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전쟁

사모하이하 작성일 10.01.12 22:3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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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로토프의 칵테일 이 맞게쪼 ? ㅋ_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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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전쟁 짤막한이야기 .

 

악마의 야합이라 불리우는 독일과 소련의 독소불가침 조약 후 스탈린은 히틀러가 합 입 먹다 남겨준 반쪽짜리 폴란드 따위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스탈린도 처음부터 눈치까고 있었겠지만, 히틀러가 유럽 전체를 혼자서 다 쳐먹기 전에 자기들도 어딘가 침 발라 놓는 게 좋다는 생각으로 발트 3국(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을 간단히 먹어버린 스탈린은 점점 욕심을 주체할 수 없었다.

 

다음의 희생자로 지목한 것이 바로 핀란드..

 

전유럽이 땅따먹기의 열풍에 들어선 시점에서 꾸물대고 있다간 독일한테 뺏길것이 분명한지라. 소련이 먼저 손을 써둬야 하는 입장이었다. 소련 외무장관 "미하일로비티 몰로토프"는 핀란드로 날아가 무시무시한 협박과 함께 핀란드만의 섬 4개와 국경부근의 2000㎢에 달하는 영토를 내놓으라고 윽박을 질러댔지만, 핀란드 대통령 괴티스 갈리오는 한마디로 거절했다. "안돼."

 

몰로토프는 보드카를 한 잔 한것처럼 면상이 씨뻘개져서 소련으로 돌아가 버렸다.
이제 소련이 취할 행동은 딱 하나밖에 없었다. 1939년 11월 30일 새벽을 기하여 소련군은 일제히 핀란드를 공격했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과 같은 이 전쟁에서 핀란드가 일주일 이상 버틴다고 예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공세에 동원된 소련군은 25개 사단, 54만의 보병과 2400대의 전차, 그리고 2000문의 야포와 500대의 항공기라는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이 병력이면 핀란드 국토 전체를 꽉 채워놓을 수 있을만큼의 대군이었다.

 

이에 맞서는 핀란드군의 전력은 보잘 것 없었다.

 

1차대전때 사용하다 남은 소총과 기관총, 그리고 녹슬어서 작동할지 의문이 들 정도의 야포와 박격포에 구식전차 1개 중대와 낡은 복엽기 80대가 전부였다. 핀란드군은 현대화 된 장비는 커녕 제대로 된 전투훈련조차 변변히 받아본 일이 없었다. 하지만, 핀란드는 북극권의 혹독한 추위와 대자연속에서 단련된 30만의 인적자원을 가지고 있었다. 오랜 세월동안 북해와 랩랜드의 침엽수림에서의 사냥을 생업으로 살아온 핀란드인들은 별로의 훈련을 받지 않아도 천성적으로 강한 투사나 다름이 없다.

 

11월 30일 오전 7시, 600문의 중포가 불을 뿜고 소련 항공기들이 핀란드의 수도 "헬싱킹"과 제2의 수도 "비푸리"에 공습을 가했다. 생전 처음보는 소련군 전차에 놀란 핀란드 병사들은 겁에 질려 싸우지도 않고 도망쳐 버렸고 날이 저물기도 전에 소련군은 핀란드 영토 내 8km까지 접근했다.

 

하지만, 진짜 전투는 그로부터 일주일 후에 일어나는데..
12월 6일, 너무 빠르게 진격하다가 스웨덴 영토까지 침범하지 않게 조심하라는 지시가 내려질 만큼 순항을 거듭하던 소련군은 전열을 재정비 하기 위해 후방의 중화기를 기다리기 위해 잠시 진격을 중지했고, 바로 이 짧은 순간에 전세가 역전되는 빌미를 제공하고 말았다. 12월 8일, 소련군의 2개 연대병력이 "톨바야르비"호수가에 숙영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핀란드군은 침체된 부하들의 사기를 약간이나마 올려주기 위해 수오미 기관단총으로 무장한 1개 소대를 선발하여 기습명령을 내렸는데, 뜻밖에도 이 소규모 기습이 의외의 대전과를 올리고 말았다.

 

소련군은 계속 된 승리에 도취되어 군기가 빠질대로 빠져 보초조차 제대로 세워놓지 않은데다, 추위를 이기기 위해 보드카를 잔뜩 마셔 부대 전체가 만취 된 상태였다. 한밤중에 얼어붙은 호수를 건넌 소수의 핀란드 특공대는 소련군 막사 안에 수류탄과 기관단총을 마구 갈긴 후 숲속으로 도망쳐 버렸다.

