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전선(6) - 아프리카 군단의 최후

케이즈 작성일 14.02.05 00:24:23 수정일 21.01.26 17:07:51
댓글 14조회 11,975추천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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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다시 본 응칠로 시작합니다.)

 

이 글은 세계2차대전사에 대한 흥미위주의 글이기 때문에

별로 흥미가 없으신 분들은 뒤로가기를 눌러주세요.

전에도 말했지만 '알기쉬운 세계 제2차대전사'를 보고 쓰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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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치만 절판되었다는건 함정. 남은 재고로 팔고있다는건 안함정)

 

감기 기운이 있네요. 후딱 쓰고 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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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새해가 밝았다.

아프리카 지구 연합군 사령관 아이젠하워 대장은 걱정이 태산같았다.

영국 제8군에 쫓겨 리비아사막을 가로질러 2000km나 도망쳐 온 롬멜의 아프리카 장갑군 잔존부대가

튀니지에서 폰 아르님의 제5장갑군과 합류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2년간의 실전경험으로 다져진 롬멜의 부대와 신형장비로 무장한 팔팔한 아르님의 부대가 합류한 이상,

독일군이 그 가공할 전투력을 다시 보여줄 것이라는 것은 뻔한 예측이었다.

게다가 튀니지를 둘러싸고 있는 험준한 산악지형은 연합군의 공세에는 방해를, 독일군의 수비에는 큰 도움이 될 것이고,

더 나쁜 것은 이런 교착상태가 길어질수록 손해를 보는 것은 연합군이라는 사실이었다.

연합군이 유럽대륙으로 건너가기 위해서는 이 튀니지에 있는 두개의 항구- 비제르테와 튜니스가 반드시 필요하였고,

이들을 탈취하지 못한다면 연합군의 아프리카 상륙작전 '토치 작전'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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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길 바쁜 연합군이었지만, 갈 준비조차 되어있지 않았다는게 함정.)

 

튀니지 저편 동쪽에서는 노련한 백전노장 몽고메리의 제8군이 버티고 있지만,

서쪽을 담당하고 있는 '신참' 미 제1군의 전력은 불안하기 짝이 없었고

2월 13일부터 전선을 시찰한 아이젠하워는 미군의 모습에 굉장히 실망할 수 밖에 없었다.

이를테면...아니,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었다.

전선의 최남단을 담당하고 있는 미국 제2군단의 군단장 '로이드 R.프리덴들'소장은

자신이 지금 공격작전을 수행하고 있는 것인지 방어작전을 하고 있는 것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 분명해보였다.

그는 자신의 안전을 염려하며 전선으로부터 130km나 떨어진 후방에 지휘소를 설치한 뿐더러,

그곳을 흡사 '마지노'요새처럼 튼튼한 벙커를 만들기 위해 공병대를 모조리 투입한 결과

전방의 전투 진지 구축상태는 거의 제로에 가까운 상태였다.

 

이틀 전에 그곳에 도착한 어느 부대에게 아직도 진지 주변에 지뢰를 매설하는

기초적인 조치조차 취하지 않은 사실을 지적하자,

젊은 중대장은 '너무 바빠서' 아직 못했다고 변명하기 바빴고

결국 사람좋기로 소문난 아이젠하워도 진노하고 말았다.

"독일군이었다면 도착하기 무섭게 두시간안에 그 일을 끝내놓았을걸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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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심정이 아니었을까)

 

게다가 적군이 돌파를 시도할 위험이 높은 지점을 골라 병력을 집중 배치해야한다는 전술 상식에도 불구하고

모든 전선에 병력을 골고루 흩뿌려놓는 바람에 미군의 방어선은 허약하기 짝이 없었지만

프리덴들 군단장은 이것을 '물샐틈 없는 완벽한 배치'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아이젠하워가 우려한대로, 혹은 걱정한 일이 일어나고야 말았다.

 

그가 전선 시찰을 끝내고 사령부로 돌아온 지 불과 두시간 후, 독일군의 일제 공격이 시작된 것이었다.

갈 길 바쁜 연합군은 산속에 움츠리고 있고,

가만히 자리를 지키고만 있어도 충분히 임무를 다하고 있던 독일군이 오히려 공세를 걸어오는

그야말로 어이없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머리위에서 슈투카 급강하 폭격기들이 요란한 사이렌 소리를 내지르며 미군의 머리위를 덮치는 것이 시작이었다.

