다." 라고 합니다. 껄껄...냄새가 모락모락 나죠?

뭐 미군이 군단 버리고 연락기타고 도망가라고 유재흥 군단장님께 권해줬나보죠? 아~여기에 대한 변명도 있습니다.
바로 유재흥은 '도망을 간 것이 아니라, 연락기를 타고 작전 회의에 참석하러 갔다.' 는 것인데, 아니 군단이 포위된 마당에
군단장이 군단놔두고 작전회의? 파울루스는 뭐 작전회의 노이로제가 있어서 6군 포위 상황에서 포위망밖의 작전회의 안갔나보
죠? 그나마 이것도 거짓말이란 게 드러납니다. 백선엽 장군의 저서 '밴 플리트 장군과 한국군' 의 136페이지 (주) 12번에 보면
이때 유재흥은 작전회의에조차 참석하지 않았다고, 분명히 명시하고 있습니다.


7. 전시 작전권을 미군에 넘긴 장본인, 유재흥!
전선을 간신히 마무리 지은 밴 플리트장군은 현리전투 패배의 책임을 물어 5월 26일부로 국군 3군단을 해체시키고 국군 9사단을 미 10군단에, 국군 3사단을 국군 1군단에 각각 배속시켜 버립니다.  이로써 한국군 군단은 1군단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미 8군은 한국군의 독립성을 존중하는 뜻에서 육군 본부를 통해 한국군 부대를 지휘해왔으나 이후부터는 육본을 통하지 않고 국군 1군단을 직접 지휘하게 됩니다.  당시 제대로 된 방어 한번 펼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며 무질서한 후퇴를 하여 전체전선을 붕괴직전까지 몰고 갔던 3군단의 한심한 패전에 대해서 미 8군사령관 밴 플리트의 분노는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7-1. 밴플리트가 그렇게 열낸 또다른 이유
사실 제공권을 완벽히 장악하고, 보급능력의 우위를 확실히 점하고 있던 UN군과 국군이었기에, 설령 포위되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포위섬멸전' 의 모습은 나올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요충지 오마치 고개의 점령은 뼈아픈 것이었지만, 그것은 분명 '퇴로' 가 막힌 상황이었지만,  '아직 포위된 상황은 아니었다.' 는 것입니다. 그리고 휘하 3군단은 완벽한 전력을 갖추고 있었기에, 완벽하게 장악한 제공권과, 항공보급능력을 비롯한 각종 보급, 그리고 미군의 지원 등을 업고 싸웠다면, 충분히 한번 해볼만한 전력이었다는 겁니다.

이와 유사한 경우로, 가평 전투에서 영연방군은 국군 제 3군단보다 더 열악한 상황에 봉착합니다. 그때 영연방 27여단은 아예 완벽하게 포위를 당한 상황입니다. 하지만, 완벽한 제공권 장악에 따른 항공지원과, 항공보급 그리고 효율적인 항전에 힘입어 오히려 중공군의 공세를 격퇴시켜버리는 데 성공합니다. 이로써 대통령 표창까지 받게되죠. 참으로 대조적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유재흥이 한국군 망신 하나는 톡톡히 시켰죠?

                                       

8. 밴플리트와 유재흥의 '뻔뻔한' 대화
밴 플리트 : " 유장군, 당신의 군단은 지금 어디 있소 ? "
유재흥 :  " 잘 모르겠습니다. "
밴플리트 : "  당신의 예하 사단은 어디 있소 ? 모든 포와 수송장비를 상실했단 말이오 ? "
유재흥 : " 그런 것 같습니다. "
밴플리트 : " 유장군, 당신의 군단을 해체하겠소. 다른 보직이나 알아보시오 ! "

                          

9. 이래놓고 국방부 장관까지 역임, 거기다 지가 넘겨준 전시작전권 환수 반대까지 하는 유재흥
이래놓고 고개 뻣뻣이 쳐들고 국방부 장관까지 해먹습니다. 거기에 얼마 전에 뉴스에 다시 한번 고개 내밀더군요. 지가 3군단 해체시켜서 전시작전권 넘겨준 인간이, 뭘 잘했다고 전시작전권 환수 반대에 고개를 쳐드는건지? 전시작전권 환수의 찬반 문제는 둘째 치고, 지 책임으로 그래 됐으면 자결로서 책임지진 못할망정, 적어도 조용히 고개 파묻고 참회하며 살아야 하는 게 인간의 도리 아닌지?

