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라!도라!도라!(태평양전쟁) ....8편

슈퍼스탈리온 작성일 08.12.22 11: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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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그날...........

 

 

진주만 기습공격

 

1941년 12월5일,

도쿄에서 워싱턴의 노무라 대사에게 짧은 긴급암호전보(일명 파이럿 메시지)가 보내졌다.

그가 받은 암호전문은

 

1.  미국의 요구를 숙의한 결과로서 별전 제 902호의 영문으로 된 대미 각서를 작성하였음.

 

2.  이 별전은 장문이며 총 14부로 나누어 타전하겠음.

     그 전부가 대사에게 수신되려면 아마도 내일쯤이 될것임.

    정세가 매우 긴박하니 이 전보의 접수 사실은 기밀로할것.

 

3.  대미 각서를 미국에 제출하는 시기에 관하여서는 별도 발신하겠으나

     이 별전은 접수하였다면 훈령이 도착하는 즉시로 언제든지

     미국측에 제시할 수 있도록 준비할것.

 

일본은 14부로된 이 별전을 한꺼번에 발신하게 되면 미국이 경계할까 염려하여

나누어 보내기로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국교를 단절한다는

내용이 담긴 제14부를 일부러 늦추어 보내기로 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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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같은 전문을 입수한 SIS는 전원 비상 철야 근무태세에 돌입하였다.

일본은 밤10시가 조금 지나서 부터 제1부부터 제13부까지를 송신하기 시작하였다.

동시에 시애틀에 위치한 미 해군 무선전신소에서 케치하여 이전문을 9분 만에

텔레타이프로쳤다. 그 다음 고속 송신기는 1분당 60단어씩을 워싱턴의

해군성 1649호실로 송신했다. 1649호실은 미 해군 암호조직인 OP-20-G의

해독분석반 OP-20-GY가 근무하는 비밀의 방이었다.

 

미국시간으로 1941년 12월 6일,

워싱턴의 미 육군성 첩보부가 이 암호문을 해독하여 육군성에는 오후2시,

헐 국무장관에게는 오후 3시에 보고하였다.

 

이런 사실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본은 외무성에 발신한 전문을

도쿄 중앙전신국이 7일 새벽 1시 50분(미국시간 6일 새벽 2시 50분)까지

1부에서 13부에 해당하는 전문의 발신을 완료하였다.

이 전문은 영어로되어 있었기 때문에 미국으로서는 난해한 일본어로된 전문과

비교하자면 그야말로 무척 편한 해독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역된 부분도있었고 제3부에는 의미를 알 수 없는 74개의 단어가

남아있었으며 제10부에는 45개, 제11부에는 50개의 선명하지않은 부분이 있었다.

 

이무렵, 미국 암호요원들은 루즈벨트가 전부터 구상하고 있었던 최후의 수단으로서

일본 천황에게 직접보낼 친서를 암호로 만들고 있었다.

이 메시지는 밤 9시에 타전하여 태평양을 건너 도쿄에 도착하였으나

중앙 전보국에서 미 대사관까지는 10시간 이상이라는 많은 시간이 걸리게된다.

이것은 외국에서 온 전보는 약 10시간가량 대기시켜놓으라는 일본검열당국의

지시 때문 이었다. 루즈벨트가 천황에게 보내는 친서가 전달되고있는 동안에

마지막 급유을 끝낸 진주만 기습 기동함대는 하와이를 향한 최종진로를 달려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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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윈 크레이머 소령

 

아무튼 해독된 전문은 해군 매직작전의 일원인 크레이머 소령이 자신의 부인이 운전하는 차에타고 6일 저녁 9시 30분에 백악관에 직접 전달하였다.  

 

해리 홉킨즈 고문과 함께있던 루즈벨트는 이 대미각서들을 급하게 열심히 읽어나갔다. 그는 이 전문을보고는 이것은 전쟁을 의미한다고 중얼거렸다.

루즈벨트 대통령의 고문 홉킨즈는 전세가 너무 악화되었다. 그렇다고해서 미국이 먼저 일격을 가할 수 도 없으며 기습도 방지할 수 없다는 점을 루즈벨트에게 말했다.