맹렬한 폭격으로 얼이 빠진 미군들에게 곧바로 독일 제 10, 제 21 두 기갑사단이 들이닥쳤다.

일촉즉발인 상황임에도 프리덴들 소장은

'유능한 지휘관은 지도 위에서 모든 것을 읽을 수 있다'라는 몽상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그는 아군을 구출할 생각으로 시디 부지드 부근의 '제벨라소다'산으로 1개 연대를 급파했다.

그러나 지도상으로 볼때는 가까운 거리였던 그 산은 사실 포위된 아군을 지원하기에는 너무 먼 거리에 있었고,

그럴 수 있는 지형도 아니었다.

산꼭대기까지 제발로 걸어 올라간 이 증원군은 곧 밀물처럼 몰려온 추축군에 의해 포위되어 버렸는데,

이것은 무능한 군단장의 지휘 아래서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저녁이 되자 공격을 받던 미군이 퇴각해 버림에 따라 이 증원군의 상황은 우습게 되어버렸다.

오히려 자신들이 오도가도 못하게 되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토머스 드레이크'대령의 보병 연대는 넓은 평지 한가운데 섬처럼 불쏙 솟아있는 산봉우리 위에 고립되었고,

독일군이 그 산을 빙 둘러싸고 포위망을 형성해 버린 것이었다.

 

이튿날 아침, 이들을 구출하기 위해 실시된 미군의 반격작전 역시 졸렬하기 짝이 없었다.

2월 15일, 독일군의 대전차포 사수들이 최고의 시야를 확보할 수 있는 시간대인 정오에

미군 제 1기갑사단의 제 1전차연대가 독일군이 점령하고 있던 마을로 진격을 시작했다.

마치 열병식을 하는 마냥 대열을 맞추어 전진하는 모습은

전차전의 귀신이라고 할 수 있는 독일군에게는 그저 장난처럼 보일 뿐이었다.

어쨌든 쏟아지는 슈투카의 폭격과 전면에서 작렬하는 대전차포의 사격을 무릅쓰고

셔먼 전차들이 마을을 향해 돌진해 들어갈 때까지만 하더라도 괜찮았다.

그러나 자욱하게 피어오른 모래 먼지와 포연 속에서

그들의 측면을 노리고 달려드는 독일 전차들을 발견했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그것은 독일군의 신형 '티이거' 전차가 다수 포함된 독일군의 전차부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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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괴물'이라 불리기 충분했던 티이거 전차)

 

102mm에 달하는 이 중전차의 전면 강철 장갑에 미군의 전차포탄은 이빨자국조차 내지 못했지만,

이 '괴물'에 장비된 강력한 88mm주포는 단 한발에 모든 미군 전차를 고철로 만들어 버릴 수 있었다.

이 독일 전차와의 전투를 마치고 본대로 도망쳐올 수 있던 전차는 단지 4대에 불과했다.

불과 두어시간의 전투에서 50대의 전차를 잃고 300명 이상의 장병이 전사해버린 참담한 패배였다.

더이상의 구출작전을 시도해도 헛수고라는걸 깨달은 프리덴들 소장은 제벨 라소다 산정에 갇힌 장병들에게

'스스로 알아서' 탈출하라는 명령서를 비행기로 투하했다.

참으로 무능한 지취관답게 졸렬한 지휘방법이었지만, 명령은 명령이었으므로

산정에 고립되어있던 드레이크 대령은 부하들과 함께 조심조심 산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이미 무거운 중화기와 장비를 모두 폐기시킨 상태였기에 소총탄 한발에도 전멸할 수 있는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결국 독일군에게 발각되고 말았고, 총소리와 비명소리가 밤새 들린 끝에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모두 독일군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결국 단 이틀간의 전투에서 괴멸적인 타격을 입은 미군 제 2군단은

80km쯤 떨어진 '카세린' 고개까지 철수를 결정했다.

이 카세린 고개는 연합군의 중요한 보급기지인 '테베사'와 '알제' 두 도시로 통하는 관문과도 같은 곳이었다.

공격군과 수비군이 완전히 뒤바뀌어버린 이 상황에서 독일군이 여세를 몰아 이곳을 점령해버리기라도 한다면

'테베사'까지는 뻥 뚫린 것과 다름 없었고, 롬멜은 바로 이 점을 노리고 추격을 하려 했다.

