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시골 마을 ‘플랑드르’, 거기에 사는 평범한 선남선녀들. 드메스테르는 자신의 오랜 친구 바르브를 사랑한다. 바르브는 드메스테르의 친구 브롱테를 사랑한다. 삼각관계에 빠진 친구들. 드메스테르는 애써 이 관계를 부정한다. 그 둘은 이후 바르브를 놔두고 전쟁터로 떠난다.
이번에도 브루노 뒤몽의 시선은 건조하고 삭막하다. 일체의 인간적인 감정이나 온기를 전혀 작품 안에 끌어 오지 않는다. 날씨는 추운데 불을 피우는 것을 불허하는 감독. 일단 이 작품은 전쟁 영화의 외피를 감싸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 따른 극단적인 인간성을 가감 없이 표출한다. 미성년 아이 살해, 부녀자 강간, 그리고 민간인 학살 등 이 작품은 전쟁에 따른 온갖 악행을 나열한다.
사실 부르노 뒤몽의 작품 세계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것은 바로 인간의 어두운 내면이다. 전작 ‘휴머니티’에서 보여 준 극단적인 인간 내면의 어두운 면을 본 사람들이라면 아마 이해가 갈 것이다. 일상적으로 펼쳐지는 악에 물들여지는 인간의 연약한 내면에 대한 감독의 고찰은 지금 봐도 소름이 끼친다. 이 작품도 이전작과 마찬가지로 인간 내면의 어두운 면을 끄집어내는데 집중한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전쟁이라는 구체적인 악의 공간을 끌어들여 인간 내면의 어두운 면을 좀 더 확장시킨다. 한층 더 지독해진 감독의 시선!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 영화 혹은 반전 영화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전쟁은 핑계고 사실은 다른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일단 이 작품의 전체적인 성격은 전작과 마찬가지로 무척 건조하다. 그리고 ‘왜’ 즉 이유를 삭제한 체 오직 드러나는 현상에만 집중한다. 이 작품을 자세히 보면 알 수 있지만 인물들이 어떠한 행동을 할 때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행동하는 인물들을 보는 것은 무척 생소하다. 드메스테르와 바르브가 처음 섹스를 나눌 때 그들은 아무런 이유 없이 그저 갑작스럽게 그것을 행한다. 그리고 전쟁 중에 일어나는 악행들, 이를테면 미성년 소년 살해와 부녀자 강간을 할 때도 그들은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그저 일을 치른다. 일순간의 망설임도 없는 즉 이유를 배제한 즉물적인 인물들의 행동은 이 작품을 굉장히 낯설게 만든다. 거기다 이 작품의 중심축을 이루는 바르브는 시종일관 이무런 이유 없이 동네 남자들과 습관적으로 정사를 나눈다. 거기에 대한 그녀의 친구의 상식적인 충고에도 그녀는 계속해서 즉물적인 행동을 하는데 주저함이 없다. 일반적인 상식으로서는 이것은 꽤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다.
감독이 의도적으로 이유 즉 일반적인 상식을 뒤집기 위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설명을 아낀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이 작품은 기존의 작품, 그리고 세계관으로 봤을 때는 무척 기괴하게 다가오는 작품이다. 덕분에 전쟁을 통한 인간의 극단적인 어두운 내면을 보여줬음에도 이상하게도 쉽게 흥분하거나 분노가 일지 않는다. 그냥 그저 그런 일이 일어났다. 라는 지극히 차가운 시선만이 느껴진다. 그런 차가운 시선은 플랑드르 마을에서 일어나는 일상에서도 동일하게 느껴진다. 이것은 흔히 이런 유의 전쟁, 반전 작품이 평온한 일상과 지옥 같은 전쟁을 대비해 평화라는 주제를 도출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틀린 것이다. 오히려 일상과 전쟁 둘 모두를 즉물적이고 차가운 시선으로 똑같이 보여 줌으로서 일상이나 전쟁이나 별반 다르지 않게끔 만들어 버린다. 전쟁도 부조리하지만 일상도 그에 못 지 않게 부조리 한 것이다.
이 지점에서 나는 이 작품이 진심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이 일반적인 전쟁, 반전 영화가 아님을 말하고 싶다. 그것은 사실 부지불신 간에 일어나는 인간의 어두운 내면에 대한 근원적인 통찰이라는 것이다. 더 정확하게 인간의 어두운 내면은 어떠한 특정한 계기, 이유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일상이든 전쟁이든 인간이라면 누구나 떨칠 수 없는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상식적으로 통하는 선한 인간성에 대한 근원적인 부정이자 비판이다. 작품 안으로 다시 들어가 그것을 다시 한 번 고찰해보자.