 

그런데 그 다음에 일어난 사태는 더욱 가관이었다. 기습에 화들짝 놀란 소련군은 캄캄한 어둠속에 닥치는대로 총질을 해댔고, 급기야 아군과 오인전투가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 전투를 계기로 핀란드군은 자신들에게 가장 적합한 전법을 발견하게 되었다. 반대로, 소련군에게는 악몽이 시작이 기다리고 있었다. 12월 중순이 되자 가뜩이나 춥던 핀란드의 기온은 더욱 떨어지면서 폭설까지 내리게 된다. 1939년의 겨울은 그동안과 비교해도 유례없는 강추위가 유럽을 몰아닥쳤고, 게다가 핀린드는 북극권의 정점에 위치한 지독하게 추운 나라였다. 소련도 꽤 추운 나라라곤 하지만, 영하 40도의 날씨가 화창한 날에 속하는 핀란드의 겨울에는 비할 바가 못되며, 특히나 소련연방에서도 날씨가 따뜻한 우크라이나 출신의 소련군 병사들에게는 지옥이나 다름이 없었다. 소총의 노리쇠같은 금속체에 조금만 닿아도 살이 떨어져나가는 추위에서 소련군의 동사자가 속출하기 시작했다.

 

그 반면 추위가 강해질수록 핀란드군의 공격은 점점 더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소련군에게는 얼음지옥같은 이 혹독한 환경은, 핀란드 병사들에게는 자신들이 태어나고 자라온 고향인 것이다. 새하얀 설상위장복을 입고 스키를 이용하여 소리없이 나타나 단검으로 소련군의 목을 베고 유유히 사라지는 핀란드군의 게릴라 전술에 소련군은 속수무책이었고, 소련군 병사들은 이런 핀란드군을 "하얀 유령들"이라고 불렀다.

 

핀란드군 병사들은 명사수 기질을 타고났었다.
다른 나라에서 1차대전 때 사용하다 폐기한 소총으로도 귀신같은 사격실력을 보여줬는데, 따로 군인이 아니더라도 스키와 사격솜씨가 남자다움의 척도로 여기던 이 북구의 남자들은 어릴 적 부터 아버지를 따라 숲에서 사냥을 배웠기 때문이다. 소련군의 마지막 보루인 전차도 더 이상 핀란드군에게 위협이 되지 못했다. 대전차화기가 부족했던 핀란드군은 늪지대의 얼음을 깨고 그 위에 나뭇가지 등을 덮어두어 소련군 전차를 수장시키거나 통나무를 전차의 톱니바퀴 사이에 끼워 움직일 수 없게하는 방법을 개발해냈다.

 

이렇게 멈추어선 전차는 어김없이 빈 병에 가솔린이나 벤젠같은 인화성 물질을 채운 화*이 날아들었다. 이 화*에는 "몰로토프 칵테일"이라는 별명이 붙여졌는데, 그것은 입버릇처럼 "판란드인을 잘 이해하는 그들의 좋은 술친구"를 자부하는 소련 외무장관 몰로토프에게 주는 술이라는 다소 시니컬한 의미를 담고있다.

 

계속 된 눈으로 가뜩이나 열악한 핀란드의 도로마저 봉쇄되자 소련군 전차와 보급트럭은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적군의 병력이 아무리 많더라도 그 대부분을 잘게 쪼개놓으면 병력의 우세는 더이상 그 장점을 잃는다. 잘게 쪼개진 소부대를 하나하나 각개격파 해나가면 그 싸움은 10:1이 아닌, 1:1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고 핀란드군의 전술이 바로 그것이었다. 듣도 보고 못한 생전 처음 겪어보는 미칠듯한 혹한속에서 보급도 제대로 받지못한 소련군은 지칠대로 지쳐가기 시작했다, 숲속에서 한 발의 총성만 울려도 눈밭에 엎드렸고, 그 상태로 하룻밤만 묶어놔도 그들 중 절반이 얼어죽어버렸다. 소련군이 얼어죽는 동안 소수의 경계병만 남기고 숲속으로 철수한 핀란드군은 그곳에 설치 된 막사 안에서 따뜻한 차로 몸을 녹이고 순록 모피 안에사 아늑하게 잠을 청하고 있었다. 눈속에 이런 아득하고 따뜻한 보금자리를 만드는 것은 군대에서 따로 가르친 것이 아닌, 조상 대대로 내려져오는 사냥철에 해오던 삶의 방식일 뿐이었다. 이런 식으로 hit & run전술을 며칠만 반복하면 소련군은 볼품없는 몇 개의 소집단으로 쪼개지고 만다.

