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을뒤적여보니 고등학교 역사부도에도 나오시더라구요 ㅎ_ㅎ
우리 정사에서 잊혀진 고구려의 명장 강이식 장군에 대한 글입니다.
어찌하여 이러한 명장이 우리의 정사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걸까요? 반드시 반성하고 고찰하여야 할 우리의 사명입니다.
영양왕 재위 8년이자, 수문제 재위 17년째이기도 한 이때 남북조시대의 혼란기를 통일한 수나라와 국원(요동과 만주를 통틀어서 당시는 국원이라 불렀으며, 중국의 중원과는 전혀 다른 세계를 말한다.)의 충돌이 임박하게 되었습니다.
수나라는 고구려의 제 25대황제 평원왕 재위 당시에도 수차례 사신을 보내어 조공과 봉작을 요구하였습니다. 조공은 공물을 바치라는 것이며, 봉작은 수나라의 관직을 수여받고 밑으로 들어오라는 것 이었습니다.
그러나 평원왕은 이를 강력히 거부하였으며, 심지어 수나라와의 전면전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수나라와 고구려는 이미 평원왕대부터 그 갈등이 극단적으로 점철되고 있었습니다. 수나라의 입장에서는 비록 한족의 중원은 통일을 했지만, 국원이란 전혀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은 통일왕조라고 자부할 수도 없었거니와 고구려의 강성한 국력이 수나라로선 매우 부담스런 지경에 이르르고 있었습니다.
고구려도 이에 대한 대응조치가 결코 만만치 않았습니다. 평원왕 재위 당시에는 요하에 배치된 서부욕살 휘하의 병력이 5만에서 15만으로 증편되었으며, 요동도사 고승에게는 6만의 병력을 파견하는 등 요동전선의 군사력을 20만이 넘게 배치를 하였습니다. 이에 수나라도 탁군, 북평, 등주를 잇는 곳으로 총 20만의 병력을 전진배치했으니 양측간의 긴장은 갈수록 크게 고조되었습니다.
이것은 단일전쟁으로서는 그 규모가 준세계대전급 규모이자 국력을 결집한 장기전이 될 고수전쟁의 서막으로 떠오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대외강경론을 펼치며, 신라와 백제에 대한 압박의 수위를 넓혔던 평원왕은 590년 사망하고, 영양왕이 즉위하였는데...
상황은 별반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수문제는 더더욱 고구려를 압박해들어왔습니다. 고구려와 오랜 동맹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돌궐을 압박하였으며, 고구려의 밑에 있는 신라와 백제를 조종해 고구려를 공격하려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고립외교술에 영양왕은 굴하지 않고, 수나라에 대한 전면적인 군사적대응을 검토하게 됩니다. 그러는 가운데 고구려조정은 강경파와 온건파로 나누어 치열하게 정쟁을 벌이게 됩니다.
이에 영양왕은 온건파의 대신들을 모두 갈아치우고, 강경파의 대신들과 장수들로 조정을 채워넣게 됩니다. 이런 사실에 큰 위기감을 느낀 수나라는 서기 597년 고구려에 선전포고나 다름없는 국서를 보내오게 되는데, 내용이 다음과 같습니다.
[그대 고구려의 땅이 넓다한들 우리 수나라만 할 것이며, 요하가 넓다한들 어찌 장강만 하겠는가. 어찌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역하려 하는 것이며 창과 검을 만들고 활을 만드는 이유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너희 고구려의 왕은 판단을 잘하여 멸망의 화를 자초하지 말라.]
이 말은 곧 봉작을 받아 속국으로 들어오라는 이야깁니다. 영양왕은 극도로 분노했고, 수나라와의 어떠한 외교적 협상도 없다는 사실을 알리는 글을 수문제에게 보내게 됩니다.
[도의를 상실한 귀국의 문건은 참으로 잘 받았소. 허나 우리는 도의도 모르는 족속들의 밑에 들어갈 의사는 하나도 없으며, 차후로 우린 붓으로 화답치 않고 오직 칼로서 화답을 할 것이오. 더 이상 붓대를 놀리지 말고, 정당히 칼로서 상대를 하도록 하시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든 받아들일 용의가 있소.]
이와같은 서한을 보내게 되는데 서곽잡록의 기록을 현대적인 어체로 바꾸어놓은 것이며, 위의 것은 삼국사기와 수서의 기록을 현대적인 어체로 보기 쉽게 바꾸어놓은 것입니다.
수나라에 이와같은 서한을 보내자 수문제는 한왕 양과 왕세적을 대장군으로 삼았으며, 주라후를 수군대장군으로 삼아 총 37만의 원정군을 편성하고, 고구려를 공격할 준비를 갖추게 됩니다.
이를 직감한 고구려는 이듬해 서기 598년 1월 영양왕의 친정지휘하에 말갈기병 1만과 고구려 정예 개마병 5만의 병력을 합한 도합 6만의 군대가 요서를 향해 총공세를 퍼붓게 됩니다.
