떼죽음 당한 간첩들,1969년 주문진
한국은 해방후에 6.25 사변과 월남전외에 또 다른
질긴 전쟁을 했었다.
만주에서 유격전으로 젊은 시절을 보낸 김일성은 북한 정권을
잡자 남한도 그런 방식으로 적화시킬 수가 있다고 믿었다.
그는 6.25사변 전후 끊임없이 유격전을 지원하거나
선동해서 남한을 괴롭혔다.
전쟁이 끝나고 한동안 잠잠하던 그는 60년대 남부 월남이
월맹의 유격전 공세에 휘말려 고전을 하자 또 다시 헛된 야욕을
일으키고 부지런히 남쪽에 무장 간첩들을 보내기 시작했다.
김신조의 기자회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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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도당이 남으로 보내는 무장 간첩들은 엄격한 심사를 통해
선발되어 강도 높은 특수 훈련을 받은 정예중의 정예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중에는 남파 기획 단계에서의 실수나
간첩들의 어이없는 실수로 토벌 당하는 경우가 자주있었다.
멀리로는 1968년 남조선 대통령을 처치하겠다고
경계심 높은 수도권의 인구 밀집 지역인 서울 북부에 31명의
대부대 간첩을 보냈다가 청와대 북부에서 발각되어 섬멸당한
속칭 김신조 부대 침투가 있었고 가까이로는 1996년
300톤이나 되는 잠수함을 해안 암초지대에 함부로 몰아 넣어
좌초 시킨 결과로 끝장났던 강릉 잠수함 침투 사건이 있다.
강릉 침투 북한 잠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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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한마디 하고 가자.
121사태때 대대적인 토벌 작전으로 무장 간첩중 단 한명만
살아서 북으로 복귀하였다.
내가 군 복무시절 선배로 부터 들은바로는
구사일생으로 북으로 돌아간 이자는 이중 영웅의 칭호를 받았고
나중에는 청와대 습격 간첩들이 소속한 124부대장으로
임명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김신조씨는 목사가 되었다.
김대중 정부때인 2000년 9월 김정일은 엉뚱한 제안을 하였다.
남한에 송이 버섯 4톤[ 8억원 상당]선물을 하겠다고
특별기를 보낸 것이다.
너무 이상한 짓이라 이해가 안갔는데
김신조씨의 말에 의하면 이때 송이
버섯전달의 북쪽 특사 김용순을
수행하고 온 박 재경 대장
[재작년 계급]이라는 자가 그 때 살아서
돌아간 무장 간첩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노대통령이 방북했을 때도
송이 버섯 선물 전달 심부름꾼 노릇을
했었다.
박 재경 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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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정일이 송이 좀 주고 한국 병신 만드는 기막힌 연출을 했던 것이다.
아마 자기들 추종 군부 세력과 함께 송이 버섯 선물을 크게 보도한
한국 tv를 보면서 비웃었을 것이다.
김영삼 정부 때도 정말 크게 인심을 써서 비전향 장기수
이 인모 노인을 보내주었는데 김정일은 이 사람을 신병 치료한답시고
미국에 보내서 또 한국 tv에 얼굴을 보이고 김정일의 은덕을
찬양하게 연출했었다.
남쪽 인사들의 인간미를 고마워야 하는데도 이렇게 유치한 연출로
응대하는 북한 정권을 무시해야 할지 화를 내야 할지를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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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강원도 북방 동해안 소재 주문진 읍에서
일곱 명의 간첩들이 몰살당한 대 사건이 있었다.
이들 무장 간첩들을 토벌해 버린 부대는 대 간첩작전을 위해서
특수 훈련을 받은 특전대나 또는 해병 수색대같은 부대도 아니었고
더 나아가 출동한 육군 정규군도 아니었다.
또 이들 7명의 간첩들을 한 명도 북으로 복귀 못하게 섬멸하는데
로케트 포나 기관 총같은 중화기가 사용된것도 아니었다.
이미 한 명의 경찰관을 살해한 이들 떼간첩을 섬멸한 용사들은
두 명의 경찰관과 집에서 자다가 놀라 뛰쳐 나온 두 명의
예비군들이었다. 사용 화기는 단 네 정의 칼빈 소총이었다.
교전 시간도 단지 5분도 되지 않았었다.
무장 간첩들의 어처구니 없는 실수와 남한측의 신속하고
대담했던 대응이 합쳐서 생긴 운명이 이들을
다 물고기 밥이 되게 했던 것이다.
1969년 한국 해군 구축함 91함에 나포된 간첩 모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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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1969년 3월 16일 00;50분 주문진 읍에 위치한 강남 여인숙에
군복과 검은 점퍼차림를 한 한무리의 괴한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주인[여]앞 세우고 각 방을 돌며 임검했다.
그들은' 우리는 방첩대원이다. 조사 할 것이 있으니
주민 등록증을 내놓으라고 ' 협박했다.
자다가 어리둥절하여 일어났던 신갑성씨 형제등을 비롯한
일곱명의 투숙객으로 부터 주민 등록증 넉장,선원증 한장, 그리고
국가 공무원증 한장등을 빼았아 갔다.
