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전선(4) - 반격의 시작.

케이즈 작성일 14.02.02 21:14:55 수정일 21.01.26 17: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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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세계2차대전사에 대한 흥미위주의 글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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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8월, 계속되는 패배에 깊은 상처를 안고 있던 영국 제8군에 새로운 사령관이 부임해왔다.

다음은 그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다.

"싸움에 임할때는 불굴의 의지를 발휘하지만 승리를 거두는 순간에는 한없이 오만해지는 사람."

"가라앉은 부하들의 사기를 고무시켜 놓는데 탁월한 동기유발의 명수.

비판적인 성격과 함께 지나칠 정도의 신중함.

오직 철저히 준비만을 신봉하는 완벽주의자. 그리고 때로는 다소 소심함."

바로 '버나드 로우 몽고메리' 중장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이다.

 

흔히 비평가들이 각국의 군대 성격을 평할 때,

독일군이 뛰어난 천재라고 평가한다면 영국은 착실한 모범생이라고 비유한다.

1차대전의 잿더미속에서 자신들을 옥죄고 있던 조약의 제한규정들을 요리조리 빠져나가

10년만에 유럽 최강의 군대를 재건하고, 개전 수개월만에 유럽을 석권해버린 독일의 능력은

천재에 평가받기 충분했다.

그에 비해 영국인들은 이런 타고난 천재성과는 거리가 있어보였다.

개전 초기 독일군에 밀려 패전을 거듭하다가 치욕적인 철수를 감수해야만 했고,

그 이후에도 연거푸 고배를 마셨다.

하지만 영국군의 진정한 강점은 번뜩이는 천재성이 아니라

원칙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는 그들의 평범함속에 숨어있다고 평해진다.

영국인들은 패배속에서도 좌절하는 법이 없었고, 절대적인 수세속에서도 희망을 놓는 법이 없었다.

 

1941년, 런던 본토 항공전이 그 좋은 예다.

런던이 온통 불바다로 변해버린 속에서도 꾸준히 항공기와 전차를 만들어 전선으로 내보내는 한편

한시도 필승의 집념을 늦춘 적이 없었다.

그 결과 마침내 절대적 열세였던 싸움에서 이겨내 괴링의 독일 공군을 물리쳐보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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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영국 본토 항공전은 숫자와 성능으로는 계산하기 힘든 극적인 승리였다.)

 

이처럼 판이하게 다른 두 나라의 성격은 지도자들의 면모에서도 확실하게 드러났는데,

독일 총통 히틀러는 자신의 '천재적인 직관력'을 철저하게 신봉한 나머지 모든 정치와 군사를 한손에 쥐고 주물렀다.

반면 처칠 수상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신이 소싯적에는 열등생이었다는 농담을 하곤 했다.

(실제로는 별로 그렇지도 않았다고 한다.)

또한 정적들로부터 무능을 비판당했던 그저 '보통사람'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어려운 상황속에서 국민들을 향해 피와 땀과 눈물을 호소했고, 그 자신히 솔선수범해보였다.

게다가 국왕 조지 6세의 왕비까지 버킹검 궁전의 커튼을 찢어 만든 붕대로 부상자 치료에 나설만큼

고하를 막론하고 일치단결했던 나라가 바로 영국이었다.

 

사설이 길었던 이유는 앞으로 펼쳐질 1942년 말의 아프리카 전선이

바로 이런 두 나라의 성격이 잘 드러난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상식적인 전술원칙보다는 자유분방하게 구사하는 그의 전술은 적의 의표를 찌르고,

승기가 포착되기만 하면 지체없이 그것을 잡아채는 전술은 그의 군사적 천재성을 보여주는 좋은 예였다.

반면 영국의 몽고메리 장군은 앞서 묘사한 성격 그대로 철저한 원칙주의자였다.

그는 우연이나 요행을 믿지 않았으며 오직 교과서적인 철저한 준비와 산술적 결과만을 신봉했다.

몽고메리가 주장하는 바는 단 한가지였다.