그러나 폰 아르님은 그런 작전을 감행할 병력과 장비가 부족하다는 것을 들어 이 계획에 반대했고,

롬멜은 폰 아르님이 자신을 시기하여 일부러 작전을 훼방놓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결국 둘의 불화를 조정하기 위해 '알베르트 케셀링'원수가 로마에서부터 날아왔다.

케셀링은 결국 롬멜의 손을 들어주었지만, 그러는 사이 이틀이라는 금쪽같은 시간을 벌었다.

2월 18일, 독일군의 정찰대가 카세린 고개를 정찰하고 돌아갈 무렵에는

이미 미군도 웬만큼 싸울 준비를 끝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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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 말리는데는 역시 몽둥이죠.)

 

다음날 아침, 미 제 26보병연대의 '알렉산더 스타크'대령은 고개 마루에 서서

평야지대를 가로질러 달려오는 독일전차의 대열을 발견했다.

그는 직감적으로 이 전차들을 고개 정상부까지 깊숙히 끌어들이는 편이 유리하다는 것을 간파했다.

카세린 고개는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병목처럼 길이 점점 좁아졌고

바로 이곳에 대전차포를 배치하여 전차가 통과하는 순간 차례차례 저격을 하였다.

그날 오후까지도 독일의 전차부대는 치열한 미군 대전차포의 사격에 발이 묶여 버렸다.

'카알 뵐로스'준장은 이를 보며 "양키들 중에도 뭘 좀 아는 친구가 있군 그래."라고 칭찬했지만,

그렇다고 결코 손을 놓고 있지는 않았다.

대전차포가 무서운 무기라고는 하나, 그것을 조작하는 사람은 결국 몇십명의 병사였기에

뷜로스는 보병 특공대를 선별하여 어둠을 틈타 바위산 뒤로 우회시켰고,

미군 포병대의 배후를 덥쳐 백여명의 미군을 포로로 사로잡았다.

어둠속에서 귀신같이 나타나 1개 포병대대 전체를 무력화시킨 독일군의 존재는

삽시간에 미군 진지 안에 공포와 충격을 흩뿌려 놓았고,

몇명의 병사들이 무기를 내던지고 달아나기 시작하자 곧 걷잡을 수 없는 전면적인 공황상태로 확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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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짤을 언젠가는 써먹을거라 기대하고 있었다.)

 

카세린 고개에 포진하고 있던 미국 제 19공병연대와 제 26보병연대 대부분이 싸워보지도 않고 달아나버렸고,

이 사건은 루즈벨트 대통령 조차

"우리 미군이 과연 독일군에 맞서 싸울 능력이 있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라고 할 만큼 큰 충격을 던져준 동시에, 특별 진상조사단까지 구성되는 소동을 불러 일으켰다.

게다가 이런 미국인들의 자존심을 더욱 긁어놓은

이런 전면적인 붕괴가 일어난 카세린 진지의 운명을 구해낸 것이 영국군이라는 사실이었다.

미군의 방어선이 붕괴되기 직전인 19일 밤 자정부렵에 11대의 영국전차로 편성된 증원군이 달려왔고,

치열한 교전이 벌어지며 새벽이 올 때까지 고개를 간신히 지켜내었던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몸이 달아오른 쪽은 롬멜이었다.

독일군이 여기서 미적대는 동안 몽고메리의 영국 제8군이 가만히 기다리고 있을 턱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닌게 아니라 제8군의 선발대가 튀니지 남쪽의 '마레트 라인'을 정찰하고 돌아갔다는 보고가 전해져왔다.

그것은 수일안에 제8군과의 사투가 벌어진다는 뜻이었고, 따라서 우선 이 카세린 고개의 전투를 정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불행히도 롬멜의 병력은 동,서 양쪽을 모두 상대할 만큼의 전력이 아니었고

그렇기 때문에 결단을 내려할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롬멜은 카세린 고개를 넘어 테베사로 향하는 도로가 텅 비어있다는 보고를 받고도

진격중지를 명령한다.

그렇게 하루를 꼬박 고민하던 롬멜은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공격을 중지하고 되돌아가 영국 제 8군으로부터 튀니지를 수비하기로 한다.