 

 

루즈벨트는

"별수없다. 우리들은 민주적 평화적 국민이기에 말이다.

우리들은 오점이 없는 역사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라고

말하고는 전화를 집어들고 스타아크 해군 작전 부장을 호출하려했으나

그가 내셔널 극장에 영화관람을위해 자리를 비우고 없자

괜히 사람찾느라 극장에 소동을 피우지않으려 소환을 포기했다. 

 

백악관에 전문을 전달한 크레이머 소령은 녹스 해군 장관 에게도 전문을 전달하였다.

녹스는 13부를 모두 정독하고나서 미일 교섭은 단절되었다 확신하였다.

크레이머는 다시 해군정보부장 윌킨슨에게 달려가 전문을 전달해주고

부인이 운전하는 차를타고 자정이 넘어 다시 해군성에 돌아왔다.

그는 혹시나 전문의 마지막 부분인 제14부가 들어왔는지 확인했으나

아직 도착하지않았다는 보고를받고 집으로 돌아갔다.

매직 정보의 배부담당인 크레이머 소령은 특제 가죽으로만든 가방에 정보를넣고

손수 전달하러 다녀야했다. 이것은 안전한 배부를위해 취해진 조치였지만

이상적인 배부체제는 아니었다. 크레이머와 정보 수령자가 각각 한개씩의 열쇠를

가지고 전달받는 식인데 수령자들이 너무 바빠서 적시에 배달될 수 없거나

지체되는 경우가 빈번했다.

 

크레이머가 기다리고있던 마지막 전문인 제14부는 미국시간으로 12월 7일  0시 05분에

시작되어 1시 37분 사이에 걸쳐 워싱턴 주재 일본대사관에 도착되었다.

전문은 영어로 되어있었으나 월, 일, 시등 중요부분이 일본어로 되어 있어

이를 방수한 미군은 해독하는데 조금 시간이 걸렸다.

미군은 퍼플암호기에 넣어 해독하려 했으나 제14부는 난해한 함정이있어 

해독하는데는 약 1시간이 걸렸다. 수교 시간을 제외하고 해독된 전문을 완전히

번역한 것은 새벽 5시 조금 지난 뒤였다. 수교시간이 적힌 메시지는 일본어

암호로되어있어 SIS 로 보내어 해독하도록 했던 것이다. 

일부러 늦추어 보내지는 것을 모르고 있었던 일본 대사관은 제14부를 기다리다

지친 나머지 모두 귀가했다가 아침에 출근하여 전문이 온 것을 확인하고는

오전 8시부터 작업을 시작 하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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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고 일본 외상(좌) 노무라 일본 대사(우)

 

 

미국은 오전 7시 15분(하와이 시간 새벽 1시 45분)에 노무라 대사에게

보내는 최후의 통첩 맨 끝 부분인 제 14부의 완전한 해독을 끝냈다.

그러나 일본 대사관은 아직 전문의 번역에 들어가지않고 있었으며 크레이머 소령이 

전문의 전달을위해 분주히 뛰어다니는 동안에 번역을 시작하고 있었다.

전문의 내용은

교섭에 최선을 다한다해도 미국과의 타결에 도달할 수 없음을 미합중국 정부에

통고함을 유감으로 생각하는 바... 워싱턴 시간으로 7일 오후 1시에

일본 정부의 훈령을 미국정부에 전달하라는 내용이었다.

이것은 선전포고를 담은 것은 아니었으나 더 이상의 교섭에 나서지 않겠다함은

국교의 완전한 단결과 나아가 전쟁의 발발을 의미하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워싱턴의 오후 1시는 하와이의 오전 7시 30분 이었다.

육군 정보부는 이 극비문서를 참모총장인 마샬 장군에게 전달하려했으나

마샬은 아침일찍 승마를떠나 부재 중이었다.

 

아침 10시,

스타아크 작전 부장이 해군 성에 출근하자 해군 정보부 극동과장 맥컬럼 중령과

크레이머 소령은 제 14부를 스타아크에게 전달하였다.

전문을 읽고 얼굴이 굳어진 스타아크에게 맥컬럼 중령이

"이 정보를 판단한다면 일본군의 주 공격지는 남방이라 생각됩니다" 라고 말했다.