 

10. 결론
원균이 전쟁 끝나고 병판이라도 시켜달랬는지? 하지만 유재흥은 박정희 밑에 들어가서 또다시 고개 빳빳이 쳐들고 지금도 살아있다.
파울루스는 제 6군을 말아먹었지만, 포위되자마자 도망은 안갔다. 하지만 유재흥은 자신의 군단이 포위되자마자 연락기타고 곧바로 도망가버렸다. 그것도 전력이 온전한 자신의 군단을 버리고

대체 사단장일 땐 사단 해체시켜버리고, 군단일 땐 군단을 2번이나 해체시켜버리는 명장이 세상 천지에 어디 있을지? 그것도 각각 유재흥의 2군단, 3군단 패전은 한국전 전략 자체에 심각한 차질을 줬다는 점. 그것도 한번도 아니고, 두번이나... 유재흥

 

현리 전투관련 유적지를 돌아보시며, 회고하시는 우리의 유재흥 장군.

 

121371309592355.jpg

19대 장관 유재흥

 

재임기간 : 1971. 8.25 ~ 1973.12. 3
주요경력 : 주이탈리아대사관 대사('67) / 대통령안보, 국방담당특보('70)
한국참전단체총연합회 초대 회장('97)

 

"연합사 해체 반대" 227개 단체 1000만 서명운동


 121371313190795.jpg

선진화국민회의와 뉴라이트전국연합 등 227개 단체들은 29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한미연합사령부 해체 반대 1000만 명 서명운동’을 시작한다고 밝혔다. ‘1000만 명 서명운동’은 한국기독교총연합회와 예비역 장성모임인 성우회, 재향군인회 등 11개 단체가 12일 시작한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논의 중단 촉구 500만 명 범국민서명운동’을 확대한 것이다.

서명운동본부 공동대표는 김성은 이상훈 전 국방부 장관과 박세직 재향군인회 회장, 이명현 전 교육부 장관, 김진홍 목사 등 17명이 맡았고 고문으로는 유재흥 전 국방부 장관과 이회창 현승종 전 국무총리, 장경순 전 국회의장, 송월주 스님 등 33명이 참여했다.

이날 기자회견에는 김성은 전 장관, 정기승 전 대법관, 정래혁 전 국회의장, 장경순 전 국회 부의장, 황인성 현승종 전 총리, 이광선 개신교 예장통합 회장과 참가단체 회원 등 모두 300여 명이 참석했다.

 

현리전투 전투기간 : 1951. 5. 16 ~ 5. 22 

현리 전투는 중공군의 제2차 춘계공세 당시, 인제 남방 가로리에서 가리봉 간을 방어 중이던 국군 제3군단(제3, 제9사단)이 중공군 2개 군(제1, 제27군)과 북한군 3개 사단(제6, 제12, 제32사단)의 공격을 받고 방어에 실패한 후 하진부리 부근까지 후퇴하게 된 철수작전이다.

중공군의 제2차 춘계공세가 시작되던 5월 16일 밤 국군 제3군단은 인제 동쪽 가로리-가리봉 사이의 약 26Km에 달하는 정면에 국군 제9사단 및 제3사단을 좌우로 배치하고 있었다. 이때 군단은 예비사단을 보유하고 있지 못하였다.

현리는 군단 지역 내의 유일한 통신 및 보급기지이면서도 험준한 산악지대로서 도로망이 극히 제한되었다. 따라서 좌인접 군단인 미 제10군단 지역을 연결하는 주보급로도 단 하나의 애로만이 있을 뿐이었다.

5월 16일 밤 공산군의 공격이 시작되었고, 미 제10군단의 우익 사단인 국군 제7사단과 제5사단이 미처 싸울 틈도 없이 삽시간에 무너져 후퇴하자, 공산군은 그 돌파구를 이용하여 국군 제3군단의 제9사단과 제3사단의 후방으로 침투하여 상남리 부근에 있는 오마치 고개를 점령, 퇴로를 막아 버렸다.