6만의 고구려대군이 급습을 하자 수나라의 변방군대는 만리장성을 싸고 버텼지만, 불과 며칠만에 격파되었고, 고구려군은 조양군에 입성하게 됩니다. 수나라군은 번번히 참패하여 영주성까지 밀려나게 되었고, 영양왕은 병마원수 강이식장군을 시켜 영주총관 위충의 군대와 일전을 겨루게 합니다.
기록에는 그가 최선을 다해 고구려군을 막았다고 되어 있지만, 이후로 그의 행적은 나타나지 않고 있으며 또한 그가 고구려군을 막는 전공을 세웠다면 그에 대한 뭔가가 존재해야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다 사라져버립니다.
그리고 이후 고수전쟁 제 1차전의 주장은 병마원수 강이식장군이 맡아 영주성보다도 아래에 있는 임유관에서 상대했던 점을 감안하면, 영주총관 위충은 강이식장군이 이끌던 돌격대에 전사했을 가능성이 크며, 영주성도 이미 고구려군에 의해 낙차가 되었을 것입니다.
수나라가 37만의 대군을 형성을 하기도 전에 삽시간에 만리장성, 대산, 어양, 북평, 조양, 영주성까지 모두 격파되어 요서가 사실상 고구려군에 낙차되자 수문제는 당시 조정에서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병력을 동원하게 됩니다. 수나라의 당시 가용병력은 약 60만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중 고구려를 치러 나간 병력은 총 37만명이나 됩니다. 즉 23만명의 병력을 뺀 나머지가 다 나갔다면, 수나라로서는 수비군을 제외한 그야말로 정규관군이란 관군은 모두 동원한 총력전이 되는 것입니다.
598년 5월로 접어들어 수나라의 37만대군이 등주, 강소성등지를 출발하여 고구려가 구축한 요격전진전선인 요서로 들이닥치게 됩니다. 영양왕은 승리직후에 요동성으로 돌아가 전시조정을 이끌고 있었고, 수나라군에 대응할 고구려의 요격군 원정대장은 병마원수 강이식장군이 맡게 됩니다.
강이식장군의 휘하에 있던 고구려군은 기병1만에 보병5만의 총 6만명정도의 병력으로 영양왕이 요동성으로 돌아가면서 모든 지휘권을 강이식장군에게 일임했던 것입니다. 고구려군은 임유관에서 밀리면 만리장성을 거쳐 요하를 통해 요동성으로 퇴각해야 했으므로, 37만이나 되는 수나라군을 요서에서 물리치지 않으면 안되는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에 도래하게 됩니다.
이때는 신라와 백제와 고구려의 남변에서 소란을 피우고 있는지라 약 10만의 병력을 한반도 남부에 배치해야 했고, 따라서 요동에 배치된 고구려군의 전력으론 강이식장군의 요격군에 더 많은 지원군을 보낸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수나라는 육군이 30만, 수군이 7만으로 이뤄졌으며 이들중 수군7만은 고구려의 수도를 직공한다는 당찬 계획까지 세웠던 것입니다.
이렇게 운명의 결전은 598년 음력 6월 1일부터 임유관에서 벌어지게 됩니다. 임유관에서 수나라의 30만대군을 맞이한 강이식의 6만군대는 고지를 확실하게 점거하고, 기병부대를 이용한 기동전을 전개하여 수나라의 30만대군을 상대하게 됩니다. 한편으로 수군 7만은 육군의 보급과 더불어 고구려수도를 직공하기 위해 돌격하게 됩니다.
또한 임유관의 고구려군이 워낙 잘버텨내자 수나라군은 진법을 전개하며, 포차와 석포, 쇠뇌를 이용해 맹렬히 공격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고구려군은 검차를 만들고, 큰 방패를 만들어 방어하였으며 개개인의 무술실력과 기량이 뛰어난 고구려군은 병력을 100-200명 단위로 나누어 야습을 감행하고, 게릴라전을 통해 수나라군을 극도로 지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강이식장군은 고구려 수군의 협조를 얻어 수나라의 수군을 6월 4일, 발해만으로 유인하여 대규모의 해전을 치루게 됩니다. 당시 고구려수군은 약 2만명 정도였고, 수나라의 수군은 7만명이었는데 이들의 접전은 무려 보름간이나 이어진 매우 치열한 공방전이었고, 이 공방전에서 수나라군은 수군의 절반이상을 잃는 참패를 당하게 됩니다.
발해만에서 일어난 이 해전의 참패는 수나라군의 보급로를 차단하여, 임유관으로의 진입을 봉쇄하였으며 더더욱 상황을 수나라에 불리하게 만드는 계기를 마련하게 됩니다. 수문제는 자존심이 상할대로 상하였고, 고구려군에 의해 오히려 장난감처럼 놀림을 당하자 강공을 퍼부으라는 지시를 내리게 됩니다.
강이식장군의 요격군에 고구려수군은 매우 적극적으로 협조하였고, 수나라의 수군이 진입이 예상되는 지역은 어린진(漁鱗陣)을 펴서 완전히 봉쇄하게 됩니다.
