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당신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hou47 작성일 07.01.26 23:5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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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내공 : 상상초월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작품이 국내에 정식으로 개봉하기를 바라며...

민과 룽, 온 이 세 사람은 민의 피부병 때문에 병원에 가서 진로를 받는다. 거기서 룽은 개인적인 용무로 혼자 홀로 떠나고 온이 민을 보호한다. 그리고 병원에서 공장으로 돌아온 민과 온은 공장에서 일하는 룽과 다시 합류해 민과 룽은 정글로 소풍가고 온은 혼자 오토바이 연습을 위해 서로 해어진다.

태국의 신성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걸작 "친애하는 당신"은 감독의 표현대로 "작은 순간의 영화이자 풍경의 영화" 답게 일반적인 선형적 이야기 구조 대신 인물들의 몸짓과 그 몸짓에서 드러나는 인물의 심리를 추동하는 외부 풍경을 통해 작품을 이끌어 간다. 굳이 줄거리를 따진다면 세 남녀가 도시에서 정글로 소풍가는 것이 전부이다. 그러니까 지극히 단순하다 못해 이야기랄 것도 없는 이야기 구조 안에서 인물의 몸짓과 풍경만으로 진행하는 것이 전부라 해도 과히 틀리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작품의 외연이 단순하다고 해서 이 작품 자체가 단순하다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 의외로 이 작품의 내부는 복잡하기 이를 때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당신이 이 작품 안에서 길을 잃기 않기 위해서는 이 작품의 제목처럼 작품을 "친애하는 당신"의 그것으로 대해야 한다. 그것은 조그만 행동 하나 하나와 변화를 섬세하게 이해하고 보듬는 과정이다.

1.도시와 정글=도시.
이 작품은 전반부는 도시, 후반부는 정글이라는 서로 상이한 두개의 공간에서 펼쳐지는 두개의 이야기를 접합한 형태를 띠고 있다. 그리고 그 공간의 위치에 따라 등장인물의 위계가 틀려진다. 즉 도시 부분에서는 온이 주가 되고 민과 룽이 종이 되며 반대로 정글에서는 민과 룽이 주가 되고 온이 종이 된다. 이것을 달리 말하자면 자신이 현재 부여받은 지위와 자신이 현재 놓여있는 지점과의 상호 적합성의 수치가 잘 들어맞을 수 록 공간의 주도권을 향유하는 자로서의 주도자와 그렇지 못한 자로서의 피 주도자로 나뉜다는 것이다. 그럼 우선 도시 부터 얘기하겠다.

이 작품의 첫 시작은 민과 룽, 온 이 세 사람이 피부병에 걸린 민의 진료를 위해 보건소에서 의사와 함께 있는 상황이다. 거기서 민은 말을 할 수 있음에도 말을 할 수 없는 해서는 안 되는 어떤 위치 안에서 무력하게 자신이 그 곳에서 절실히 원하는 진심(자신의 병에 대한 호소.)을 타인 즉 온과 룽을 통해야만 하는 피 주도자의 위치에 놓여 있다. 실상 민은 미얀마 불법 체류자이기 때문에 자신의 정체를 감추어야 하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그것은 동시에 자신의 진심을 봉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민의 대행자로서의 온과 룽 중 룽은 도중에 보건소를 떠나면서 온 만이 홀로 민의 대행자가 된다. 왜냐하면 룽은 민과 끝까지 함께 할 수 없는 위치 그러니까 공장에서 일해야 하는 노동자의 지위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대행자 없이는 어떠한 행동도 할 수 없는 무력한 피 주도자 민을 끝까지 곁에 있어준 사람은 온 뿐이다.