 

그러자 윌킨슨 정보부장이 가로채듯 말했다. 

 "수교 시간을 미리 정해놓았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시각은 하와이의 오전 7시 30분입니다.

이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회의에 참석한 모든이들이 윌킨슨의 말에 동의하는 듯하자 윌킨슨은 지금

즉시 하와이의 킴멜 제독에게 전화를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진언하였다.

잠시 생각에 젖어있던 스타아크는 전화를 잡았다가 다시 놓으며 막료들에게 말했다.

"먼저 대통령과 상의해보기로 하겠네. 잠시 자리를 비켜주게"

막료들 일동이 불만스러운 듯 방을 나간뒤  스타아크는 백악관에 전화를 넣었으나

루즈벨트의 전화는 통화 중 이었다. 이렇게하여 해군은 이날 아침 매직 작전에서

얻은 경고 정보를 킴멜 제독을 비롯한 모두에게 전달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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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즈벨트와 마샬 참모총장

 

 

승마를 즐기고있는 마샬 장군을 찾아해메던 부하들은 10시 30분 쯤에

마샬이 숙소로 돌아오자 전화로 이 정보를 알려주었다.

그리고는 지금 즉시 문서를갖고 달려가겠다는 것을 만류한 마샬은 출근해서

보면 된다고 말하였다. 육군 정보부 극동과장 브란튼 대령은 10~15분 후면

출근하리라 예상하여 문서를들고 복도에서 기다렸다.

그러나 마샬은 샤워를하고 천천히 옷을 갈아입으며 서두르지 않았다.

 

기다리다 못한 브란튼은 아예 육군성 정문까지 뛰어나가 기다렸으나

마샬은 11시가 넘어 출근하였다. 마샬이 제 14부를 읽어나가자 브란튼이

가장 중요한 오후 1시 통고 부분을 먼저 읽으라고 권했지만 마샬은 이를 따르지않았다.

이러는 가운데 모든 참모들이 마샬의 방으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문서에 명시된 오후 1시는 일본이 오후 1시 또는 그 직후에 태평양의

어디인가에 공격을 가할 계획으로 판단하였다.

(이시각, 하와이 북방 460km에서는 기동함대의 공격 제1파가

비행갑판에서 엔진에 시동을 걸기 시작했다)

 

 11시 15분, 

마샬은 전 사령관에게보낼 긴급 경계 지령을 작성하였다.

필리핀, 파나마, 하와이, 샌프란시스코의 모든 육군부대에

"일본은 오늘 워싱턴 시간으로 오후 1시에 우리 정부에

최후통첩을 제출할 것이다. 그리고 즉시로 암호기계를 처분하라.

이 시각에 어떠한 사태가 발생할지 예측할 수 없으니 경계하라."

는 메모를 갈겨썼던 것이다.

 

스타아크 해군 작전부장에게도 태평양 지역의 미군에게 경고를 보내자고 말하였다.  

경고를 주저하던 스타아크가 마샬에게 전화를넣어 육군에서 해군에도

함께전달해주길 요청하자 마샬은 자신의 메모 맨 끝에 해군부대에도 알리도록하라는

 문구를 집어넣게되는 것이다. 마샬은 메모를 건네주며 가장 빠른 전보발신소로 가져가

가장 빠르고 안전한 방법으로 각 지휘관들에게 전달할 것을 명령하였다

 

122991136888349.jpg공습당일 진주만의 전함 및 주요함선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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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격직전의 일본 함재기들

 

 

 

미국이 전문 제14부를 읽어보고 대책을 강구하던 바로 그시각, 일본 순양함에서는

2대의 수상정찰기가  진주만 으로 향하는 길목을 정찰하기위해 어둠이 채 가시지않은

하늘로 힘차게 날아올랐다. 나구모는 공격개시 3시간 전까지도 호놀루루의

총 영사관을 통해 진주만의 상황을 보고받았다.

어뢰 방어망도 설치되지 않은 것 같으며 상공에 아무런 폭격 방해물도 설치되지

않았다는 정보였다(미국은 이전문을 방수했지만 해독하지 않고 내 버려 두었다).