 

때마침 다수의 연합군 증원부대가 카세린을 향해 테베사 가도를 달려오고 있다는 정보가

롬멜의 이런 결단을 부추긴 면도 있긴 했지만,

만약 롬멜이 테베사를 향해 공격을 계속했더라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하는 것은

결국 역사가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숙제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모든 역사에 가정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좀 더 정확히 말한다면 그 어느 쪽이든 결과는 크게 변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편이 옳았다.

몽고메리의 표현을 빌린다면 이 무렵, 롬멜은 '질 수밖에 없는 싸움'을 계속하고 있었고,

어떤 결정을 내린다 하더라도 결국엔 패배하고 말았을테니 말이다.

1일분도 못되는 탄약과 5일분의 식량, 그리고 200km도 달릴 수 없는 연료를 가지고 있던 그들이

카세린을 넘어 테베사로 진격했다가는 결국 돌아오지 못했을 것이고,

그럴바엔 제8군과 크게 한판 붙어보자는 속내였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훗날, 롬멜은 이날의 결정을 내린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그것은 한조각의 초콜릿 케이크 때문이었다.

나는 카세린 전투에서 노획한 미군의 전리품을 면밀히 검토해보았다.

모든 것이 풍부했다. 탄약, 연료, 예비부품...

그런데 전사한 어느 미군병사의 배낭속에서 초콜렛 케이크 한조각이 나왔다.

'미주리'에 살고있는 그 병사의 어머니가 아들의 생일을 축하하는 카드와 함께 보낸 것이었다.

그걸 본 나는 처음으로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이미 일년전에 지급받은 누더기 군복을 걸친 내 부하들은

빵 한조각으로 하루를 버티면서 소총의 실탄조차 한발씩 세면서 사격하고 있는 판이었다.

그런데 미군병사들은 수만킬로나 떨어진 고향집에서 생일 케이크를 날라다 먹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이 싸움이 제대로 될 턱이 없다는 사실은 너무나도 명확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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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독일군은 돌아갈 수 없는 길을 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결국 부대를 돌려 마레트 라인으로 향하는 롬멜을 부대를 가리켜,

케셀링 원수는 '과거에 보여주었던 롬멜의 정열적이고 용감한 모습은 이제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라고 묘사했지만, 이런 롬멜의 결정을 나무랄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차체에 도색한 페인트조차 다 벗겨진 낡은 전차, 누더기가 된 군복을 걸친 초췌한 병사들이 뒤따르는 행렬은

그 어디에도 회심의 일전을 앞둔 군대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늙고 병든 사자의 모습, 바로 그것이었다.

그리고 보름 뒤인 3월 6일.

독일 아프리카 장갑군과 영국 제8군의 마지막 일전이 벌어졌다.

'엘 알라메인'에서 맞붙은 후 4개월만에 만난 숙적들의 혈투가 어떻게 끝났는지는 누구라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연료와 예비부품을 모두 소진한 전차들은 정상적인 전투기동마저 어려웠다.

적의 전차가 다가오는 것을 빤히 지켜보면서도

유리한 전투 위치로 전개하는 짧은 기동조차 연료의 잔량을 계산해야하는 군대와,

충분한 재충전을 거쳐 전성기의 전력이 되살아난 제8군이 상대가 될 턱이 없었던 것이다.

 

선제 기습공격을 시도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 전차들은 정확한 대전차포의 조준사격을 받고 불길속에 스러져갔다.

롬멜은 이 전투에서 52대의 전차를 잃었고, 그것은 아프리카 장갑 집단군의 모든 전차 전력이기도 했다.

사흘 뒤, 롬멜은 베를린으로 날아가 히틀러를 만났다.

의미없는 희생을 막아보고자 아프리카 전선을 완전히 포기할 것을 간곡히 건의했지만,

히틀러는 그의 입을 막아버렸다.

"아프리카는 반드시 움켜쥐고 있어야하오. 철수는 있을 수 없소."

히틀러는 얼마 전 스탈린그라드에서 당한 패배의 충격에 빠져있는 것이 분명했다.

"장군은 너무 지쳐있소. 여기 남아서 휴식을 취하도록 하시오.

아프리카는 폰 아르님이 알아서 잘 해줄거요."

 

1943년 3월 7일 아침.

테베사의 학교 건물에 자리잡은 미 제2군단 사령부에 고대 로마군의 백부장을 연상시키는 사람이 등장했다.

반짝거리는 두 개의 별이 장식된 철모의 턱끈을 단단히 조이고,

주름살 하나 없이 말끔한 군복을 눈부시게 차려입은 그는

사령부 건물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들어갔다.

