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해병대 이야기 - (펌) 1부

전남대 작성일 08.12.03 01:4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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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마(釜馬)민주항쟁 투입 해병대의 ‘아름다운 휴가’


“시민들이 때리면 그냥 맞아라, 절대 시민에게 손대지 말라” 
  
똑같은 계엄군이지만 진압방식은 너무도 달랐다. 1980년 5월 광주의 비극은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폭력에서 비롯됐다. 반면 그보다 7개월 전인 1979년 10월 부마민주항쟁을 진압하기 위해 부산과 마산에 진주한 해병대는 비폭력으로 일관해 시민들의 호응을 얻었다. 군사기밀로 묶여 있는 부마항쟁 당시 해병대의 ‘활약상’을 처음 공개한다. 
 

부마항쟁 당시 부산에 진주한 계엄군.  
5·18민주화운동을 그린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 관객의 정서를 가장 자극하는 장면은 공수부대의 유혈진압 장면이다. 비록 발포 경위와 희생자 수를 둘러싼 논란이 있긴 하지만, 육군 특전사 소속 공수부대원들의 잔혹한 폭력과 집단 발포로 많은 시민이 죽은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각종 자료와 기록이 이를 뒷받침하며, 김영삼 정부 시절 진행된 이 사건에 대한 검찰 수사와 재판을 통해서도 확인된 바 있다.

이렇듯 5·18은 국민의 가슴에 군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심어놓은, 창군(創軍) 이래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다. 그런데 그보다 약 7개월 전인 1979년 10월에 발생한 부마민주항쟁 당시 시위진압군이던 해병대가 보인 태도는 그와는 딴판이었다. 부산과 마산에 투입된 해병대원들은 철저하게 비폭력 노선을 지켰다.

그간 해병대의 부마항쟁 시위진압 실태는 일반에 알려지지 않았다. 뒷날 광주의 비극을 일으킨 공수부대는 부마항쟁 때도 투입됐는데, 그때도 시위진압 방식에서 해병대와 달리 폭력적인 양태를 보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해병대와 공수부대는 왜 그토록 달랐던 걸까.


‘건방지다’고 개머리판으로 때려 뇌수술

널리 알려졌다시피 부마항쟁은 10·26사태의 도화선이었다. 이 사건에 대한 처리를 놓고 온건론을 내세운 김재규와 강경론을 주장한 차지철 사이에 불신의 골이 깊어진 가운데 차지철을 두둔하는 박정희 대통령을 김재규가 총으로 시해했기 때문이다.

1979년 10월16일부터 20일까지 전개된 부마항쟁의 신호탄은 1979년 8월11일 경찰이 신민당사에서 농성하던 YH무역회사의 여공들을 강제 해산시킨, 이른바 YH사건이었다. 이어 9월8일 김영삼 당시 신민당 총재에 대한 총재직 정지 가처분 결정과 10월4일 김 총재의 의원직 박탈로 정부에 대한 국민의 불신과 분노는 극에 달했다.

10월15일 ‘독재타도’ ‘유신철폐’를 골자로 한 민주선언문이 부산대학교에 배포되고, 16일엔 이에 동조한 부산대생 5000여 명이 경찰의 저지선을 뚫고 교문을 뛰쳐나온다. 이후 동아대학생 1000여 명과 시민들까지 가세해 시위대는 순식간에 도심을 장악하고, 시위대를 막기 위해 경찰 3400여 명이 최루가스를 뿌리며 진압에 나섰지만 속수무책이었다.

그날 밤 시위인파는 5만여 명으로 불어났고, 폭발한 민심(民心)은 파출소와 공화당 지부 사무실 등 공공건물에 방화하며 이튿날인 17일까지 시위를 계속했다. 정부는 긴급히 육군 2관구사령부(현 53사단) 병력을 투입했지만, 정상만 사령관의 지프와 호위차마저 습격을 당할 정도로 시위는 격렬했다. ‘단 한 방울의 물도 새나가서는 안 된다’고 할 정도로 완벽한 통제를 자랑하던 유신체제였기에 부마항쟁의 충격은 대단한 것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18일 새벽 0시를 기해 부산지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박희도 준장이 지휘하던 1공수여단과 최세창 준장의 3공수여단, 박구일 대령이 지휘하는 해병대 1사단 7연대를 투입한다. 마산에는 20일 정오를 기해 위수령을 선포한다.