하지만 실망스럽게도 항모는모두 출항하여 현재로서는 만 내에 항모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나구모 제독으로서는  항모가 진주만에 없다고 해서 어디에있는지도,

언제 어디서올지도 모르는데 위험천만한 미국의 해역에서 미국항모가 진주만으로

돌아오기만을 마냥 기다리고있을 수 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예정대로 진주만을공격하기로 결심하였다.

 

항모의 갑판에는 함재기들이 발진을 위해 정돈되었고

본격적인 진주만 공격은 이제 부터가 시작이었다.

 

 

마샬의 책상 위에는 하와이의 육군 사령관 쇼트 중장과 직통으로 연결되는

전화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보로 보내도록 명령한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이 전화는 도청방지 장치가 달려있음에도 마샬은 이것을 신뢰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항상 미최고위급 인사들의 전화통화 내용이 도청당하고 있을 것이라는

의심을 하고 있었다. 실제로 독일은 고도의 도청기술로 미국과 영국의

전화통화내용을 엿듣고 있었다. 마샬은 특히 하와이는 더 믿을 수 없는

지역이라는 생각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생각 끝에 안전한 암호전보를 선택했던 것이었다.

 

그리하여 육군성 전신실에 암호전보를 발송하도록 명령하였으며

순서가 문제가 된다면 필리핀을 최우선 순위로 보내도록 지시 하였다.

전신실의 에드워드 프렌치 대령은 암호화하는데 3분, 공중에서 8분이 소요되고

수신처에서 해독하기까지는 20분이면 충분하다고 하였다.

하지만 안심하지못한 마샬은 두번이나 전신실로 부관을보내 확인한 다음에야

마음을 놓았다. 그러나 프렌치 대령의 뜻대로 되지못하는 사태가 발생하고야 만다.

 

전문을 암호기에 넣어 몇분만에 암호화 하였으나 호놀루루의 회선을 점검해본 결과

이른아침부터 상태가 극히 불량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프렌치는 육군성의 10kw 송신기로는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다는 판단을하여

40kw짜리를 보유한 샌프란시스코의 RCA전신회사를 이용하기로 결정했다.

프렌치 대령은 바로 전날 쇼트 장군의 사령부와 RCA사 간에 텔레타이프가

부설되었다는 사실을알고 이같은 결정을 내렸던 것이다.

 

그리하여 더 빨리 보내기 위하여

웨스턴 유니온 전신회사의(유선) 텔레타이프(12월7일 11시01분 접수, 11시 17분 발신) -

RCA샌프란시스코 사무소(무선) - 호놀루루 RCA사무소(무선)의 경로를 통해서

호놀루루에 도착한 시간은 7일 오후 1시 03분(하와이 시간 오전 7시33분)이었다.

(이시간, 일본 함재기 제1파가 오아후 섬으로부터 74km 까지 날아와 있었고, 

레이다에 무수히 많은 물체가 포착되었으나 당직장교의 근무태만으로

무시되어 버린 상태였다).

 

호놀루루에 도착한 전보는 RCA-쇼트 장군간의 텔레 타이프가 아직 최종 테스트를

마치지 않았다하여 RCA에서 전보용지에 타이프를하는 늑장을 부렸던 것이다.

(이 긴급한 전보를 빠르게 보낼 수 있는 수단은 얼마든지 있었다.

마샬 장군은 자신의 방에놓인 전화가 의심스러웠다면 바로 옆방의 비밀전화 ,

해군의 단파 무선, FBI의 해외 단파 무선등을 왜 무시했는지

정말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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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진하는 99식 함상폭격기

 

 

그런데 워싱턴의 일본 대사관에서는 제13부까지의 타이핑을 마쳤으나 공식 외교문서로서는

지저분하다는 판단을내린 서기관의 지시로 그의 부하가 다시 타이핑을 하고 있었다.

재 타이핑 중이던 11시30분경에 마지막 전문인 제14부가 전신실로부터 전달 되었다.

