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스마르크의 전력과 특징에 대해 말해보면
설계는 1934년에 시작했으며, 배수량은 영국과 합의된 35,000톤을 넘어 42,600톤까지 증가시켰다. 1936년 7월 1일에 독일 함부르크의 블롬 + 포스 회사에서 설계와 건조를 시작해 1939년 2월 14일에 진수, 1940년 8월에 취역했다.
배수량만을 보고 따진다면 당시 세계 최대의 전함이었다. (야마토와 아이오와등이랑 비교는 시대가 틀린 전함이기에 비교
하는 것은 참 어리석은 짓이다. 참고로 비스마르크 취역당시 일본이나 미국이 보유한 전함으로 비교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단 비스마르크는 대공 사격 관제나 장갑판의 배치가 문제 였다. 하지만 비스마르크가 전쟁을 한 활동구역은 발트해이다.
발트해는 잦은 안개와 구름이 항상 많이 끼는 자연적인 상황때문에 근접전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기에 비스마르크는
당연히 설계단계에서 원거리 포격전보다는 근접전에 신경을 쓰고 만들었던 전함이다. 그결과 원거리 보다는 근거리 전으로 만든 전함이다.
전투와 격전, 그리고 침몰
영국의 보급선을 끊기 위한 연습 작전(Unternehmen Rheinbung)은 처음에는 전함 비스마르크 호, 중순양함 프린츠 오이겐, 순양 전함 사른호르스트(Scharnhorst)와 그나이제나우(Gneisenau)와 함께 참가할 예정이었다. 즉, 전함 1척, 중순양함 1척, 순양전함 2척으로 구성된 강력한 함대였던 것이다.
그러나, 작전 참가 전에 샤른호르스트는 기관 고장으로 인해 항구에 머무를수 밖에 없었으며 그나이제나우 호는 영국 해군 뇌격기의 공격으로 추진축이 손상되어 수리를 위해 항구에 머무를수 밖에 없었다(이 수리에는 6개월을 필요로 했다.). 그 때문에, 당초 전함 1척와 중순양함 1척, 순양전함 2척으로 구성되었던 함대는 전함 1척과 중순양함 1척으로 줄어들수 밖에 없었다.
비스마르크 전대는 1941년 5월 18일에 출항했다. 그러나 이 전대의 출항은 영국 해군이 탐지하고 있었다. 스카케라크 해협에서 포착되었고, 또한 스웨덴 해군 항공 순양함 고트란트가 발견한다. 고트란트는 수시간동안 비스마르크를 추적했지만, 스카케라크 해협 통과후 잃어버렸고 이를 영국군에게 통보했다.
비스마르크 전대는 결국, 영국 공군의 정찰기에게 발각되어 버린다. 21일에는 영국 해군 순양함 HMS 노포크(Norfolk)와 HMS 서포크(Suffolk)가 발견한다. 영국 함대는 순양전함 HMS 후드(Hood), 전함 HMS 프란스 오브 웨일스(Prince of Wales), 항공 모함 HMS 빅토리어스를 주력으로 하고 있었다.
1941년 5월 24일 이른 아침에 프린츠 오이겐과 함께 덴마크 해협을 항해하고 있던 비스마르크에 전함 후드와 프린스 오브 웨일스로 이루어진 영국 해군이 남쪽에서 접근했다.
그 후, 프린스 오브 웨일스는 사령탑이 파괴되어 함장 외 1명을 제외한 사령탑 장교와 부사관 전원이 사상했으며, 홀수선 아래에 비스마르크의 주포 세발이 명중되어서 침수되었다. 프린스 오브 웨일스는 전투 해역을 벗어났다. 비스마르크도 프린스 오브 웨일스의 주포 세발을 명중당해 2,000톤의 해수가 유입되고 있었다.
HMS 후드 침몰의 소식에 영국 해군은 거의 모든 함대를 비스마르크 침몰에 집중하기로 한다. 본국 방어 함대는 물론, 지중해 함대 소속인 순양 전함 HMS 리나운과 항공모함 HMS 아크 로열(Ark Royal)까지 불러 온다. 한편 비스마르크는 프린츠 오이겐과 헤어져 다른 루트로 프랑스로 향하게 된다.
5월 27일, 영국 해군 전함 HMS 킹 조지 V세와 HMS 로드니(rodney), 중순양함 HMS 노포크(norfolk) 및 HMS 덜시치어(dorsetshire)와의 88분간의 격전으로 인해 비스마르크는 약 400발의 포탄과 3발의 어뢰 공격을 받았다. 잔여 연료도 공격을 회피할 만큼은 없었기 때문에 비스마르크는 자침을 선택한다. 비스마르크는 오전 10시 40분에 침몰한다. 드셋트샤는 승무원 구조에 임했지만, U-보트가 접근하자 구조를 단념했다. 결국 승무원 2,206명중 구조된 승무원은 115명이었다.
다행히, 비스마르크에 있어서 다행은 영국 함대가 근거리 포격전으로 시종 일관 했기 때문에 원거리 포격전은 발생하지 않았다. 또한, 기대 이상으로 장갑이 성능을 발휘를 해 결국 '자침'을 선택했다.
비스마르크의 선체는 1989년 6월 8일에 발견되었다. 발견자는 타이타닉 호의 탐사를 수행한 고고학자 로버트 발라드이다. 비스마르크는 프랑스 해안 서쪽 650킬로미터와 4,700미터의 해저에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함체 분석 결과 포격과 수뢰의 타격에 의한 광범위한 파괴와 자침을 위해 열린 구멍도 확인되었다. 발라드는 타이타닉의 경우에 발표 후 발생된 유품 등의 도난을 우려해 정확한 장소는 발표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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