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전선(1) - 무솔리니의 야망이 벌인 판.

케이즈 작성일 14.02.01 21:30:17 수정일 21.01.26 17:08:07
댓글 18조회 9,829추천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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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각키로 시작해봅시다)

 

 어떨까하고 글을 올렸는데

재밌게들 보시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

참고하고 있는 책은 덧글로 물어보신 분이 쓰신 것 처럼

'알기 쉬운 세계 2차대전사'이고요.

여기에 나온 내용이 100%진실이다, 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전체적인 흐름을 읽기 쉽게 풀어썼다는 점,

큰 틀에서 벗어나지 않게 흐르는 부분이 마음에 들어서 절판된 책임에도 출판사에 전화해서 구매했습니다.

(그런데 4권을 어이다 날려먹으신 아부지... 아놔...)

 

글을 올리는 이유는 정보전달 보다는 재밌는 유흥거리를 공유하자는 의미이기 때문에

'어라, 내가 알고 있는 사실과 다르잖아!'

라는 이야기는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 내용은 댓글로 달던가 글을 파시면 됩니다.)

 

'책 내용을 옮기는데 뭐 그리 수고스러운 척 하느냐'

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사실 책 내용에 쓸데없는 부분을 빼고

읽기 쉽게 옮기고, 사진도 첨부하고 하다보면 한두시간이 훌쩍갑니다.

아마 직접 글을 올리는 분들은 잘 알겁니다.

뭐 그냥 그렇다고요. 맥주한잔 했더니 잡소리가 많았네요.

 

사실 노르망디 상륙작전까지만 하고 끝내려했는데 좀 더 올리는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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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댓글로부터 시작되었다)

 

이 부분을 보고 '아프리카 전선도 적어볼까'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항공전을 더 올리고 싶었지만...)

롬멜을 이야기하려면 역시 아프리카전선부터 썰을 풀어야겠죠.

잡소리가 길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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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대 초, 아프리카 대륙 대부분은 유럽의 식민지였다.

특히 북아프리카와 중동 아시아 일대는 유럽 강대국들이 나눠먹고 있었는데

프랑스는 모로코와 알제리를,

영국은 노른자라고 할 수 있는 이집트를,

그리고 이번 글의 주역(?!)이 되는 이탈리아는 리비아, 에루트리아, 이디오피아, 소말릴랜드 등을 먹고 있었다.

 

독일? 독일은 아프리카에 별 연고가 없었다.

때문에 유럽에서 벌어진 전쟁을 해결하기도 바쁜 독일군이 아프리카까지 올 이유는 별로 없었다.

무솔리니가 뻘짓하기 전까지는.

 

1940년 6월경, 느닷없이 선전포고를 하고 프랑스에 쳐들어간 독일군의 뒤를

쫄래쫄래 따라가 남은 콩고물이라도 얻어먹어 보려는 시도를 했다가

'염치없는 도둑놈'이라는 조롱만 들었던 무솔리니가

'나도 내 몫을 챙겨먹을거야!'라며 눈을 돌린 곳이 발칸반도와 아프리카였다.

 

시기상으로 당시 영국군과 독일군은

영국 본토를 향한 폭격과 이를 막기위한 처절한 공중전이 펼쳐지고 있었는데

이 틈을 타 아프리카에서 자신의 입지를 늘려보겠다는 무솔리니의 계획은 썩 나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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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영국은 독일군의 공중공격을 정말 처절하게 막아내고 있었다. 이건 다음 기회에.)

 

1940년 6월 28일.

무솔리니가 로마의 베네치아 궁에서 아프리카를 먹겠다는 선언을 하면서

아프리카 전선의 대략적인 구도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무솔리니가 노리는 것은 이집트-수에즈 운하였고

이곳을 장악한다는 것은 아프리카 전체를 틀어쥐는 것과 다를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영국도 본토가 풍전등화인 와중에 중동사령부를 두면서까지

상당한 병력을 주둔시켜놓고 있었다.

 

곧 이탈리아군 25만이 선발되어 원정군이 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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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원정군 사령관 루돌포 그라찌아니. 풍부한 경험과 수많은 전공이 있는 인물이었다.)

 

당시 사령관으로 임명된 루돌포 그라찌아니는 이런 무솔리니의 계획에 펄쩍 뛰었다.