이렇듯 민과 룽은 도시라는 공간 안에서의 지위는 미천하기 그지없고 그렇기 때문에 행동에 제약이 따른다. 민은 사실상 거의 모든 행동이 봉인되어 있고 룽은 민보다는 낮지만 하층 계급으로 인한 노동의 시간에 의해 생각만큼 자유롭지 못하다. 그런 도시에서 이들이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거짓말을 해야 한다.(민은 벙어리 행세를 해야 하고 룽은 상사에게 병에 걸렸다고 거짓말을 해야 한다.)그리고 그 순간 역으로 그들은 육체적 행동의 자유를 위해 자신의 마음 즉 진심을 스스로 제약 봉해야 하는 아이러니에 쳐한다. 그러니까 그 둘은 이 도시라는 공간에서 육체적 정신적으로 억압받고 제약받을 수밖에 없는 위치 안에서 궁극적으로는 스스로의 존재 자체를 부정 소외함으로써 이 작품의 제목 "친애하는 당신"과는 다른 "친애할 수 없는 혹은 친애하고 싶어도 해서는 안 되는 당신"으로 밀려 난다. 그냥 한마디로 민과 룽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 즉 서로가 서로에게 "친애하는"관계이지만 이 도시에서는 이 둘의 "친애하는"관계는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온은 민을 끝까지 돌봐주고 의사에게 자신의 내밀한 문제(아기 문제)를 거리낌 없이 말하는 등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민과 룽과 틀리게 행동의 제약이 없다. 그것은 그녀의 지위가 도시라는 공간과의 적합성이 아주 높기 때문이다. 일단 그녀는 공장장의 아내로서 룽과 같이 노동을 해야 하는 시간에서 벗어나 있다. 즉 육체적 행동에 제약이 없다. 그리고 그녀는 민과 같은 불법 체류자도 아니며 그런 불법 체류자를 사랑하는 룽과 달리 그녀는 합법적 남편과 결혼해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정신적으로도 어떠한 제약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가 도시라는 공간에서 주가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녀는 합법적이고 권력이 있는 그래서 도시라는 인위적인 문명 체계에 시민이 되는데 아무런 하자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녀는 민의 건강 증명 증을 발행해달라는 불법을 스스로 행함으로서 스스로 자신에게 얼룩을 지게 한다. 그리고 그 얼룩은 정글에서 퍼진다.

이상과 같이 이 작품에서의 도시라는 곳은 인위적으로 조작된 곳이기에 그 인위라는 틀에서 벗어나는 불법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곳에서 자신의 진심을 담아 타인을 "친애하기"위해서는 우선 먼저 이 인위적 틀에 자신을 합치시켜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지극히 비인간 적이다. 그래서 인지 이 전반부 도시 부분은 시종일관 인물과 일정 정도 거리를 유지한 체 롱 테이크로 그저 관찰 한다. 그것은 인물들의 외부에서 그들을 감시하고 제약하는 보이지 않는 인위적 법의 시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 이다. 그리 만치 이 도시 부분은 제목과는 달리 감정적으로 "친애할"만 어떠한 것도 배제한 체 그저 관찰만 한다. 이런 비인간적 도시에서 거의 유일하게 "친애하는"감정이 우러나오는 장면은 온이 피부병을 앓고 있는 민을 위해 크림을 만들어 주는 장면일 것이다. 여기서는 이제까지 원거리에서 롱 테이크로 관찰하는 것을 거두고 클로즈업으로 크림을 만드는 손을 보여준다.

이것 피부병을 앓고 있는 민을 위한 온의 진심이 우러나온 행동으로써의 크림 만들기에서 클로즈업이 나왔다는 사실. 삭막하고 비인격적인 관찰자적 시선이 주를 이루는 이 곳 도시. 그 곳에서 이 클로즈업은 도시 부분과는 어울리지 않는 어떤 감정을 일으킨다. 그리고 "친애하는"감정이 우러나오는 정글에서 이 클로즈업이 속출한다는 것은 진심어린 "친애함"이라는 감정의 증표로 감독이 이 클로즈업을 채택했다고 볼 수 있다.이제 도시를 떠나 정글로 넘어가자.

2.도시와 정글=정글.
이 작품에서 정글은 아주 중요한 공간이다. 사실상 이 작품의 진짜 시작이 정글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오프닝 타이틀이 정글로 진입하기 바로 전인 차 안에서 뜬다는 것을 유념하라.)그 곳은 인위라는 겉옷을 입고 자신을 숨기는 도시와 대척점에 있는 말 그대로 자연 그대로의 어떤 인위적 겉옷도 필요 없는 혹은 허용하지 않는 날 것 그대로의 주재와 통제가 없는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곳은 도시라는 인위적 억압에 의해 억눌려 있던 인간 내면의 본연의 감정과 마음이 분출하는 곳이다. 진심이 허용되는 공간으로서의 정글, 욕망이 분출하는 공간으로써의 정글, 그리고 타인을 "친애할 수 있는 혹은 친애해야만 하는" 공간으로서의 정글.