그 무렵 중앙 정보부와 함께 박정희 정권 수호의 막강한 정보
권력 기관이었던 방첩부대는 일부 조직원들의 몰지각한
행패로 사람들이 두려워 하며 기피하던 존재였다.
이들 괴한들은 해상으로 침투한 무장 간첩이었다.
30분뒤 간첩들은 여인숙에서 300미터 쯤 떨어진 제 206 전경대
소속 주문진 항내 수상 검문소에 나타나 근무중이던 염관수[32세]
순경과 이웅재[29세] 순경,그리고 사환 안승철 군[17세]등 세 명에게
" 우리는 방첩대원이다. 근무 태도가 왜 이렇게 소홀하냐?"
고 질책했다.
이에 두 순경이 반발하자 대위 복장의 무장 간첩이 권총을 들이대고
" 우리는 인민 유격대다. " 라고 소리치고 두 순경에게 수갑을 채우고
포승줄로 포박하였다.
간첩들이 교신용으로 쓰던 난수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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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순경이 반발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아무리 위세를 부리던 방첩대라도 같은 국가 기관인 경찰에게까지
이런 무례한 태도로 간섭하는 것은 있을 수가 없었는데 간첩들은
뭘 몰랐던 모양이었다.
포박을 당하면서도 염 순경이 계속 반항하자 갑자기 칼을 꺼내서
그의 등과 옆구리등 온몸 8곳을 잔인하게 찔러 죽였다.
그들은 사환은 그대로 검문소에 포박한채 검문소에 놔두고
이 순경만 붕대로 눈을 가려 부둣가로 끌고 나갔다.
한 명의 간첩이 이 순경을 호송했다.
이대로 끌려가면 끝장이라는 생각이 든 이 순경은 50미터쯤 가자
비틀거리면서 연극을 했다.
"앞이 안 보여 걸을 수가 없소. 붕대 좀 풀어 주시오."라고 하자
그 호송 간첩은 붕대를 풀어주었다.
붕대가 풀리는 순간 태권도 유단자인 이 순경을 그대로
호송 간첩을 걷어찼고 간첩으로부터 개머리 판으로 반격당했지만
필사적으로 탈출하여 그곳에서 150미터 떨어진 주문진
우체국으로 달려가 본서에 간첩 출현 신고를 하였다.
이 때가 01;45분이었다.
한편 포박당한 사환도 인접한 예비군 소대장 집으로 달려가 간첩
출현 사실을 알렸고 예비군 소대장은 지서에 신고하고 달려나왔다.
급보에 접한 송철호 [36세] 강민순[29세] 두 순경과 예비군 소대장
박용무 [38세]씨, 부소대장 엄백헌[39세]씨들은 무장을 하고
즉각 행동을 취했다.
지원군을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찰라의 지연은 간첩들에게 도주의 여유를 줄 가능성이 있다.
하늘에서 본 주문진 어항 ,왼쪽이 방파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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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명은 축항의 방파제로 달려나가서 바다를 응시했다.
해상에 뜬 검은 덩어리가 방금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있는
순간이었다. 간첩들이 탄 고무보트였다.
네명은 약속이나 한듯이 방파제에 엎드려서 즉시 사격을 개시했다.
군 복무 시절의 훈련 결과가 본능적으로 나왔던 것이다.
적측에서도 즉각 응사가 있었다.
그러나 바다의 간첩들 측에서 어두운 방파제에 엎드린
그들을 발견해서 명중시키기는 더욱 힘든 노릇이었다.
비명 소리와 함께 간첩들이 모선에 외치는 " 지원 사격을 해라!"하는
고함 소리도 들렸다.
사격을 당하면서도 검은 물체는 어둠속으로 빠르게 사라졌다.
검은 물체가 사라지고도 네 사람은 그 방향으로
한참을 더 사격하였다.
총격전은 약 5분 간 있었다.
사격을 한참 했지만 적은 이미 도주했으니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네 사람은 아쉬운 대로 파출소로 돌아와서 간첩들에게 살해당한
동료 염 순경의 시신을 수습하였다.
이어서 달려온 지원 부대는 현장을 살펴보고 상부에
간첩 퇴치 보고를 하였다.
상부에서도 그렇게 알고 일부 언론에도 간첩들의 대담한
주문진 항내 침투와 퇴치사실만 보도 되었다.
그런데 날이 새고 현장을 정밀 수색했던 전경 수색대는
네 사람의 사격으로 죽은 대위 복장 1명과 중사 계급 1 명 등
여러 무장 간첩들의 시체가 바닷물에 떠 있거나 바위틈에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들이 타고 도주했던 고무보트는 12발의 총탄에 관통 당해
공기가 빠져서 침몰하였고 괴한들 시체 일부는 고무보트 근처에
있는 바위틈에 걸려있었다.
미국 해군 seal 부대가 쓰던 고무 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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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해저 수색이 있었고 추가 시체들이 더 인양 되었다.
총 7명의 간첩들이 보트 위에 타고 있다가 죽음을 당했다.