독일군의 위협에서 벗어나자 한숨 돌린 아이젠하워 사령관이

그동안 무능한 지휘를 보여준 프리덴들 소장을 해임시키고 새로이 미 제2군단장에 임명한

'조지 S.패튼'소장의 출현이었다.

그는 영국군의 보조를 맞추는 조공임무를 맡은 탓에 다소 심기가 불편해보였지만,

얼마전 카세린 고개에서 미군이 보여준 '대 망신'이 아직도 모두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었기에

별수없이 이 조연적인 임무를 받아들였다.

 

3월 16일 밤.

패튼이 휘하의 지휘관과 참모들을 소집했다.

"우리는 내일 싸움을 시작한다."

새 군단장이 각오를 밝혔다.

"만일 이기지 못하면 한 사람도 살아 돌아오지 마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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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각오로 싸우라는 이야기를 넘어선 이야기였다.)

전쟁론을 서술한 클라우제비츠는 이렇게 말했다.

"사슴이 이끄는 사자의 군대보다 사자가 이끄는 사슴의 군대가 더 강한 법니다."

지휘관이 부대의 사기와 전력에 미치는 영향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었고,

당찬 새 군단장을 맞이한 미 제2군딘이 바로 그랬다.

살아서 돌아올 생각을 말라는 패튼의 추상같은 호령을 뒤로하고

'테리 알렌'소장의 제1보병사단은 그날밤 진격을 개시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첫 상대로 독일군보다 다소 물렁한 이탈리아군이 걸려 들었다.

3월 20일 밤.

500여명으로 구성된 미군의 '레인저'특공대가 산 정상을 향해 기어올라가기 시작했다.

독일군이나 구사했던 은밀 기습작전을 미군이 시도했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발전이었고,

여기에는 패튼의 닥달이 위력을 발휘했다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땀과 위장용 검뎅이가 범벅이 된 레인저들이 이튿날 새벽녘에 정상에 도달했고,

나팔소리와 함성을 지르며 깊은 잠에 빠져있던 이탈리아군의 진지를 덮쳤다.

그리고 아침해가 떠오를 무렵, 700여명의 이탈리아군이 전사, 혹은 포로가 되었고

알렌 소장은 패튼에게 자랑스럽게 보고를 올릴 수 있었다.

"고지를 확보했습니다. 후속부대를 보내셔도 좋습니다."

 

하지만 첫 승리의 기쁨도 잠시,

23일 새벽에 독일 제 10기갑사단의 전차 50여대가 지축을 울리며 그들을 향해 몰려들고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본때를 보여주겠다고 다짐하는 미군들에게 행운의 여신이 손을 들어주고 있었다.

독일 전차들이 곧바로 미군이 설치해놓은 지뢰밭으로 뛰어들었던 것이다.

선두 전차 몇대가 요란한 폭음과 함께 주저앉자 곧바로 대전차포가 불을 뿜었다.

아침해가 떠오를 무렵 독일군은 30대의 전차를 대파당한채로 물러났고,

미군은 처음으로 제대로된 승리의 기쁨을 맛보았다.

이날의 전투에서 바주카포 1문으로 3대의 전차를 격파하여 은성 무공훈장을 받은

'로버트 안젤모'중사가 동료들을 향해 외쳤다.

"우리도 할 수 있다! 독일놈들 도망치는거 모두 똑똑히 봤지?"

그리고 이렇게 사기가 오른 미군은 전열을 재정비하고 다시 공격을 재개하는 독일군에게

눈부시게 발전한 정확한 포격을 뒤집어 씌웠다.

때맞춰서 셔먼전차 1개중대가 전면에 등장하자, 독일전차들이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한 때 롬멜의 부관이었던 '하인츠 슈미트'중위는 자신 옆을 지나쳐 도망가는 전차를 향해 소리쳤다.

"어디가는거야! 공격을 해야할거아냐!"

전차밖으로 상반신을 내민 승무원이 변명을 하듯 악을 썼다.

"적의 전차야! 우리는 상대가 안돼!"

 

미 제2군단이 독일군을 맞이하여 이처럼 눈부신 성장을 과시하고 있을 무렵,

남쪽에서 발진한 영국 제8군도 마레트 라인을 향해 포문을 열고 있었다.

