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대대 소대장으로 계엄임무를 수행했다는 박용감(53)씨는 “시민들에게 인기가 좋기는 좋았던지, 오토바이 뒤에 해병대 깃발을 꽂은 채 환호하면서 우리 주위를 빙빙 돌던 시민들도 있었다”고 전했다.
“한번은 병사들이 칼같이 다려 입은 얼룩무늬 위장복을 입고 2시간 동안 꼼짝도 않고 경계근무를 서고 있는데, 여학생들이 지나가면서 인형인 줄 알고 눈을 찌르기도 했다. ‘귀신 잡는 해병’이라지만, 국민 앞에 서면 한없이 순한 어린 양이 됐다.”
이처럼 계엄군이라고는 전혀 믿기지 않는 평화스러운 위민활동에 해병대에 대한 시민들의 신뢰와 자랑스러움은 깊어갔다. 특히 절도 있고 패기 넘치는 해병대원을 바라보는 젊은 여성들의 눈길이 예사롭지 않았다.
광주가 시민과 계엄군 간 불꽃 튀는 총포탄의 ‘화려한 휴가’지였다면, 부산은 시민과 계엄군 간 불꽃 튀는 사랑의 ‘아름다운 휴가’지였다. 실제로 부산에서는 계엄군과 한 여성이 사랑을 꽃피워 결혼에 골인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해병대 김모 소위는 박 대통령 시해 다음날인 10월27일, 주둔지이던 부산대를 떠나 한 관공서에 주둔하게 됐다. 준수한 외모의 김 소위는 이듬해 2월 철수하기 전까지 박구일 연대장의 지침에 따라 위민활동을 하다가 그곳에서 근무하던 A씨를 만났다. 이후 포항으로 원대복귀한 김 소위는 외출·외박을 나갈 때마다 A씨와 만나 사랑을 쌓았고 마침내 결혼에 이르렀다.
김 소위의 동기생들과 주변 인물들을 수소문한 끝에 9월말 당사자인 김 소위를 어렵게 만날 수 있었다. 2001년 소령으로 예편했다는 그는 자신의 ‘아름다운 휴가’에 대해 한마디로 “우연이자 행운이었다”고 표현했다.
부마항쟁 당시 계엄군 1진으로 부산대에 주둔한 해병대는 7연대 73대대였다. 김 소위가 소속된 7연대 71대대는 2진으로 72대대와 함께 10월26일 수영비행장에 주둔하다가 부산대로 옮긴 뒤 이듬해 2월 철수했다. 하지만 김 소위는 1진 투입 전 73대대로 배속됐다.
“계엄군 투입일에 앞서 당직근무를 섰다. 이튿날 오전 근무취침을 하려는데 중대장이 급히 찾더니 소대원들과 함께 출동대기를 명령했다. 하루 종일 내무반에서 대기했는데, 밤 11시경 중대장이 불러 ‘73대대에 배속됐으니 그곳으로 이동하라’고 지시했다. 아무 영문도 모른 채 무작정 73대대에 합류했다.”
차비 안 받는 버스 안내양
그는 “당시 소대장은 인접 중대에도 많았고, 우리 중대에도 여럿 있었는데 하필 내가 73대대로 배속돼 투입된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던 것 같다”고 회고했다. 끝내 실명을 밝히지 않은 그는 결혼에 이르게 된 구체적인 경위와 연애 스토리에 대해서도 입을 다물었다. 그는 “아무리 우리가 그곳에서 잘하고 시민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다고 해도, 지금 사람들은 계엄군 투입 자체를 좋게 보지 않는다”면서 말을 맺었다.
1980년 2월 철수 전까지 4개월간 계엄군으로 부산에 주둔했던 해병대 1사단은 그해 5·17 비상계엄 전국 확대조치에 따라 또다시 대구(연대본부, 21대대), 마산(23대대), 부산(22대대)에 상주하게 된다. 하지만 이때는 7연대가 해안방어부대로 이탈하고 2연대가 계엄 임무를 맡는다. 한편 광주에는 3·7·11여단 등 공수부대가 주력군으로 투입된다.
광주가 공수부대의 강경진압과 시민군의 반발로 피비린내가 진동했던 데 반해 해병대 1사단 2연대가 투입된 대구, 마산, 부산은 상대적으로 평온했다. 시민들의 시위는 광주 못지않게 격렬했지만 계엄군의 대응방법이 달랐다. 정행원 2연대장은 부마항쟁 당시의 박구일 7연대장과 마찬가지로 “시민과 학생들이 때리면 그냥 맞아라. 절대 그들을 자극하지 마라”는 지침을 내렸다.
당시 2연대 작전주임으로 현장에 있었던 김현기 예비역 대령은 “해병대는 국민의 군대다. 국민이 돌 던지며 때린다면 맞는 것이 당연하다. 국민보다는 우리가 더 많은 피해를 봐야 한다는 생각으로 계엄작전에 임했다”면서 “부마민주항쟁 당시 닦아놓은 해병대의 위민정신과 평소 체계적인 훈련으로 쌓은 해병정신 덕택에 큰 탈 없이 작전을 끝마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때도 부마민주항쟁 진압 당시 톡톡한 효과를 본 무력(無力)행진이 우리의 유일한 진압방법이었다”고 덧붙였다.
그는 광주민주항쟁 당시 집단 발포와 관련된 ‘자위권 발동’ 논란에 대해 “최근 광주 민주화운동의 진상을 규명하면서 ‘자위권 발동’에 대한 명령과 수용 여부가 공수부대와 해병대의 차이로 비쳐지고 있지만, 해병대에도 분명 ‘자위권 발동’이라는 용어는 존재했다”고 밝혔다. 그는 “다만 우리는 6·25전쟁 당시 강원도 양구의 도솔산 전투에서 24개의 목표고지를 점령함으로써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하사받은 ‘무적해병’이라는 명칭과 한국군 최초의 상륙작전인 통영상륙작전을 보고 ‘뉴욕타임스’ 기자가 붙인 ‘귀신 잡는 해병’이라는 칭호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을 뿐”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