한편, 임유관을 공격한 수나라군은 6월 20일 경에 이르르자 자체보급물자마저도 거의 파산에 이르렀습니다. 더구나 고구려군은 지형, 지리를 이용하며 교통로를 봉쇄하여 육상보급로까지 차단하고 군수물자를 탈취하였으니 수나라육군이 지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고구려철기병이 부월수, 창검수로 정교하게 이뤄진 엄호를 받으며 맹렬하게 몰아치는 개마기병전술(鎧馬騎兵戰術)에는 완전히 속수무책이어서 보병위주로만 이뤄진 그들의 군대는 차츰차츰 밀리기 시작하고, 군중의 질서마저 붕괴상태로 접어들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지형, 지리를 이용하여 유리한 고지를 계속 선점해 나가며 수많은 전지교선(戰地交線: 전지교선이란 고지전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면서, 만약 한 고지가 붕괴더라도 다른 유리한 고지로 옮겨붙어 얼마든지 적군을 교란하거나 혼란에 빠트리고 그 세력을 여러갈래로 떨어뜨리게 만들 수 있는 작전으로서, 훗날 6.25전쟁에서 중공군을 상대하기 위해 우세한 화력(당시는 기병을 이용한 돌파력)을 이용한 전지교선작전으로 그들의 세력을 떨어뜨려 각개격파시키는 방법을 체택하여 75만의 중공군이 결국 맥을 못추게 만들었습니다.)의 책략을 이용하며, 수나라군을 제멋대로 가지고 놀았던 것입니다.
졸지에 6개군단 30개사단의 대병력이 불과 1개군단 6개사단 병력에 처참하게 당하는 꼴이 되었습니다. 하나의 고지를 쳐부술때마다 세력이 분산되어 입는 피해가 매우 막대하였을 뿐아니라 고구려군의 탁월한 지위진(地衛陣: 땅을 지킨다는 진형으로 실제로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지형기물을 끼고서는 그것으로서 세력적 열세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으로 말한다. 통상 이것은 훗날 병력의 열세를 화력과 같은 조건으로 극복하게 하는 것으로 유용하게 쓰였는데, 밑으로 쳐들어오는 적군을 큰 나무위로 올라가거나, 산등성이나 바윗돌을 타면서 길게 늘어지는 장사진(長蛇陳)을 형성하게 되는데, 장사진의 원조가 바로 이 지위진인 것입니다.)
지위진을 통하여 더더욱 수나라군을 지치게 만들었고, 이미 20여일간의 접전으로 병력의 절반이 전사하거나, 도망치거나 포로가 되었습니다. 이후로는 보급이 끊겨 병으로 죽거나, 굶어죽게 되었고, 얼마되지 않는 음식을 놓고 서로 싸우는 자중지란으로 죽는 병사가 속출하게 됩니다.
수나라의 수군은 이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뚫으려 곤형(|形)의 진형으로 전선을 몰아갔지만, 고구려수군의 철통같은 어린진의 경계망을 뚫지 못하여 번번히 낭패를 보게 됩니다.
이때 강이식장군은 수나라의 수군대장 주라후의 수군전체를 완전히 궤멸시키기 위해서 병마원수의 자격으로 수군을 동시에 지휘하여, 수나라의 수군을 발해만을 거쳐 장산군도까지 이동시켜 극도로 지치게 한 다음에 어린진으로 총공격을 가해 많은 배를 격침시키고, 군수물자를 노획하는 크나큰 전공을 세웁니다.
598년 6월 말.
주라후의 수군이 완전히 전멸하자, 7월에 접어들어 극도로 지치기 시작한 수나라군은 전의를 상실하게 되었고 제대로 전쟁조차 수행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르게 됩니다. 그럼에도 수문제는 철수령을 내리지않고 끝까지 싸우라 종용하였습니다.
그러나 8월로 접어들어 이제는 전투중에 죽는 군사보다도 병과 굶주림, 자중지란에 시달려 죽는 병력이 늘었고 현지의 장수들까지도 이제는 배고픔에 못견뎌 인육을 먹는 지경에까지 이르르자 그제서야 철수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들은 좋아 모든 경계가 흩어지고, 오직 생지를 향해 철수하게 되는데 한달에 가까운 소강상태 동안에 전력을 정비한 고구려군은 3만의 병력을 몰아가 퇴각하는 수나라군대의 허리를 쳐서 거의 모든 병력을 궤멸시키게 됩니다.
이로서 고구려와 수나라와의 제 1차전쟁은 수나라의 철저한 완패로 끝이 나게 되었습니다. 병마원수 강이식장군과 그에 대한 전폭적인 협조를 아끼지 않았던 이름없는 고구려의 장수, 그리고 나라에 대한 사랑과 백성에 대한 사랑으로 똘똘뭉쳐 강이식장군의 전략과 지휘력을 믿고 따라준 총 8만의 군사들이 함께 했기에 이룰 수 있었던 자랑스런 쾌거 였으며, 강이식장군의 능력을 알아보고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던 영양왕의 탁월한 안목에 의해 이룰 수 있었던 매우 값진 승리였습니다
+이상한글보단 이게 더나을거같아서 올려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