마레트 라인은 프랑스군이 이탈리아군의 공격을 대비하여 만든 요새선으로

요새 건설에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던 프랑스의 작품답게

총연장 40km에 달하는 콘크리트 방벽과 포좌, 철조망, 지뢰지대로 보강되어

그야말로 최후의 장벽의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게다가 우기가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쏟아져내린 폭우는 제8군의 행동을 집요하게 방해했다.

 

하지만 영국군은 신참 미군에게 반드시 '무언가 보여줘야하는' 역전의 고참이었고,

야심만만한 패튼을 몽고메리의 들러리로 세우며까지 화려한 무대를 만들어준 알렉산더 대장의 체면 또한 세워줘야했다.

그리고 몽고메리는 그 일을 능히 감당해낼 만큼 우수한 부하들을 많이 거느리고 있었다.

영국 제1기갑사단이 겹겹이 가로놓인 무수한 단애와 협곡을 뚫고 마레트 라인을 공격했고,

독일군도 그들을 향해 88mm포를 쏘아대었다.

그러나 탄약과 식량이 바닥나기 시작한 독일군은 결국 3월 26일을 기점으로 마레트라인을 포기하고

북쪽의 '가베스'해안으로 퇴각하기 시작한다.

독일군의 주력은 목적지마저 없어진 후퇴를 계속하고 있었고,

마침내 4월 7일, '스팍스'항구 남서쪽 평야에서 미 제1보병사단과 영국군 '로열 랜서'창기병 연대의 병사들이

서로 감격적인 악수를 함으로써 눈앞의 적군이 완전히 사라졌음을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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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독일군을 수색하는 미군과 영국군)

 

폰 아르님의 독일군은 비제르테항구 서쪽 40km지점의 황량한 해안 산악지대에 깊숙히 칩거하고 있었다.

이탈리아에서 날아온 케셀링 원수의 참모장인 '지그프리트 베스트팔'중장이

'먼산만 바라보는' 소극적인 행동을 질타했지만, 폰 아르님은 대답할 기력조차 없어보였다.

"내가 자동차를 타고 전선 시찰을 나가면 전차한대가 멈춰서야 할 지경이오.

날더러 뭘 가지고 싸우란 말이오?"

폰 아르님의 이런 대답에 지그프리트 중장도 입을 다물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이렇게 시간을 끌며 튜니스와 비제르테 항구를 빼앗기지 않는 것만으로도

히틀러가 그토록 고집하는 '아프리카 전선의 사수'라는 목적은 절반쯤 지키고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연합군이 그런 독일군을 놔두고 있었던 것은 예상 밖의 문제였는데,

몽고메리와 패튼이라는 두 야심가 사이에서 둘 모두를 만족시키기 위한 작전계획을 짜느라 애를 먹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느 한쪽이 눈에 띄게 돋보이지 않도록 세심하게 배려된 작전계획이 나오자

패튼과 몽고메리도 마지못해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 때부터 1945년, 종전을 맞이할 때까지 계속된 미군과 영국군의 경쟁의식을 조정하고 화합시키는 일이야말로

아이젠하워의 가장 큰 임무가 되어버렸고, 그 어려움을 이렇게 술회했다.

"패튼과 몽고메리라는 두 프리마돈나에게 공정하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춰주는 일은

독일군과 싸우는 일 자체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었다."

 

1943년 4월 19일, 제8군이 한발 앞서 공격의 포문을 열었다.

'가르사'와 '타크로우나'산에서 시작된 이 전투는 아프리카 전투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던 대규모 기갑전이 아닌

총검과 수류탄으로 결판을 내는 전형적인 보병전을 보여주고 있었다.

전투가 이런 양상으로 흘러가자 단연 두각을 나타낸 것은 영국군에 소속된 소수 산악민족 출신의 부대들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존재는 역시 인도사단에 소속된 네팔의 산악부족 '구르카'병사들이었다.

그들의 전통 칼인 '쿠크리'한자루를 들고 어둠속을 귀신처럼 종횡무진하는 그들은

추축군에게 있어서 죽음의 사신과도 같은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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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르카 족은 이미 유명한 존재다.)

 

4월 22일, 영국 제1군도 제8군의 선공에 호응하여 진격을 개시했다.

이들 중 '아가일 앤 써더랜드 하이랜더'연대의 스코틀랜드 병사들은

독일군의 포화를 정면으로 받으면서도 용감하게 돌격해 들어갔고,

1개 대대 병력이 30명으로 줄어드는 극심한 피해를 입으면서까지 마침내 롱스탑 힐을 점령했다.