이들은 머리 허리 어깨 등에 총탄을 맞아 보트 내에서 죽고
일부는 일단 상륙했다가 죽었던 것이다.
부상을 안 당했다 해도 간첩들이 수온이 영도에 가까운
바닷물에 빠졌으면 살아날 길이 없었을 것이다.
이 정도의 수온이면 저체온증으로 5분이면 의식을 잃었을 것이다.
수색대는 이날 시체와 고무보트 외에 칼빈 총 4정, 기관단총 3정,
권총 2정, 무전기 1대, 라디오 1대, 현금 20만원, 수류탄 5발,
실탄 3,000발, 난수표 3조, 암호문 4조, 주문진 지도 10매,
길이 500미터의 로프 등을 노획하고 이들이 주민들로부터
강탈해갔던 주민 등록증 4장과 선원 승선 증, 공무원증 등도
회수하였다.
이날 간첩 모선이 주문진 앞 1 킬로 해상에 정박하고 있었다.
긴 로프는 간첩들이 탔던 고무보트를 이 모선과 연결했던
기능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간첩들이 탄 고무보트를 견인하다가 총격으로 공기가 빠진
고무보트가 침몰하자 줄을 끊고 도주했을 것이다.
지상 부대와 해군 함정과의 통신이 원활하지 못하여
이 모선을 격침시키는 작전은 실패하였다.
[이런 방식으로 긴 로프 줄로 고무보트를
모선이 견인하는 방식은 같은 해인
1969년 6월 8일 북평 침투시에도 사용되었었다.
모선은 해안선의 초소에 자신들의 존재가 발견되자 비정하게
고무보트의 줄을 끊고 도주하고 남겨진 고무 보트의 간첩 세명은
상륙후 생포되거나 사살되었다.]
그 때의 신문 사진을 보면 방파제에 인양 되어 올려 진
간첩들의 눈 근처 안면부가 벌써 밤새 수중 물고기들에게
훼손당한 것이 드러나 보였다.
정보당국은 간첩들의 주문진 침투가 정부가 양식을 바꾼
주민 등록증을 입수하는 것이었다고 추측했다.
겸사해서 침투 한 김에 경찰도 납치해서 동해안이나 주문진
일대 경비상황도 탐지 할 목적이 있었던 것 같다.
간첩 측에서 보았을 때 침투요원 전원 사망의 대 참사로 끝났던
주문진 항 침투의 원인은 몇 가지로 분석할 수가 있다.
첫째로 기본적으로 주민등록증 획득이라는 간단한 작전에
그렇게 많은 인원 즉 떼간첩을 동원한 작전 수립에 문제가 있었다.
두 번째의 실수는 121사태와 같이 인구 밀집지역인 주문진 항의
심장부에 다수의 간첩과 간첩선을 겁 없이 직접 투입한 것이다.
그런 곳은 발각될 우려도 크고 반격을 당할 가능성도 크다.
침투와 이탈은 항상 적의 취약한 지점에서 이루어져야 했는데
이 간첩들은 마치 객선을 타고 주문진을 방문한 여행객처럼
너무 쉽게 도시의 심장부에 침투하고 이탈하는 작전 수행을 했다.
세 번째이며 이번 실패의 최대 원인은 납치했던 경찰이 도주하게
허용했던 것과 결박해서 신고소에 그냥 남겨 놓은 사환의
미숙한 처리다.
여기에 더해서 간첩들의 한국 통신체계의 신속함과 예비군의
존재에 대한 무지함이었다.
네 번째는 물론 그런 취약한 곳에서 적의 사격에 취약한
고무보트를 사용한 점이다.
고무보트는 그 전해인 1968년 울진 삼척지구 간첩 침투 사건
때도 120명의 침투 간첩들에 의해서 사용 되었었다.
이 고무 보트에는 일개 분대가 탈 수가 있다.
한국 해병대도 미국의 영향인지 고무보트를 애용하고 있는데
어느 외국 군사 잡지에서 고무보트가 비밀 침투 작전에 부적합하고
여러 가지로 취약한 점을 가지고 있다고 지적한 글을 읽은 일이 있다.
그 글은 그래서 고무보트 대신 최소 현측이 방탄이 되는 접는
보트 개발을 역설했었다.
고무 보트가 아니라 조금 더 큰 목제나 철제 보트를
사용했더라면 , 그리고 분산 탑승했더라면 이런 전멸의
쓴 맛까지는 보지 않았을 것이다.
[근래 침투 간첩들이 썼던 북한의 반잠수정이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개발된듯하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모든 침투 인원을 사격에 취약한 고무보트에
한 꺼번에 태워서 침투시킨 북한 당국자의 작전 문제점이
더 지적되어야 할듯하다.
북한 측의 보는 문제점보다도 신고를 받자말자 정규군이 아닌
한국 경찰과 민간인 신분의 예비군들이 두려움 없이 방파제로
추격을 나가 적들에게 사격을 가한 용감성은 대 피해를 입은
북한도 어쩔 수없는 실패의 최대 외부 원인으로 들어야 할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