"영국군은 야만인들이 아닙니다. 이건 유럽 강대국과 벌이는 유럽의 전쟁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전공과 경험은 대부분 식민지 원주민과의 전쟁에서 쌓아진 것이었고

이탈리아군 자체도 경험이나 훈련이 충분하다고 볼 수 없었기 때문에

그의 항변은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자 무솔리니가 답변.

"영국군 전체가 아니라 고작 3만과 싸우라는 이야기임.

독일군이 영국 본토를 공격중이니 설마 원군을 보내 오겠음?"

3만 대 25만의 싸움이고 거기에 전차도 천대 딸려주겠다는 무솔리니의 말에

결국 그는 아프리카로 떠나게 되었다.

1940년 9월 13일. 마침내 리비아에서 이집트로 향하는 이탈리아군의 진격이 시작되었다.

 

잠깐. 6월에 선언해놓고 9월에 출발?

그렇다. 이미 석달의 시간을 허비하고 출정했다.

(독일군이 기습전으로 얼마나 재미를 봤는지에 비한다면...)

게다가 일주일 이상의 출정식까지 치룬 뒤였으므로 영국군은 충분한 준비를 모두 끝낼 수 있었다.

 

리비아와 이집트 사이에는 '서부사막'이라고 불리는 광대한 사막지대가 펼쳐져 있었는데

거의 대부분이 모래와 자갈로만 이루어진, 도로나 마을 따위가 전무한 곳이었다.

8만의 이탈리아군이 진군을 시작했는데 주력이 보병인 덕분에 진군 속도가 한없이 느렸다.

정작 이들이 타야할 트럭에는 전승기념비 따위가 실려져 있었다.

이들이 이집트 국경도시에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나흘 뒤였는데

그들을 본 영국군은 그대로 모두 철수해버렸다.

 

총한발 쏘지 않고 이 국경도시를 점령한 이탈리아군은 추격할 생각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방어태세로 전환해버렸다.

이탈리아군은 이집트 땅을 점령했다는 데에 만족한 듯 보였으나

최종목표인 알렉산드리아까지 아직 한참 남았다는 것을 감안하면 상당히 태평한 운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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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 늠름한 이탈리아군.)

 

어땠든 이런식으로 석달이 흘러갔다.

그동안 이탈리아군이 다음 공격을 착실히 준비했냐한다면 그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반격을 준비한 것은 영국군이었다.

이들이 그대로 철수하고 때를 기다린 이유가 있었는데,

바로 본국에서 올 신형 보병전차, '마틸다'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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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에서 전차가 갖는 의미는 상당히 크다.)

 

사막에서 오랫동안 굴러먹었던 영국군은 전차의 중요성에 대해 확실히 알고 있었으며

이들이 큰 전투를 하지도 않고 철수한 이유도 마땅한 전차가 없어서였다.

 

사막전은 일종의 해전과도 같아서 일정한 전선을 유지할 지형지물이 없다.

전차는 이런 사막에서 일종의 구축함 혹은 전함과도 같은 역할을 하며

적을 섬멸하는 가장 핵심적인 무기이다.

해상전에서 영토점령보다 적의 섬멸이 더 중요한 것처럼

(바다에 영토점령이라고 불릴만할 행위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사막전도 이와 유사한 형태로 흘러간다는 것을 영국군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이들은 이미 사막의 기후에 적응해있는- 말 그대로 베테랑들이었다.

 

11월, 드디어 그토록 고대하던 전차부대가 도착했다.

영국군은 반격을 위해 정찰기를 띄웠고, 적의 야영지를 촬영한 사진을 보며 오코너 장군이 말했다.

"보이스카웃 야영장 같군."

이탈리아군의 야영지 한가운데 지역을 전혀 경비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본 것이다.

만약 영국군이 이곳을 통과한다면 이탈리아군의 후방에 멋진 일격을 가할 수 있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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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군의 계획.jpg)

 

12월 6일 아침, 영국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때마친 불어닥친 모래폭풍 덕분에 이탈리아군의 시야가 가려졌고

이탈리아군의 정찰기도 이륙하지 못했다.

게다가 기밀유지도 완벽했던 것이

대다수의 영국군 병사들은 작전명령이 아닌 가라, 멈춰라, 등화관제해라 따위의 명령만을 들었기에

그냥 훈련으로만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12월 9일이 되었을 때, 비로소 병사들은 자신들의 목표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게 되었다.