"이길 수 밖에 없는 모든 조건이 갖춰졌을 때 싸움을 시작하면 반드시 이긴다."

2차대전의 판세를 뒤집어 놓았다고 불리워지는 두 전투-

스탈린그라드에서의 승리와 엘 알라메인의 승리중에서

엘 알라메인의 승리는 원칙을 고수하고 부단하게 노력한 몽고메리가

롬멜의 천재성을 꺾어보인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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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길수 밖에 없는 싸움을 만드는 것. 듣기엔 간단하지만 매우 어려운 작업이다.)

 

몽고메리가 엘 알레메인에 도착하여 해야했던 일은 바닥까지 떨어진 제8군의 사기를 끌어올리는 일이었다.

그는 전임 상급자 오킨레크 대장이 세워놓았던 계획서-

엘 알라메인 방어선이 돌파당하면 나일강 삼각주까지 철수한다는 내용이 담긴 계획서를 찢어버렸다.

"이런 계획은 있을 수 없다. 오늘부로 우리는 여기서 한치도 물러나지 않는다.

나를 포함한 제8군은 죽더라도 모두 여기서 죽는다."

그렇게 큰소리를 친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군기를 잡는 것이었다.

총과 장비는 항상 잘 손질되어 있어야했고, 장교들은 항상 깨끗하게 다림질한 바지를 입어야했다.

"군기가 빠진 군대는 이미 전투의 절반을 지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당연히 불만이 나올 상황이었지만 불평이 나올 시간조차 없어졌다.

눈만 뜨면 훈련소에서 겪었던 것 보다 더 혹독한 훈련에 내몰렸기 때문이다.

 

실전에 투입된 병력을 적의 코앞에서 다시 훈련시키는 일은 결코 흔한 일이 아니지만, 여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몽고메리 부임과 더불어 보내진 신규 증원병력이 대부분 실전경험이 없는 신참들이었기 때문이다.

4만 이상의 병력과 800여문의 여포, 1000여대의 전차들이 새로 보충된 상황에서

처칠 수상은 거의 매일같이 반격에 나설것을 요구하고 있었고,

그것을 제대로 실현시키려면 이 얼빠진 신병들을 최정예로 만들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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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여대의 전차 중 300여대는 미국제 신형 셔먼전차였다.)

이런 나날이 계속되는 가운데 제8군 병사들은 패배의 굴욕에서 벗어나 점점 자신감을 찾기 시작했고

그것을 확인할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독일군이 그동안 공격에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던 이유는

다른 우회로가 전혀 없는 진형의 특성 상 정면의 적을 공격하여 부수고 나가야했고,

이것은 뒤집어 말해 영국군도 반격을 가하기 위해서는 정면의 적을 뚫고 나가야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정면 승부에서는 더 많은 병력과 화력을 갖고 있는 쪽이 이길 확률이 높았다.

 

1942년 8월 내내 처칠로부터 공세로 나설것을 재촉받고 있었지만,

몽고메리는 '그럼 다른 지휘관을 구해라'라고 협박을 해가며 시간을 끌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징후를 알아챈 롬멜이 선수를 치기로 마음먹었다.

성동격서의 전법으로 영국군의 진형을 무너뜨리려고 하였고,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신속한 이동이 생명이었다.

그러나 독일군은 영국군이 치밀하게 매설해둔 지뢰지대에 걸려 하루를 허비하고 만다.

간신히 지뢰를 제거하고 돌파하는 듯 했지만, 그곳에는 상당한 숫자의 영국군 전차들이 매복하고 있었다.

몽고메리가 롬멜이 사용한 전법을 연구하여 파놓은 함정이었다.

75mm주포를 장비한 미국제 M3그란트전차의 화력에 그동안 독일군이 기대온 성능의 우위는 무너지고 말았다.

 

이틀에 걸쳐 치열한 전차전이 벌어졌고, 제공권을 장악한 영국 공군의 공습까지 이어져

9월 3일, 총퇴각 명령이 떨어지기 전까지 독일군은 49대의 전차를 잃고 말았다.