 

핀란드군은 이렇게 잘게 쪼개진 소련군 소부대를 "모티(장작)"이라 불렀다. 장작이 된 소련군의 최후는 죽어서 난로속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했다. 소련군 최강이라 불리던 139보병사단이 핀란드의 눈보라속에 녹아 없어졌고 그들을 구출하기 위해 투입된 75사단 역시 같은 운명이 되었다. 소련 병사들의 사인중에는 전사자보다 동사자 수가 훨씬 많았는데 부상을 입어 움직이지 못하고 가만히 있으면 알아서 얼어죽었기 때문이다.

 

전세를 역전하여 소련군을 몰아붙이던 핀란드에 희소식이 전해진다. 아무 잘못도 없는데 일방적으로 소련의 공격을 받은 핀란드를 동정한 스칸디나비아반도의 이웃사촌들이(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이 핀란드를 돕자고 나선 것이다. 이들도 힘없는 소국인지라, 도와줄 수 있는게 약간의 소총 정도였지만, 더욱 좋은 것은 이들 나라에서 자원해서 달려온 시민의용군들이었다.

 


특히나 유럽의 강소국 스웨덴은 대대적인 모금운동을 벌여 1억달러가 넘는 성금을 걷고, 25대의 최신 항공기와 8000명의 의용군을 지원하는 적극성을 보였다. 이보다 더욱 감동적인 것은. 해외에 살고있던 핀란드 동포들이 조국을 지키기 위해 자발적으로 귀향한 것이었다. 소련군도 뒤늦게야 이 동토의 원시림에서는 전차보다 잘 훈련된 스키부대가 낫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타고난 숲의 전사들인 핀란드 병사들이 보기에 소련 스키부대는 엉성하기 짝이없는 초보자들에 불과했다.

 

소련군이 패배의 패배를 거듭하자 마침내 스탈린은 울화통이 폭발하고 말았다. 사회주의 국가에는 이럴 때 사용하라고 있는 "숙청"이라는 아주 편리한 제도가 있었고, 군사령관을 하루아침에 이등병으로 강등시키거나 즉결 처형시켜버리는 이런 무자비한 방법은 전쟁중이라고 멈출 스탈린이 아니었다. 스탈린이 핀란드 주둔군의 지휘관을 몽땅 바꿔버린 것 때문이지는 분명치 않지만, 90만명의 병력과 2800문의 화포를 추가로 배치한 것은 분명 효과가 있었다. 한 해가 지난 1940년 소련군은 자신들의 약점을 대대적인 공군의 지원으로 보완하고 다시 안정을 되찾고 있었다. 핀란드군이 아무리 신출귀몰한 게릴라전을 펼치더라도, 그들도 어딘가로부터 보급을 받아야 싸울 수 있고 그 보급물자의 근원지는 수도 헬싱킹 같은 대도시였다.

 

소련군은 1940년 1월 한 달 동안 7000회 이상의 공중폭격으로 이 도시들을 철저히 때려부쉈다. 숲속의 아늑하고 은밀한 막사도 공중에서의 총알세례를 받았고, 이런 예전과 같은 우위가 사라지자 핀란드군 안에서도 동사자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소수정예의 게릴라전도 압도적인 우위의 적은 괴롭힐 순 있어도 전체적인 전세를 역전시키는덴 한계가 있었다.

 

2월 11일. 소련군은 강력한 전차부대를 앞세우고 카렐리아 회랑지대 전체에 대대적인 공세에 나섰고, 그에 앞서 수 백문의 야포가 일제히 불을 뿜어 핀란드군의 방어라인을 완전히 파 뒤집어놓은 한편으로 전투공병대가 대전차 방해물을 폭파하고 지뢰를 제거하기 시작하였을 때 용감한 핀란드군의 무운도 끝나가도 있었다. 따로놀던 소련군도 각 병과간의 유기적인 합동작전의 개념을 깨닫고 말았기 때문이다. 소련군은 스키를 신은 공병대원을 앞세워 대전차 함정을 색출하는 한편 전차에는 보병 지원조를 탑승시켜 핀란드군의 몰로토프 칵테일 세례에 대비하기 시작했다. 전차부대가 온통 헤집어놓은 뒤 보병부대가 그 뒤를 따랐고, 이들의 뒤는 강력한 포병대가 맹렬한 일제사격으로 엄호했다.

