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년 원산 영흥만 웅도를 거점으로 활동하던 육군 HID 대원들>
1949년 6월에 창설된 해군의 UDU를 시작으로 6.25 침략을 격퇴하던 시기에 육군의 HID와 공군의 OSI가 연이어 창설되었다.
해군과 육군의 북파공작원 활동은 주로 전쟁종심 근거리에서 이뤄졌고, 공군의 북파공작원들은 적진 후방 깊숙히 낙하산으로 침투하여 작전을 수행했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약 8,000명 정도의 요원이 적진에 파견되어 2,000명 정도만 살아서 귀환할 수 있었다. 이 것은 흔히 구월산 유격대가 아주 잘 알려져 있듯이 거의 모두가 6.25 침략 격퇴기에 맹활약 했었고 초기에는 대부분이 지방방언 문제로 인해 북한지역 출신들이었다.
중앙정보부에서는 제5163부대라는 이름으로 공파공작원들을 양성했었다.
6.25 남침 격퇴 이후 북파공작원들의 실제 북한 침투는 극히 미미했는데, 5163부대에서 63년 5명, 70년대 2명, 80년대 2명, 90년대 1명(김영삼 때)으로 총 10명을 파견했으나 생존자는 없다.
반면 북한은 1954년부터 1992년까지 3천6백9십3명의 북한군 특수부대원으로 한국을 공격했다. 그 중에는 두 번의 민간항공기 납치와 1번의 민간항공기 폭파, 버마 아웅산 테러도 있다.
실미도 북파공작원 양성사건은 매우 다른 시각으로 봐야 한다. 북한 특수부대의 청와대 공격으로 박정희는 매우 분노했으며, 북한을 섬멸하기 위해 미국에게 작전지휘권(당시에는 명칭이 통제권이 아니라 지휘권임)을 돌려 줄 것을 강력하게 요구했으나 전쟁을 막으려는 미국의 거부로 무산되자 직접 김일성이라도 사살하기 위한 의도로 구성된 것이다.
지금의 북파공작원 양성은 과거와 다른 양상을 갖는다.
군대에서 정보를 수집하는 방법은 영상정보, 신호정보, 인간정보로 나눌 수 있는데 그중 인간정보 역할을 담당하는 곳이 정보사다. 부대 명칭은 따로 있으며, 인간의 눈과 귀로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요원을 양성한다.
현실적으로는 북파 되지는 않고 주로 공군이 담당하는 영상정보 수집과 겹쳐있어 공군이 비행기를 타고 사진을 찍는다면 북파공작원들은 지상에서 휴전선 너머로 사진을 찍는다. 물론 탈북자들이나 휴전선 귀순자들의 취조 과정에 참여하기도 한다.
항시 북한의 재침략이나 통일을 위한 북진에 대비해서 실제 적지에 침투해서 작전을 수행할 수 있도록 생존훈련, 북한 적지 적응 훈련과 같은 혹독한 훈련을 받는다.
이 시간에도 여전히 강한 체력과 애국심을 가진 자를 선발하는데, 신원조회를 거쳐 입대시에는 주민등록증을 말소하고, 전사에 대한 서약서를 쓰며, 일반병사에 비해 좀 더 자유로운 대우를 해준다. 보통 무슨 회사라고 불리는 거점에서 비밀리에 북한의 침략시 작전투입에 대비하고 있다.
과거 6.25 침략 격퇴기 때 실제로 북파되었던 공작원들이 사회부적응을 겪은 것에 비해, 현재는 북파훈련을 받았지만 실제 침투가 없어 생존의 극심한 갈등을 겪지 않았기에 제대 후에 사회적응도 빠르고 정신적 문제도 겪지 않는다. 어떤 면에선 수가 많은 해병대 출신들처럼 강인하고 성실하게 살아간다.
이들이 있음으로써 나라가 지켜져 왔고, 또한 앞으로도 지켜질 것이다.
<6.25 남침 격퇴기에 북한에게 처형당한 북파공작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