이 작품이 도시에서 정글로 넘어가는 계기는 룽이 민과 함께 정글로 소풍가기 위한 목적을 의한 것이다. 사랑하지만 사랑을 표현할 수 없는 도시에 대한 유일한 대안이 그들에게는 정글인 것이다. 불법과 합법, 인위적인 어떠한 지위도 법도 존재하지 않는 그저 그 곳에서 시작도 끝도 없이 여여 하게 흘러가는 자연으로써의 정글은 그들이 서로의 감정을 표현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는 그래서 그들에게는 도시로 부터의 피난처이자 동시에 그들을 하나로 연결해주는 매개체와 같은 곳이다. 오히려 여기서는 자신의 감정을 진실 되게 표현하지 않고 숨기거나 왜곡하는 인간 우위의 행위를 하면 정글에서 버림받는다. 이런 정글에서 버림받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의 진심을 보이므로 해서 타인 그리고 자연으로써의 정글과 합치 즉 물아일치의 경지에 가야 한다. 이것을 좀 더 자세히 말해야 할 것이다.

도시에서 정글로 가는 중간 지대로서의 도로, 그리고 그 도로 위를 가로질러 가는 자동차 안에서 그들은 서로의 손을 만진다.(흡사 에로 영화를 그것을 연상시킬 정도로 진하다.)그것을 카메라는 클로즈업으로 보여 준다. 여기서 이 클로즈업이 중요한 것은 앞서도 얘기했지만 진심으로 상대방을 위하는 감정이 나올 때 클로즈업이 나온다고 했고 그 클로즈업이 도시에서 관찰자적 시선을 뚫고 노골적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도시에서 정글로 가는 그 길목에서 등장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도시에서는 제대로 서로에게 말도 건네지 못한 상황과는 사뭇 틀리다. 그러니까 이 클로즈업의 의미는 단순히 도시에서 정글이라는 지형적 이동이 아닌 그들을 둘러싼 외부의 어떤 영향력이 변했다는 일종의 증표이다.(그들은 도시에서나 정글에서나 여전히 서로를 사랑하지만 외부의 시선에 따라 그것을 표현하기도 표현하지도 않는다.)좀 더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그들의 사랑을 가로막는 법적 계급적 사회적 영향력에서 벗어났다는 것이다.

이처럼 그들은 도시라는 인위적 공간에서는 서로의 감정을 드러내는데 장애를 받다가 정글이라는 무위적 공간으로 이동하면서 비로소 서로의 진심을 온전히 들어 낼 수 있었고 그 증표로 클로즈업이 등장한 것이다. 물론 도시에서도 클로즈업은 등장했지만 그것은 전체적 분위기에서 한 순간의 부분일 뿐 전체의 분위기를 주도하지는 못한다. 그에 반에 정글에서는 차 안을 시작으로 비번하게 클로즈업이 등장하며 도시에서의 그 비인간적인 관찰자적 시선과는 달리 사뭇 인간적인 주관적 시선을 내 비친다. 여기서 이 두 개의 공간에서 보여준 시선의 차이는 매우 흥미로운 구석이 있는데 그것은 명백하게 인간의 공간이라 할 수 있는 도시는 오히려 비인간적인 관찰자적 시선으로 들여다보고 인간이 아닌 자연의 공간인 정글에서 인간적이고 친근한 주관적 시선을 내비친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만든 문명으로써의 도시보다 여여 하게 흘러가는 저 무위적 자연으로써의 정글이 더 인간적 정확하게는 서로가 서로에게 "친애하는"인간적 정감이 살아 숨 쉰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인간적 정감이 살아 숨 쉬는 정글의 증표인 클로즈업과 짝을 이루는 것이 또한 등장하는데 그것은 바로 핸드 헬드 촬영이다.

민과 룽은 소풍을 하기 위해 경치 좋은 곳으로 이동하는데 그 이동을 촬영한 방식은 근접 핸드 헬드 촬영이다. 이것은 도시에서의 그것과는 틀리다. 도시에서는 인물이 이동할 때는 원거리에서 카메라를 고정한 체 팬으로 그 인물의 이동을 쫓아간다. 이것은 말 그대로 누군가를 멀리서 인물을 관찰하는 시선이다. 그에 반해 정글에서의 핸드 헬드 촬영은 인물에 밀착해 마치 인물의 동반자인 듯이 착각하게 만들 만큼 친근하다.