이후 시청과 역 등 주요시설을 장악한 1여단과 3여단은 탱크와 장갑차를 앞세워 시위대를 진압한다. 특히 이들 공수부대 장병들은 이후에도 총기에 착검을 하고 트럭을 이용해 부산대와 동아대를 하루 종일 오가며 학생들과 시민들을 위협한다. 단순히 심리전 차원만은 아니었다는 게 당시 목격자들의 증언이다.

당시 현장에 있었다는 송기석(56)씨는 “얼굴에 시커멓게 위장 크림을 바른 공수부대원들이 참나무를 깎아 만든 몽둥이로 시민들을 구타했다. 20, 30대 청년들은 길을 걷다가 그들과 마주치면 아무 이유도 모른 채 맞아야 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실제로 당시 31세이던 전병진씨는 서면 한독병원 앞을 지나다가 ‘건방지다’는 이유로 공수부대 장교가 휘두른 M16 소총 개머리판에 머리를 맞아 뇌수술까지 받아야 했다. 이 사건은 당시 지역 언론사에도 제보됐지만, 계엄령하에서 철저히 덮여 있다가 김영삼 정부 출범 후 진상조사를 통해 밝혀졌다.



맞아도 묵묵히 ‘무력(無力)행진’


5·18민주화운동 당시 진압군인 공수부대원들이 한 시민을 곤봉으로 구타하고 있다.  
이처럼 공수부대의 활동상에 대해선 어느 정도 알려진 반면 해병대가 어떻게 시위진압을 했는지는 지금껏 알려지지 않았다. 단지 해병대 1사단 7연대가 부산대학교를 주둔지로 삼았다는 사실만이 공개됐을 뿐이다. 관련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해병대의 진압과정은 충정훈련으로 단련되고 최루탄으로 무장한 공수부대와는 매우 달랐다.

당시 군 작전상황에 대한 기록은 아직 공개되지 않고 있다. 기록물 존안(存案) 당시인 1980년 ‘향후 30년 동안의 기밀’로 분류돼 2010년에 빛을 볼 예정으로 육군 문서보관소에서 먼지만 들이켜고 있다.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 학술과장인 이동일씨는 “광주 민주화운동과 달리 부마항쟁에 대한 군 관련 기록은 전혀 공개된 바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당시 계엄군으로 참여한 해병대 관계자들과 현장에서 지켜보던 시민들의 의견을 종합해보면, 3공수여단의 대규모 병력과 달리 해병대는 7연대 73대대라는 소규모 병력이 계엄 1진으로 투입돼 시위진압에 나섰다. 7연대 71대대와 72대대는 10월26일 수영비행장 투입 직후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을 맞아 지역 관공서와 부산대로 이동했다.

해병대는 공수부대의 강경진압과는 달리 시위진압시 학생들과 시민들이 던진 벽돌과 돌멩이에 맞아 피를 흘려도 묵묵히 ‘무력(無力)행진’으로만 시위대를 밀어냈다. 제일 앞줄은 간부와 병장이, 두 번째 선은 상병이, 그 뒤로 일병, 이병이 서서 총기 멜빵끈으로 서로 팔을 동여맨 채 시위대에 대응했다. 앞줄이 돌에 맞아 쓰러지면 뒷줄이 앞으로 나섰지만, 어떠한 경우에도 이등병은 앞에 세우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소대장으로 현장에 투입됐다는 김동일(53)씨는 “전경은 말할 것도 없고 육군도 시위진압훈련을 해왔지만, 우리 해병대는 한 번도 진압훈련을 해본 적이 없어 그런(몸으로 때우는) 방식이 최선이었다”면서 “총기를 뺏기지 않기 위해 멜빵끈을 최대한 늘려 옆 동료와 팔을 동여매고 무조건 전진만 했다”고 회고했다.