이렇게 되자 5월 17일 새벽2시 군단의 좌일선이었던 제9사단이 진지를 버리고 한석산으로 후퇴하게 되었고, 우일선의 국군 제3사단은 어쩔 수 없이 버티던 진지를 버리고 오전 8시부터 현리를 향하여 철수를 개시하였다.

유일한 퇴로를 차단당한 국군 제3군단은 전방의 압력에 밀려 산악을 따라 오합지졸이 된 채 60Km를 후퇴한 후 하진부리 부근에 집결하여 부대를 재편성하게 되었다. 
 

후퇴과정에서 병사들은 남보다 먼저 이곳을 빠져나가기 위하여 경쟁하였고, 차량은 버려졌으며, 어느 지휘관 하나도 오마치를 점령하고 있는 적에게 공격을 가하자고 건의하지 않았다. 현리 전투로 국군 제3군단은 5월 26일부로 해체되었으며, 국군 제3사단은 국군 제1군단에게, 국군 제9사단은 미 제10군단에게 각각 배속되었다. 이때 북한군과 중공군은 속사리와 강릉 지역에 이르는 큰 돌파구를 형성하게 되었다.

 

[펌글] 현리 전투라...

너무 비참한 전투라 말도 못할 정도죠
저의 아버지도 그곳에 근무한적이 있었는데..83년도 그때도 아직 현리전투의 얘기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기억이 납니다.
어떤 산에서 국군이 막 도망가니까 밑에서 중국 저격병들이 토끼사냥하듯 한명씩 죽여댔다고 했다던가...
하지만 전 이같은 사태가 지금이라도 나오지 않을까? 가장 걱정합니다.
강한 군대는 포위가 됬을때 진가가 나타나는 법입니다.
어떤 분이 미군이 겉보기에는 군기가 빠진거 같다고 하셨는데... 군기의 개념이 우리나라 군대와 미군은 틀림니다.
백인 특유의 합리성(이거 미국에 오래 사신분들은 이해를 하실겁니다.) 매우 멍청하게 보이지만 그들은 실상 매우 합리적이고 논리적입니다. 그게 지금 미국의 힘이지요
제가 주장하는 것이 바로 이점입니다. 우리나라 군대에는 합리성이 많이 결여 되어 있습니다.
군대는 깡이다. 군대는 지랄이다. 단순 무식을 강조하는한 한 순간의 승리는 쟁취할수 있으나 불 필요한 희생은 많고 장기전이 되면 결과는 뻔합니다. 이건 부대 내에서만 고칠수 있는 것이 아니고 국민 전체의 의식 개조가 필요합니다.

원칙을 지키고 질서와 침착성이 있어야만 훌륭한 군인이 될수 있는 것입니다.
구 일본군이 바로 지금 우리의 모습같다는 생각이 엄청나게 드는 이유가 바로 이점입니다. 구일본군은 교전시에도 항상 피해가 상대국보다 컸습니다. 이긴 전투라도 말이죠. 그렇다고 그들의 사기가 낮았다거나 우리 나라 군대보다 덜맞았다고 보이진 않습니다. 하지만 겉보기에는 그렇게 군기가 잡힌 군대처럼 보였던 일본군도 실상은 보여주는 군대였지 써먹을 수 있는 군대는 아니었습니다. 혹자는 미군의 압도적 물량공세에 당했다고 주장하실지도 모르지만 현리 전투만큼 질서잡히지 않은 군대는 어떤 무기도 소용없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도 없을 것입니다. 어떤 참전 용사분이 하신 말씀 전 공감합니다. 이건 우리나라 군대가 훈련이나 장비가 부족한게 아니라 기본적인 성격차체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합리성과 침착성, 그리고 이런 부분이 전 한국의 구석구석에 스며들때 우리 한국군도 강해질 것입니다. 너무 글이 추상적이라거나 우리를 너무 과소평가 하는게 아니냐고 하실지도 모르지만 제말 제글을 심사숙고해서 읽어주십시요. 저야 말로 한국군이 세계최강이 되었으면 하고 바라는 사람입니다.
저희 아버지께서 하신말씀 군대는 항상 세계최강이어야 한다. 2등은 곧 패전과 죽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건담0080의 최근 게시물

밀리터리 인기 게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