이렇듯 정글 부분에서는 클로즈업과 핸드 헬드 같이 도시 부분에서는 등장하지 않은 형식을 끌어들이며 도시와는 전혀 다른 공간이라는 것을 천명한다. 그것은 도시에서는 없는 인간적 정감이 이 무위적 자연으로써의 정글에 살아 숨 쉰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곳에서는 도시와는 달리 자신의 감정, 진심을 솔직히 드러내고 타인과 자연에 하나로 합치될 수 있는 자가 주가 되고 그렇지 못한 자는 종이 된다. 그리고 이곳에서는 주는 앞서도 얘기했지만 민과 룽이고 종은 온이다. 바야흐로 공간의 위치에 따라 세 명의 관계가 뒤바뀐 것이다. 여기서 주와 종의 변화에 대해서도 얘기해야 할 것이다.

도시에서 벙어리 행세를 해야만 했던 민은 제약이 사라진 정글에 도착하자 비로소 자신의 언어를 회복한다. 그것도 모자라 나래이션 즉 내면의 말까지도 스스럼없이 털어놓는다. 사실상 민과 룽이 정글로 소풍 온 것은 고된 노동으로 힘들어 하는 룽을 위해 민 자신이 잘 아는 정글로 이동한 것이다. 그러니까 민은 이미 정글과 아주 친밀한 상태에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민이 비록 도시에서는 종이었지만 정글에서는 주가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민을 따라 사심 없이 정글을 맞이한 룽 또한 이곳에서 주가 된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그런 상황에서 그들은 산딸기나무에서 첫 키스를 하며 인간적 유대 관계를 형성한다.

그에 반해 온은 정글에서 남편 공장 직원과 불륜을 저지른다. 민과 룽이 도시에서 규정한 불법에서 벗어나 관계의 친밀함을 위해 왔듯이 온도 도시에서 불법으로 규정한 불륜을 성사시키기 위해 정글에 온 것이다. 그러나 똑같이 도시에서 규정한 불법이라는 규정을 피해 정글에 왔지만 민과 룽이 정글과 하나 됨으로써 관계의 회복을 도모한 것에 반해 온은 자신의 사적인 욕망을 위해 정글을 이용한다. 이런 상황에서 온이 정글에서 종이 된 것은 당연하다. 정글과 합치되지 못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온이 남자와 해어진 후 정글을 이리저리 해맬 때 마스크와 나뭇가지를 드는 비정상적인 행동을 하는 다분히 방어적이고 동시에 공격적인 모습을 띈 것이다. 그녀에게 정글은 외부의 적 일 뿐인 것이다.

정리를 하자면 주와 종의 관계는 자신의 진심을 드러낼 수 있느냐 없는냐의 차이이다. 도시에서 민은 불법 체류자이기 때문에 자신의 본심을 들어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해서 민은 동시에 자신의 본심을 스스로 봉하므로 해서 종의 위치에 간다. 룽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정글에서 온은 불륜을 저지르고 그것을 숨겨야만 한다. 그것은 자신의 본심을 들어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온은 정글에서 종이 된 것이다.주의 위치는 역으로 생각하면 된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자신의 진심을 열지 않고서는 이 정글에서 빠져나갈 수가 없다. 자신의 본심을 열므로 해서 정글과 한 몸이 된 민과 룽은 자유롭게 정글을 여행하지만 그렇지 못한 온은 정글을 해맨다. 그러니까 정글은 자신의 마음을 얼 만큼 솔직하게 드러낼 수 있느냐는 일종의 시험대이다. 하지만 그 시험은 도시에서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게 유연하고 온화하다.

도시에서는 합법적이라는 여간해서는 바뀌지 않는 시험대로 사람을 평가하기 때문에 법이 바뀌지 않는 이상 그것에 부합되지 못한 이는 소외되고 배척당한다. 반면에 정글은 자신의 마음을 열므로 해서 타인과 자연에 "친애하는"감정만 나오면 얼마든지 정글과 부합될 수 있다.그런 점에서 온이 룽을 따라 물속에 간 행위는 정글과 하나 즉 마음을 여는 연습이며 온이 민을 물속에 담겨진 자신의 손을 보는 것은 전혀 다른 나와 직면했다는 하나의 증표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마음을 열어서 정글과 합치된 온은 이어서 민을 물속으로 이끌어 룽과 함께 치료한다. 이것이 정글의 묘법이다. 도시에서 민과 룽은 구원받지 못 했지만 정글에서 온은 구원받았다.

3.감정의 전이
앞에서는 공간의 이동에 따른 인물들의 주와 종의 변화를 얘기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이 단순히 도시와 정글이라는 상이한 두 개의 공간이라는 이분법적 도식 안에서 인물들의 위계를 따지는 작품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물론 이 도식은 이 작품에서 중요하고 또한 인물들에 대한 영향력도 강하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에 의해 야기되는 그 무언가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한 사람의 감정이 타인에게 전이되는 특이한 상황이다.