학생시위대의 돌에 맞아 피를 흘리면서도 해병대원들이 계속 전진하자 나중엔 주변의 시민들이 나서서 시위대를 말리기까지 했다. 당시 박구일(뒷날 해병대사령관 역임) 7연대장은 “해병대는 국민의 군대다. 시민들이 때리면 그냥 맞아라. 절대 시민들에게 손대지 마라. 다만 총은 뺏기지 마라”는 지시를 내렸다. 박구일 연대장이 장병들에게 직접 정신교육을 했던 내용은 해병대 예비역들 사이에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다. 박구일씨는 후에 14대 국회에 진출, 민자당 전국구 의원을 거쳐 1992년 국민당으로 당적을 옮겼다. 박 전 의원은 기자의 거듭된 요청에도 당시 사건에 대한 인터뷰를 거부했다.

대학생으로 시위대에 참여했다는 김현숙(48)씨는 “당시 학생들 사이에서는 ‘맞기만 하는 해병대와는 재미가 없어 시위를 포기했다’는 우스갯소리도 나왔다”고 전했다.


시민들이 빵, 우유 건네

10월20일 마산과 창원지역에 내려진 위수령으로 505명이 연행되고 59명이 군사재판에 회부(부산에선 1058명 연행, 66명 군사재판 회부)되는 것을 끝으로 부마민주항쟁은 일단락됐다. 10·26사태 직후 공수부대 1여단과 3여단은 부산에서 철수했지만, 해병대는 남아서 계엄작전을 계속했다. 주된 작전은 ‘위민 및 선무활동’이었다.

10월27일 소대별로 부산역과 시청 등 관공서로 이동한 해병대는 건물 인근에 있는 싸리나무를 잘라 빗자루를 만들어 오전, 오후 매일 2시간씩 주둔지 건물 주변과 골목길 등을 청소했다. 특히 해병대 1사단의 의전행사 담당부대인 32대대(일명 99대대)로부터 근무교대 의장식을 전수받아 시민들의 이동이 잦은 출·퇴근 및 낮 시간대에 집중적으로 선보였다. 국기 게양식과 군가를 우렁차게 부르게 행진하는 해병대원들의 구보 광경도 시민들의 눈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시위대가 무기로 사용하기 위해 뽑아놓은 가로수 받침대도 제자리로 돌아갔다. 도심 교통정리도 해병대의 몫이었다.

이쯤 되자 시민들은 계엄군인 해병대를 신뢰하기 시작했고, 이들이 군복을 입고 버스를 타거나 대중목욕탕을 찾을 때 무료로 이용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열흘 전 시위학생들에게 우유며 음료수, 빵 등을 나누어주던 시민들이 그때부터는 해병대원들에게도 똑같은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유신독재의 먹구름이 걷히며 민주주의 햇살이 부산 일대를 환하게 비추었다.

당시 부산역 주변에서 술집을 운영했다는 박경미(64)씨는 “계엄령이 내려져 밤 10시면 통금이었는데 고위 공무원들로 보이는 손님들이 돌아가지 않고 난동을 피우는 일이 종종 있었다”면서 “이럴 때면 해병대에 신고해 이들을 쫓아내곤 했다”고 말했다.

“여러 번 신세를 져서, 집으로 가기 전 경계근무를 서고 있는 해병대 초병에게 술과 안주를 건네곤 했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 반응도 없었다. 한번은 바지주머니 속에 술병과 안주를 집어넣는데도 미동조차 하지 않더라. 내심 ‘이게 바로 해병대구나’ 하고 감탄했다.”

당시 부산시청에서 공무원으로 근무했다는 강민호(61)씨가 들려준 얘기도 비슷하다.

“해병대가 오기 전에는 수송, 보급 등 육군 기간병들이 주둔했다. 해병대는 이들과 달랐다. 국기게양식과 경계근무, 아침 구보 등 하나부터 열까지 절도 있는 모습을 보여 공무원들, 특히 여직원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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