제 1로얄 퓨질리어 연대의 소대장이 부하들에게 말했다.

"우리 앞에 이탈리아 놈들이 있다. 스파게티가 먹고 싶은 사람은 맨 앞장 서라."

이탈리아 취사병들이 일어나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소리와 냄새를 맡은 영국군은

그제서야 이탈리아군의 전초기지를 습격했다.

 

상황은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천막에서 뛰어나오다 전차에 깔리고, 기병대의 말들은 놀래서 길길히 날뛰다가 어디론가 사라졌다.

이탈리아군도 20여대의 M11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그대로 격파당했다.

스코틀랜드 카메론족의 병사들이 총검으로 적을 도륙하기도 했다.

영국군은 이에 그치지 않고 그 옆의 진지까지 계속 진격해 들어갔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전장을 지배하는 철칙이 있다면 사기의 전염성이다.

이기고 있는 군대는 더욱 잘싸우고, 지고 있는 군대는 손한번 제대로 못써버리기 일쑤다.

이것이 너무나도 잘 묘사된 것이 이번 전투였는데,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달아나거나 항복하는 이탈리아군이 대다수였다.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은 영국군은 소대장급 초급지휘관들의 단독적인 결정으로

인접 이탈리아군 진지에 쳐들어갔고,

이런 식으로 7개의 이탈리아 진지가 모두 없앤 후 이집트 외곽도시까지 탈환에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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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군을 대하는 영국군의 자세.)

 

오히려 당황한 것은 영국군 지휘부였다.

2천명 정도일거라 기대했던 포로는 4만명에 육박하고

외곽도시를 탈환하는 것에 목표를 뒀던 영군군은 이미 여세를 몰아 리비아 국경을 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휘부는 이런 부하들을 말리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1월 2일.

어느새 이탈리아군이 처음 출발했던 카푸초 요새까지 점령하고 해안도시 '바르디아'를 위협하고 있었다.

그동안 혹사당했던 전차 대신 보병들이 나설 차례였고, 이 임무를 제 4오스트레일리아 사단이 맡았다.

폭격기의 공습을 시작으로 영국 함대의 함포사격이 이어졌고

3일 새벽, 영국군 병사들이 지뢰밭을 통과하여 시내로 공격해 들어갔다.

완벽한 합동작전.

딱 하루 반나절만에 4만 5천명이 수비하고 있던 바르디아는 함락되고

4만명의 이탈리아군을 포로로 잡았다.

상황이 이쯤되니 자연스럽게 다음 목적지는 토부룩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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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 격투선수 vs 중딩 주먹짱의 대결의 구도였다.)

 

1월 20일, 토부룩 근방까지 진출한 오코너 장군의 영국군은 이미 이탈리아군 8개 사단을 박살내고 있었고

남은 12만명의 이탈리아군은 장비도 빈약하고 사기도 떨어져 도망가기 바빴다.

2월 5일에는 그나마 있던 이탈리아군의 기갑부대가 영국군 제7기갑사단의 올가미에 걸려 전멸당했다.

그렇게 2월 7일 아침. 전투가 끝나버렸고 이탈리아군은 아프리카 대륙에서 모두 사라져버렸다.

 

그저 이집트 외곽도시의 탈환작전 정도로 시작된 계획이 어느샌가 완벽한 승리를 거듭해 토부룩까지 오게 되었으니

정작 얼떨떨한건 오코너 장군 본인이었다.

만약 그리스를 돕기 위해 2개 사단이 차출되지 않았다면 트리폴리까지 어찌했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큰 대승리가 아이러니하게도 독일군을 불러오는 효과를 낳고 만다.

만약 전쟁이 길어져 두어달만 더 흘러갔더라면 독일군은 소련군과 깊숙하게 얽혀서

아프리카까지 병력을 보낼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었지만,

너무 완벽하고 깔끔하고 빠르게 일소당한 이탈리아군 때문에

이 사고뭉치 우방을 돕기 위해 아직 여유가 있던 독일군이 2개 기갑사단을 보내게 된 것이다.

 

그렇게 롬멜이 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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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 소감을 묻는 아치볼드 웨이벌 대장의 말에
'글쎄...어쩌다가 여기까지 왔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답하는 리처드 오코너 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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