수교시간에 쫓겨있는 와중에 재 타이핑을 하였으며 거기에다 전신실에서 두 번이나

정정 통보가 내려져 더 더욱 촉박해졌다. 초조해진 노무라 대사는 계속 빠른 타이핑을

재촉 하였으나 제 시간에 마쳐지지 못할 것같자 헐 국무장관에게 전화를걸어 1시 까지는

도저히 불가능하니 회견 시간을 1시45분으로 연기해 달라는 요청을 하였다.

헐은 그 요청을 수락했는데 바로 그시각에 일본군 함재기들이 진주만 상공에 나타난 것이다.

 

 

한편 호놀루루의 RCA전신회사 의 전보 배달부인 일본계 미국인 후치가와 타다오는

전보가 든 가방을들고 가장 빠른 길을 택하여 오토바이를 타고 달렸다.

그는 진주만이 기습당하는 모습을 보았으며 그 기습자들은 자신의 조국인

일본의 함재기들 이었다. 타다오는 도중에 일본군 기습부대원으로 오인되어

조사를 받기도하는등의 우여곡절 끝에 결국 11시45분(기습 기동함대의 맨 마지막

공격이 끝난지 2시간 후)에야 하와이 육군 사령부 통신장교에게 전달할 수 있었다.

오후 3시에 암호해독을 마친 전보를 받아든 하와이 육군 사령관 쇼트 중장은

그것을 휴지통에 던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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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진주만의 한 장면으로서 97식 함공이 어뢰를 투하하는 장면.

미국의 훈련기를 대폭 개조하여 촬영했다.

 

 

한편 기습이 시작된지 25분이 지난 워싱턴 오후 1시50분,

타이핑이 끝난 통고문을 든 노무라대사가 탑승한 자동차가 국무성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국무성의 헐은 루즈벨트로 부터 진주만이 기습 당하였다는 소식을 전화로 통고 받았다.

 

2시20분, 분노한 헐은 노무라 대사와 구르스 특파대사를 방으로 들어오게 하였다.

노무라는 암호를 푸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 늦어졌다며 통고문을 내어 밀었다.

노무라 대사는 이때까지도 진주만 기습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통고문을 받아든 헐은 이미 그 내용을 다 알고 있었지만

매직작전을 상대방이 눈치 채지 못하게 읽는 체만 하였다.

헐은 노무라에게 분노에 찬 어조로 말하였다.


"과거 9개월 동안 귀하와의 교섭에서 나는 단한번도 허위에 찬 말을 한적이없다.

그리고 공직생활 50년 동안 이처럼 수치스러운 거짓과 왜곡에

찬 문서를 여지껏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노무라는 뭐라 말을 하려했지만 억제하는 듯 했다.

이어 헐은 손을들어 방을 나가라는 모욕적인 손짓을 하였고

두명의 대사는 말없이 고개를 숙인 채 나가 버렸다.

이 때문에 통고와 기습시간과의 간격을 최대한 좁혀보려했던

일본 군부의 희망과는 달리 결국 경고없이 전쟁을 일으킨 결과가 되고 만 것이다.

 

만약  지시되었던 1시에 전달되었다면 공격 시간까지 겨우 25분 가량이 남게되는 것이다.

미국으로서는 공격 목표가 어디인지도 몰랐으나 만약 하와이라는 것을 알았다

하더라도 겨우 25분 동안에 기습을 방지할 어떠한 수단도 소용없었을 것이다.

일본 군부는 바로 이점을 노렸던 것인데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

일본 대사관에서 첫 타이핑이 지저분 하였다 하더라도 오후 1시까지 헐에게

전달하였더라면 비록 비겁한 기습이었지만

조금이나마 변명의 여지는 남을 수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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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만 기습 다음날인 1941년 12월8일,

루즈벨트는 일본대사가 국무장관에게 미국이 제시한 조건에 대해

정식의 회답을 수교한 것은 일본이 오아후 섬을 폭격한지 1시간이상이 지난 후였습니다.

더욱이 이 회답은 양국간의 교섭을 단절한다고 언급했지만 전쟁 또는 군사 행동의 절박을

암시하는 그 어떠한 표현은 조금도 없었던 것입니다 라고 상원 본회의에서 연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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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즈벨트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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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만 기습공격이 성공한 후 선전을 포고하는 대본영 해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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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전쟁이 발발했음을 보도한 일본신문

 

 

 

9편으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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