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마항쟁 계엄작전에 참여했다는 또 다른 관계자도 “‘해병대는 국민의 군대다’ ‘해병대의 역사적 전통이 나 때문에 더럽혀져서는 안 된다’는 의식이 당시 대원들 사이에 깊이 자리 잡고 있었다”면서 “해병대의 성공적인 진압 작전은 이를 듣고 생활하며 훈련해온 장병들이 위기 때 보여준 좋은 사례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아직까지 문서로 정리돼 보존되거나 언론을 통해 드러난 적은 없지만, 부마민주항쟁과 5·18계엄 당시 보여준 해병대의 위민정신은 지금도 후배 해병대원들에게 구전(口傳)되고 있다”고 말했다.
해병대 예비역들의 증언에는 자화자찬도 섞여 있는 듯싶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한 육군 예비역의 증언을 들어보면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다.
“1980년대 초반 친구인 해병대 장교와 함께 부산에 간 일이 있다. 그런데 버스 안내양이 나한테는 차비를 받으면서 해병대 친구의 차비는 한사코 받지 않는 것이었다. ‘야, 왜 네 차비는 안 받는 거냐?’ 하고 물었더니 친구는 멋쩍게 웃음만 짓고 아무 대답도 안했다. 버스 안내양도 마찬가지였다. ‘부산에서 해병대가 인기가 좋기는 좋구나’ 하는 느낌이 확 왔다.”
10월12일을 시작으로 11월24일까지 부마민주항쟁 28주년 행사가 부산과 마산에서 성대히 열린다.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 이동일 학술과장은 광주와 달리 부산과 마산의 시위진압 과정에서 사망자 없이 항쟁이 마무리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부마항쟁 당시에도 시위가 아주 격렬했다. 주요 관공서, 방송국이 시위대의 공격을 받았다. 하지만 광주와 같은 비극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 배경은 우선 지형적 여건의 차이다. 광주는 도로 몇 곳만 봉쇄하면 완전히 고립되고 통제된다. 그러나 부산과 마산은 바다를 등지고 있어 완전 통제란 불가능하다. 따라서 시위진압에도 한계가 있다. 또한 ‘계엄 상황에서 지속적으로 군이 투입됐더라도 시위나 저항이 계속됐느냐’ ‘진압과정에서 대치하는 쌍방이 어떤 폭력을 수반했느냐’에 따라 양상은 크게 차이가 났다. 게다가 군 통수권자의 차이도 있다. 부마항쟁 와중에 박 대통령이 시해된 것도 큰 변수였다. 만약 통수권자가 발포 명령을 내렸다면 양상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3공화국이 저물어가던 시기. 박 대통령은 부산과 마산의 소요사태에 격노했다.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부산의 소요사태를 시찰했다. “독재타도! 유신철폐!”를 외치는 시위대를 대하는 순간 그는 전율했다.
10월26일 궁정동 비밀안가에서 김재규는 부마항쟁을 보고하면서 “정부가 근본적인 대책을 강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사태가 또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라고 보고했다. 이에 박 대통령은 “앞으로 부산 같은 사태가 생기면 내가 직접 발포명령을 내리겠다”고 말했다. 훗날 김재규는 재판정에서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고 말했다. 결국 뒤이어 집권한 신군부는 광주에서 박 대통령의 ‘유지’를 계승했다.
근래 이라크에 파병된 자이툰 부대의 민사작전이 국내외적으로 각광받고 있다. 미국이 우리의 민사작전 교범을 도입할 정도로 대민 및 위민활동은 한국군이 단연 뛰어나다는 게 정설이다. 1979년과 1980년 부산에서 보여준 해병대의 계엄작전은 한국군의 정신사에서 흑요석처럼 빛나는, 성공적인 민사작전의 시초라 할 만하다.
그러면 ‘왜 이제까지 해병대의 ‘미담’이 묻혀 있었을까, 왜 지금껏 국민은 이러한 사실을 몰랐을까’ 하는 의문이 들 만하다. 답은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 있다. 한 해병대 예비역 장교는 “당시 계엄군을 총지휘한 전두환·노태우·정호용 등이 다 특전사 출신인데, 해병대의 진압과정과 공수부대의 진압과정을 언론이 비교하도록 놔뒀겠냐”고 반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