도시에서의 온은 합법적인 위치에 놓여있기 때문에 행동에 제약이 없다. 이에 반해 민과 룽은 그렇지가 못한 관계로 인해 행동에 제약을 받는다. 그렇기 때문에 민가 룽은 일거수일투족을 온의 도움에 의지해야만 한다. 하지만 반대로 정글에서는 진심을 들어 낼 수 있는 민과 룽이 자유로운 행보를 보이며 그렇지 못한 온은 정글을 해매다 간신히 민과 룽을 만나 그들의 도움에 의지한다. 위치의 변동에 따른 위계의 변화는 필연적으로 이들의 관계에 영향을 미치며 동시에 서로의 감정이 전이된다.

몇 가지 예를 든다면 도시에서 온이 크림을 만들어 그 크림을 먹일 때의 감정은 정글에서 룽이 민에게 음식을 먹일 때로 전이된다거나 룽이 도시에서 조퇴를 하기 위해 거짓말을 해야 하는 감정은 정글에서 온이 민과 룽에게 정글을 해맨 것을 거짓말할 때 전이된다. 또한 불법 체류자로서 민은 도시에서 어쩔 수 없이 소외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소외감은 정글에서 해매는 온의 무력감에 의해 조심스럽게 전이 전달되고 온의 정글에서의 불륜 즉 탈주하고 싶은 욕망은 민과 룽의 조심스러운 정사로 전이 전달된다. 하지만 이러한 감정의 전이가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일방적으로 전이 전달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서로의 감정이 복잡하게 전이 상호 연접함으로서 궁극적으로는 자신들이 감추고 싶었던 자신의 마음을 타인을 통해 불현듯 현시되는 방향으로 까지 나아간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민의 외로움은 민과 룽이 함께 누워있는 것을 온이 쳐다보면서 전에 자기도 남자와 함께 있었지만 지금은 혼자 남겨진 온의 쓸쓸한 모습으로 전이되고 혼자된 온을 다시 룽이 보면서 언제 자기도 민과 해어져 혼자가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환기시킨다.(사실 룽은 남자 친구가 있다.) 이 구도를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도시에서 필연적으로 소외감과 외로움의 감정에 매있을 수밖에 없는 민이 자신의 공간이라 할 수 있는 정글로 이동하면서 그것을 떨쳐내려고 하지만 도시가 아닌 정글에서는 무력할 수밖에 없는 불청객 온에게 민의 소이감과 외로움의 감정이 전이되어 그들에게 다시 되 돌아온다. 그리고 민과 룽과 같이 둘이 아닌 혼자가 된 온은 그 혼자라는 소외와 불안감을 느끼고 그 불안감이 다시 룽에게 전이되어 민과 해어져 온 처럼 남자와 해어져 혼자가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잠을 이루지 못한다.

이렇듯 이 작품은 마치 탁구를 치듯이 하나의 감정이 다른 이에게 전이되어 전달되고 그 전달된 것이 다시 다른 이에게 전이되어 궁극적으로는 관계의 본질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 전이의 양상은 철저히 관계의 변화에 의해 이루어진다.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 도시와 인간과의 관계, 정글과 인간과의 관계들과 같이 단순히 인간과의 관계 뿐 만이 아니라 공간과의 관계에까지 이른다. 이것은 실로 인간과 인간, 그 인간에 영향을 미치는 공간 즉 개인과 세계의 총체적이고 유기적인 아주 큰 관계의 변화 안에서 변하고 전이되는 감정과 진심을 통해 관계란 무엇인가라고 집요하게 묻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감독은 그 관계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것은 영화의 제목"친애하는 당신"이다.