마침내 튜니스를 향한 탄탄대로가 열린 것이다.

 

한편 미 제2군단도 이번 전투를 통해 그동안 따라다녔던 걱정스런 눈초리를 떨쳐내는 선전을 보이고 있었다.

이 무렵 시실리 상륙작전을 준비하기 위해 자리를 비운 패튼 대신

부군단장 '오마 브랜들리' 소장이 미 제 2군의 지휘를 맡고 있었다.

그는 패튼과는 대조적으로 서민적이고 사려깊은 학자풍의 사람이었지만,

전투에서만큼은 야무진 일면을 유감없이 과시했다.

지뢰밭에 봉착하여 더이상 전진할 수 없다는 예하부대의 보고를 받자 그는 차분한 말투로 이렇게 말했다.

"트럭이 갈 수 없다면 차에서 내려 기어가시오."

 

튜니스와 비제르테로 향하는 연합군에게 결정적인 돌파구를 열어준 것은 공군이었다.

5월 5일 저녁부터 감행된 이 사상 최대규의 폭격은 무려 2000여대의 항공기가 동원되어

거의 24시간 동안 폭격을 계속 퍼부었다.

추축군은 지난 2년간의 격전 속에서도 거의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어마어마한 폭격의 위력을 실감해야 했고,

이것은 이후로도 2년간 계속된 전쟁에서 연합군 작전의 큰 특징을 이루는 한가지 전형이 되었다.

 

가뜩이나 부족한 탄약과 장비를 보급받고 있던 독일군의 비제르테 항구는

이 맹폭격을 뒤집어쓰고 그 기능이 완전히 마비되고 만다.

그리고 5월 7일 오후 3시 20분,

최초의 미군이 마침내 비제르테의 시내로 입성했다.

그리고 이어진 오후 4시, 영국 제1군 전차들도 우렁찬 굉음을 울리며 '튜니스'항구에 모습을 나타낸다.

그리고 여기서 영국 제6기갑사단은 뜻밖의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영문을 모르는 튜니스 시민들이 그들을 향해 '히틀러 만세!'를 외치는가 하면,

호텔 테라스에 앉아서 한가로이 맥주를 마시던 독일군 장교들이 황당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만큼 그들의 진격속도는 예상을 벗어날만큼 빨랐다.

 

그날 저녁부터 튜니스는 완전히 환희에 넘친 축제마당으로 변해버렸다.

시청 청사 꼭대기에 걸려있던 하켄크로이츠가 내려지고 프랑스의 삼색기가 올라가는 것이 그 기폭제였다.

모든 시민들이 쏟아져 나와 소리높여 만세를 불렀고,

젊은 여성들은 병사들의 길게 자란 수염과 땀과 때에 찌든 얼굴에다 키스를 퍼부었다.

이 축제의 열기는 그 후로도 두 주일이나 계속 되었고, 연합군 장병들은 그제서야 이 아프리카에서의 전투-

아니, 전쟁이 끝났다는 것을 실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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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나긴 전쟁, 아프리카 전선의 종결이었다.)

 

1943년 5월 11일.

폰 아르님 대장은 '햄맴리프'의 산속에 서 있었다.

그는 손에 쥐고 있던, 얼마 전 베를린으로부터 날아온 히틀러의 전문을 다시 읽어 보았다.

"본인과 모든 독일 국민은 귀관이 최후의 한발까지 장렬하게 싸워주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는 고개를 들어 뒤를 돌아보았다.

누런 페인트 색마저 다 벗겨져버린 만신창이의 전차들이 초라하게 서있었다.

일곱대- 총 일곱대 뿐이었다.

그것이 북아프리카 전선을 누비며 불패의 신화를 만들어 냈던 아프리카 군단의 전부인 것이다.

 

그는 자신이 사용하던 지휘차 '맘모스'에다 남아있던 가솔린을 모두 끼얹고 불을 질렀다.

롬멜로부터 물려받은 이 영국제 '도체스터' 트럭은 롬멜이 처음 아프리카에 도착했을 때

영국군으로부터 노획한 것이라고 했다.

점점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자랑스러웠던 아프리카 군단의 부대가 '하이아 사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사막의 모래바람 속에서 스러져간 십만 병사들의 소리없는 아우성이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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