 

막대한 희생을 치르고서야 독일군의 전격전 비슷한 현대전의 원리를 깨우쳐가는 소련군에게 핀란드군의 게릴라 전술은 먹혀들지 않았다. 절망적인 생존의 몸부림을 치는 핀란드군은 지금까지 버틴것만 해도 자신들의 전력을 뛰어넘는 엄청난 선전이었지만, 지금까지 핀란드군을 도와준 매서운 겨울이 점차 끝나갈 기미를 보이고 있었다. 이제 눈과 얼음이 녹기 시작하면 소련군 전차가 진흙탕에 빠져 고생을 좀 하겠지만, 4월의 따뜻한 날씨가 되면 진창길도 단단해질 것이고 이것은 소련군 전차가 핀란드 천제를 쑥대밭으로 만듬을 의미했지만..병력의 절반인 25000명의 전사자와 45000명이 넘는 부상자를 내고 실탄마저 바닥나기 시작한 핀란드군은 더이상 싸울 여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핀란드에서 벌어진 지 겨울전쟁을 보는 유럽 각국의 시선은 각각 달랐다. 영국과 프랑스는 "어쩔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자신들도 눈앞의 독일이 무서워서 한발짝도 움직이기 힘든 상태였고. 소련을 적으로 돌리는 것은 더욱 싫었기 때문이다.

 

한 편 히틀러는 그 해 겨울내내 느긋하게 팔짱을 끼고 이 전쟁을 흥미롭게 관전했다. 지금은 불편한 동맹을 맺고있지만, 한 번도 진정한 우방이라고 생각해본적 없는 소련이 약소국 핀란드에게 얻어맞는 꼴을 지켜보는 것은 아주 유쾌한 일이었다. 히틀러는 두 가지 생각을 했을 것이다. 하나는 의외로 형편없는 소련군을 언젠가 독일군이 사정없이 짓밟은 뒤 소련을 독일의 수중에 넣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작지만 야무지고 쓸모있는 이 핀란드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마침내 핀란드는 눈물을 머금고 소련에게 항복했다. 하지만, 소련군은 승리의 기쁨보단 이 지옥에서 벗어난 기쁨이 더 컸다. 최소 20만명이 전사하고, 30만명이 부상당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치부를 숨기는 공산국가의 특성상 실제 사상자는 이것의 2배에 이를 가능성이 높다. 핀란드 이상으로 종전을 갈망하던 소련은 핀란든 전체영토의 15%에 달하는 4만㎢의 영토와 질 좋은 구리, 망간, 마그네슘의 자원을 "공식적으로" 수탈하는 몇 가지 제안을 내걸고 휴전을 제의했다. 3달간 필사적으로 싸운 핀란드로서는 파멸적인 손실과 굴욕이었지만, 생존을 위해서는 승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40년 3월 13일 오전 11시에 끝난. 이 짧은 겨울전쟁은 세계의 주목을 끌지 못했다. 핀란드는 온 유럽의 시선이 집중된 독불국경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고, 이때까지만 해도 스탈린을 히틀러 만큼이나 위험하게 보는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 작은 전쟁은 서유럽에서 본격적으로 타오른 2차 세계대전의 초반부에 일어난 막간극에 불과했고, 오늘날의 화*을 지칭하는 "몰로토프 칵테일"이란 숙어 하나만 남긴 채 곧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멀어져 갔다.

 


한 가지 주목할 점은..철수하는 소련군이 핀란드의 모든 산업물자와 자원, 심지어 개인주택의 욕조까지 뜯어갔지만. 웬 일인지 핀란드군의 장비에는 손끝 하나도 안대고 물러났다. 또한 정전 후의 핀란드군의 재무장을 제한하는 어떤 귀절도 삽입시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소련은, 엄청나게 잘 싸운 핀란드군에게 경외감을 느껴서인지도 모르겠지만, 아마도 핀란드가 다시는 재기하지 못하리라 생각했을 것이지만, 이것은 오판임이 증명된다.

 

전쟁 중반, 프랑스를 점령한 후 방향을 180도 틀어 소련을 공격하기 위해 동유럽으로 치고 올라온 독일과 아주 돈독한 관계를 맺은 핀란드는 주축국의 일원으로 소련군과 다시 싸우게 되었던 것이다.

(여담이지만, 스탈린그라드 전투 후 소련의 반격으로 수세에 몰린 독일의 패색이 짖어지자 핀란드는 신기에 가까운 외줄타기 외교술로 소련을 다시 설득하고 독일을 일방적으로 배신해버린다. 이 과정에서 핀란드군과 독일군 사이의 아주 드라마틱한 장면이 연출된다.)

 

자료출처 http://cafe.daum.net/dcvf/o293/1?docid=1jw5m|o293|1|20091129121346&q=%b0%dc%bf%ef%c0%fc%c0%ef&srchid=ccb1jw5m|o293|1|2009112912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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