만성적 보급물자 부족에 시달렸던 독일군에게는 뼈아픈 손실이었으며,

오랜만에 제대로 된 승리를 맛본 영국군은 마침내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찾게 되었다.

영국군은 독일군의 공세를 성공적으로 막아내었고,

이것은 몽고메리가 스스로 이야기 한 '이길 수 밖에 없는 준비'를 끝낼때까지

적어도 독일군이 먼저 공격을 걸어올 일은 없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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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저하게 대비해놓은 몽고메리에게 당한 롬멜.)

 

천재의 천적은 모범생이라는 말이 있는데,

비록 그 자신이 스스로 기발한 발상을 해내지는 못하지만

부단한 노력으로 필요한 것을 빨리 배워나가고, 때로는 적의 것에서도 배울 수 있기 때문에

재능에 의지하는 천재를 언젠가는 능가할 수 있다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몽고메리는 곧 시작될 영국군의 공격이 남쪽을 중심으로 시작 될 것처럼 준비를 진행했는데,

이것은 롬멜이 즐겨사용하던 기만전술을 그대로 차용한 것이었다.

독일 정찰기의 눈을 속이기 위해 나무와 천으로 만든 대규모 가짜 전차부대를 남쪽진지에 배치했고,

그 후방에는 빈 상자들을 산더미처럼 쌓아 보급물자처럼 보이게 했다.

또한 빈 드럼통을 이어붙여 가짜 송수관을 만들어 적에게 잘못된 정보가 가도록 유도하였다.

대신 진짜 보급물자나 중장비는 모래밭의 참호속에 숨겨진 채로 있었다.

 

공격개시일이 다가오자 마침내 제8군의 전력은 거의 모든 면에서 독일군의 두배에 달하고 있었다.

병력수는 19만대 10만, 전차는 1029대와 469대, 각종 야포와 대전차포 역시 비슷한 수준의 격차가 벌어져 있었다.

특히 탄약, 연료, 피복과 식량같은 소모품은 영국군이 월등히 좋았다.

게다가 이 시기, 롬멜은 위장병이 도진데다 디프테리아(급성감염질환)에 걸려 9월말부터 아프리카를 떠나 있었다.

그 후임으로 온 게오르그 시투메 대장 또한 고혈압과 심장병에 시달리고 있었다.

 

10월 23일 오후 9시30분.

희미한 폭음이 동쪽에서부터 들려오기 시작했다.

추축군 비행장을 폭격하기 위한 연합군 항공기들이 영국군의 머리위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9시45분. 영국군 포병의 굉음소리가 들리자

그제서야 말로만 떠돌던 대반격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모두 알아차리게 되었다.

첫번째 폭발음이 들리자 독일 제 164사단장 '룽스 하우젠'소장이 신음하듯 내뱉었다.

"영국군의 일제공격이다."

 

900여문에 달하는 영국군 포대에서 분간 평균 900~1000발의 비율로 포탄이 발사되고 있었고,

이것은 그대로 추축군의 진지를 뒤집어놓았다.

최초 포격에 독일군의 통신망이 무력화 되어버렸고,

시투메 대장은 직접 상황을 살펴볼 요량으로 지휘소를 나섰다가

오스트레일리아군 기관총에 당하고 말았다. 대대적인 공격이 시작되자마자 지휘관을 잃어버린 것이다.

밤 10시. 영국군 보병의 진격이 개시되었다.

이 진격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독일군의 지뢰밭을 통과하는 부분이었고,

지뢰를 제거하는 동안 그들이 받을 수 있는 제대로 된 엄호는 없었다.

새벽이 올때까지 필사적으로 지뢰를 제거하였고, 씨포트 하이랜더 연대는 1개 대대를 고스란히 잃기도 하였지만

작업속도는 턱없이 더디기만 하였다.

결국 기다리다 못한 몽고메리가 공격 명령을 내렸다.