4.당신은 진정으로 타인을 "친애합니까?"
이 작품은 공간의 이동으로 인한 인간관계의 변화와 그 변화 앞에서 다채롭게 전이, 전달되는 미묘한 마음과 몸짓을 따라가면서 관계의 본질을 캔다. 그리고 그 관계란 타인에게 "친애하는"마음이라고 말한다."친애 없는"마음이 없는 관계는 죽은 관계이며 그 죽은 관계를 소생시키는 것은 다시 "친애하는"마음을 찾는 것이다. "친애하는"마음이 없이 그저 욕정만을 채우려 했던 온이 정글에서 해맨 것은 그 때문이며 동시에 그런 그녀가 다시 평온을 되찾은 것은 룽이 온에게 "친애하는"마음을 심어줬기 때문이다. 물론 룽도 처음부터 온을 "친애한"것은 아니다.(온이 없을 때 룽은 온을 욕한다.)그랬던 룽이 온을 "친애하는"마음을 가진 것은 순전히 무위적 자연으로써의 정글 안에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 정글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더 집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왜냐하면 이 작품 내부에 서브플롯으로서의 국경에 대한 문제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감독이 스스로 밝혔듯이 이 작품에는 태국과 미얀마 사이의 국경 지대에 대한 정치적 문제가 깔려있다. 하지만 감독은 그것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대신 미얀마 불법 체류자인 민을 통해 그 문제를 은유적으로 풀어낸다. 그러니까 민이라는 인물은 국경에 대한 일종의 상징인 것이다. 민은 도시에서 얻지 못한 평온함을 찾아 정글로 이동한다. 도시에서 정글로의 이동. 이 이동을 이번엔 국경에 대한 것으로 풀어내야 할 것 같다.

인위적 체계로서의 도시. 그런 인위적 체계로서의 도시 혹은 국가를 구획 짓는 또 다른 인위의 소산인 국경. 그 안에서 국경의 상징인 민이 침묵할 수밖에 없는 것은 국경이라는 문제가 너무 민감한 문제이기 때문에 함부로 행동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민은 국경이라는 문제가 도사리지 않는 그래서 평온을 되찾을 수 있는 정글로 향한다. 그 곳은 어떠한 인위 즉 국경이 존재하지 않는 무위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 곳은 국경이라는 분별로 인한 관계의 서먹함을 다시 원상복구 시켜주는 치유의 공간이기도 하다. 거듭 얘기하지만 인위적인 국경으로 구획된 도시에서는 국경 안 사람은 끌어안을 수 있어도 국경 밖 외국인은 끌어안기가 힘들다. 더군다나 그 외국인이 불법 체류자라면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니까 도시는 근원적으로 관계가 성립되기 힘든 곳이다. 그런 도시에서 민이 앓고 있는 피부병은 근원적인 관계가 성립할 수 없는 도시의 비인간화로 의해 생긴 병이라 할 수 있다. 즉 국경 문제로 인해 파생되는 인간관계의 파괴의 상징인 것이다.

이렇듯 국경을 비롯한 모든 인위적 분별은 인간 사이의 관계를 가로막는 그로 인해 인간들이 점점 더 단자 화 되고 안으로 곪아가게 한다. 민이 피부병으로 고통스러워도 제대로 치로 받을 수 없는 것은 그런 국경과 같은 분별에 의한 인간 사이의 관계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그저 인위적 행위로서의 분별이 정한 범위 내에서만 관계를 맺을 뿐이다. 그러니까 더 이상 인위적 체계인 도시에서는 민의 치료가 불가능한 것이다. 민을 치료할 수 있는 것은 근원적인 관계의 회복 즉 "친애하는"감정으로 상대방을 대하는 것뿐이다.

그런 점에서 정글에서 룽이 온을 이끌고 다시 온이 민을 물속으로 이끌고 궁극적으로는 세 사람이 하나 구체적으로 피부병을 앓고 있는 민을 룽과 온이 정성을 기울여 치료하는 것은 국경으로써의 민과 그 국경에 의해 생긴 피부병 때문에 고통 받는 민을 구원하는 행위이다. 그러니까 국경이라는 인위적 구획에 의해 더 이상 진정 소중한 인간이 고통 받지 않기를 바라는 감독의 바람이 담긴 것이다. 그리고 그 바람의 구체적 행위가 바로 타인을 진심으로 "친애하는 당신"의 위치로 옮겨 놓는 것이다. 하지만 앞서도 얘기했지만 이 작품은 상대방의 감정이 전이되고 전달된다고 했다. 그리고 그 감정이 전이되다 되다 서로가 서로를 "친애하는"궁극적 관계가 바로 물속에서의 치료이고 그 "친애하는"마음이 다시 전이되어 홀로 된 온, 혼자가 될지 모른다는 룽의 불안감이 엄습하면서 조용히 현실로 복귀한다.

결국 감독은 "친애하는"마음과 그 마음이 실현되는 장으로써의 정글을 통해 관계의 불능으로 인해 병들어 가는 인간을 치료하려 했지만 끝끝내 현실을 외면하지 못하고 다시 현실로 복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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