"지뢰가 제거되었든, 아니든간에 전차부대를 정면으로 보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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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고메리의 진격명령을 들은 전차장의 속마음.JPG)

 

전차부대가 마지못해 지뢰지대로 들어서자 독일 공군기들이 날아들었다.

몇대의 전차와 트럭이 불타올랐고, 이것은 독일군 대전차포의 시야를 확보시켜주었다.

순식간에 영국군 전차 27대가 파괴되었다.

"이러다간 전멸당합니다. 공격을 중지해야합니다."

룸즈덴 중장이 퇴각을 요청했지만 몽고메리는 이를 거절했다.

"우리에겐 아직 900대의 전차가 남아있소. 그것들은 이 전투를 위한 소모품이오.

만약 싫다면 지휘권을 반납하시오. 다른사람에게 작전권을 넘길테니."

동이 틀때까지 영국군은 50여대의 전차와 6000명 이상의 병력을 잃었지만 공격은 끝나지 않았다.

 

제10군단의 전차들은 만신창이가 된채로 지뢰지대를 돌파하였고,

그때부터 철저하게 보복을 하기 시작했다.

전차병들은 적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상반신을 드러낸채로 전차에 거치된 기관총을 쏘아댔고,

셔먼전차의 캐터필러로 독일군 포병을 깔아뭉겠다.

그날 저녁, 롬멜이 급히 아프리카로 날아왔지만 전황은 상상 이상으로 안좋았다.

히틀러가 신무기 '네벨베르퍼'다연장 로켓포와 '티이거'중전차를 보내준다 약속했지만

그것보다도 일단 전차를 움직일 연료가 부족한 상황이었다.

 

지형이 단조롭고 기동로가 따로 없는 사막전의 특성 상 병력과 장비의 숫자가 절대적으로 유리했고,

이런 상황은 27일 아침, 독일군의 전선이 무너지면서 드러나기 시작했다.

영국군의 주공을 정면으로 맞이한 독일 제15기갑사단은 119대의 전차 중 31대만이 남았다.

물론, 영국군쪽에서도 문제가 발생되기 시작했다.

너무 많은 차량과 병력이 좁은 공격로에 집중되므로써 엄청난 교통체증을 불러왔고

이대로라면 병력의 우위에 관계없는 1:1상황이 만들어질 터였다.

이를 해결한 것은 오스트레일리아 군이었다. 그들이 북쪽 해안도로를 확보했고,

그곳은 바로 트리폴리, 토부룩으로 이어지는 독일군의 보급로였다.

곧바로 제1기갑사단이 급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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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군은 다른 것보다 연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보고를 받아들은 롬멜은 비장한 심정으로 연료를 모두 긁어모아 제21기갑사단에 분배한 다음 북쪽으로 급파했다.

설사 이긴다하더라도 그들에게 돌아올 연료는 없었다.

여기서 몽고메리난 마지막 결정타를 날렸다.

최정예 전차부대가 북쪽으로 이동한다는 보고를 받자마자 주 공세를 남쪽으로 돌려버린 것이다.

또한 북쪽으로 파견되었던 오스트레일리아 사단과 제1기갑사단도 방향을 틀어서

라만트랙이라 불리던 촌락에 설치된 추축군의 포대를 노리고 쳐들어갔다.

이들이 포대를 무력화시키면 연료가 떨어진 독일 제21기갑사단 전차들의 숨통을 끊어놓는다-

이것이 몽고메리가 구상한 2차작전의 개략이었다.

'슈퍼차지'라 불리운 이 작전의 핵심은 독일 제21기갑사단과 영국군 기갑부대 사이에 벌어질 전차전이었다.

"이 작전을 성공시키려면 최소한 우리 여단의 절반이 희생될 겁니다."

제 9기갑여단장 '존 큐어리' 준장의 말에 '프레이버그' 소장이 답했다.

"그래? 몬티는 이미 당신과 내 부대가 전멸하는 사태까지 각오한 눈치던데."

 

11월 2일 새벽 1시.

열흘전 공격개시 상황이 고스란히 반복되었다.

치열한 포격이 미테리아 능선 너머 지뢰밭을 향하여 쏟아지면서 공격은 시작되었다.

3분 간격으로 90m씩 앞쪽으로 이동하는 집중사격을 따라 뉴질랜드 사단의 장병들도 조금씩 나아갔다.

그로부터 네시간 뒤, 보병부대는 목표지점에 도달했다.

뒤이어 제 9기갑여단의 전차들이 달려왔지만, 침묵을 지키던 독일군의 대전차포에 직격으로 얻어맞고 말았다.

 

제 9기갑여단 전차들이 전멸직전에 내몰리면서까지 돌파구를 열었고,

제1기갑사단의 제2전차여단과 제8전차여단이 그 뒤를 이어 달려들었다.

한시간여간의 전투에서 70여대의 영국전차가 파괴되었지만,

겨우 살아남은 전차 몇대가 독일군 포대에 들이닥치자 상황은 일변했다.

본래는 이러기 전에 독일군의 제21,제15 기갑사단의 전차들이 영국전차들을 맞이하여야했지만

불행히도 연료가 거의 바닥난 후였다.

 

치열한 전투가 하루종일 계속 되었고 엄청난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양군의 전차들이 뒤엉켜 싸웠다.

그 와중 연료부족으로 멈춰서는 독일전차가 속출하였고

저녁 무렵 전차가 30여대로 줄었다는 보고를 받은 롬멜은 패배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100여대의 이탈리아 전차가 남아있다지만, 이것들이 미국제 신형전차의 상대가 될 수 없는 것은 뻔했다.

남은 전차들을 퇴각시킨 후 남은 연료량을 계산하고 있을 때,

히틀러로부터 분노에 찬 명령이 날아들어왔다.

"아프리카 군단의 장병들은 강철과 같은 의지로 현 위치를 사수하라.

병력과 장비가 부족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역사를 살펴보면 불굴의 의지로 적의 대부대를 격파한 사례는 수도 없이 많다."

명령서를 다 읽은 롬멜은 그저 고개를 조용히 저었고 '리히터 폰 토마' 대장은 좀 더 직설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건 한마디로 미친 사람의 넋두리다."

 

롬멜은 고민을 거듭한 후 철수를 명했고,

이것은 그동안 보여주었던 일시적인 전술적 후퇴와는 전혀 다른 성격의 것이었다.

토마 대장은 훈장이 주렁주렁 매달린 새 군복으로 갈아입고 영국군 포로가 되는 길을 택했다.

이것은 평소 히틀러의 보잘것 없는 출신성분을 은근히 조소해오던

자존심이 강한 프로이센 귀족 출신의 장군들이 궁지에 몰렸을 때 취하는 반발의 방식이었다.

어쨌든 이번 철수는 리비아에서 멈추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들의 안방이라고 할 수 있는 트리폴리까지 내어주고, 더 서쪽 튀니지까지 쫓겨나는 신세가 된 것이다.

 

물론 영국군의 피해도 매우 컸다.

이 12일간의 전투에서 약 14000여명의 전사 또는 중상을 입었고,

제 9기갑여대는 단 12대의 전차만을 남긴, 사실상 전멸당하는 운명을 맞이하였다.

적이 패주하면 추격하는 것이 상식이지만,

이미 모든 기력을 소진해버린 제8군은 그대로 탈진해버렸고

다음날인 11월 5일부터 쏟아진 폭우는 독일군의 패주대열을 추적할 수 없게 만들어 버렸다.

몽고메리가 완전하게 추격전을 포기하는 것으로 엘 알라메인의 혈전은 끝났다.

 

"끝났다. 모두 끝났다. 이제 독일 놈들은 아주 끝장이 났다."

몽고메리의 그 말은 사실이었다.

이제 더이상 독일군이 아프리카에서 위세를 펼칠 일 따위는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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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퇴각한 잔존 부대들이 남아있었기는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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