이 작품은 정확하게 바르브로 대표되는 플랑드르의 일상과 드메스테르로 대표되는 전쟁으로 나뉜다. 그리고 이 둘은 앞서도 얘기했지만 인간의 어두운 내면을 표출하는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 ‘왜’라는 이유는 없다. 그저 행할 뿐이다. 아무 남자와 섹스를 하거나 아무렇지 않게 낙태를 말하는 바르브, 전쟁 범죄를 너무도 쉽게 저지르는 드메스테르. 그런 그들과 마찬가지인 주위 인물들. (바르브를 전혀 이해하지 않으려는 아버지, 의사들. 유뷰남 임에도 바르브와 섹스 하는 앙드레, 그리고 드메스테르와 마찬가지로 아무렇지 않게 악행을 저지르는 전우들.) 그러나 그럼에도 바르브와 드메스테르는 한 가지 틀린 것이 있다. 바르브는 자신의 어두운 내면을 표출하는데 꺼림낌이 없을 뿐 아니라 그것에 대해 어떠한 변명도 하지 않는다. 거기에 비해 드메스테르는 바르브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어두운 내면을 표출하는 데는 거리낌이 없지만 그것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그는 자신의 어두운 내면을 전쟁이라는 것을 빌미로 어쩔 수 없음을 설파한다.
바르브, 드메스테르. 둘 모두 자신의 어두운 내면을 거리낌 없이 표출하지만 전자는 그것을 그저 받아들이고 후자는 그것을 부정한다. 동시에 전자는 일상을 대표하고 후자는 전쟁을 대표한다. 여기 바로 이 지점이 중요하다. 나는 이 부분이 이 작품이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똑같이 인간의 어두운 내면을 말하지만 전쟁보다 오히려 일상이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것. 즉 인간의 어두운 내면은 전쟁과 같은 특별한 계기가 아닌 이미 우리 곁, 일상에 이미 잠복하고 발현됐다는 것이다. 전쟁은 핑계일 뿐이다. 이것을 바르브와 드메스테르의 관계를 통해 좀 더 자세히 말하겠다.
드메스테르는 바라브를 사랑한다. 하지만 바르브는 앙드레를 사랑한다. 거기서 드메스테르는 질투를 느끼지만 스스로 바르브와는 어디까지나 친구일 뿐 연인이 아니라고 선언함으로서 자신의 어두운 내면(질투)에서 벗어나려 한다. 하지만 바르브에 대한 감정 때문에 그는 자신의 어두운 내면을 벗어나지 못 한다. 즉 바르브를 떠나야만 자신의 어두운 내면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그는 미래를 위한다는 핑계로 전쟁터로 떠난다. 그리고 그는 그 곳에서 바르브를 통한 자신의 어두운 내면을 마음껏 표출한다. 그가 현지인 여자를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바로 강간하거나 그녀의 애인 브롱테를 버리고 도망친 것이 그런 이유이다. 이후 그는 다시 돌아온 고향에서 거짓말을 늘어대면서 전쟁을 통해 발현된 자신의 어두운 내면에 면죄부를 주므로 해서 자기 합리화를 시도한다. 전쟁을 빌미로 이미 자신에게 잠복되어 있는 어두운 내면을 밖을 돌리려는 것이다. 즉 전쟁은 핑계일 뿐이다.
그에 반해 바르브는 그런 것을 다 알면서도 자신의 어두운 내면을 마음대로 발현한다. 친구의 충고도 아버지, 의사의 억압도 그녀를 멈추지 못 한다. 마치 자신은 인간의 어두운 내면의 화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함부로 행동하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그녀의 그런 일관적인 행동과 마지막에 기습적으로 뛰어나오는 기이한 대사가 그것을 뒷받침해준다. 드메스테르가 전쟁에서 돌아와 그녀의 친구에게 자기변명을 늘어놓을 때 그녀는 갑자기 역겨운 표정을 지으면서 숲 속으로 달려간다. 그런 다음 그녀는 그에게 추궁한다. 브롱테가 어떻게 죽었는지를.
바르브: 대답해, 어떻게 죽었어?
드메스테르: 머리에 총을 맞았어. (거짓말)
바르브: 내가 봤어, 거기 있어 다구. 난 다 알아.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안 다구. 그를 뒤로 버려둬서 죽은 거야. 내게 임신을 시켰다고! 넌 날 원하지만 가질 수 없을 거야. 넌 절대 날 못 가질 거야.
바르브의 마지막 대사는 영화 전체를 통틀어 가장 이상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브롱테가 죽는 것을 자기가 봤다는 저 말도 안 되는 대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까. 거기다 그녀는 그 상황을 정확히 알고 있다. 그러니까 그녀는 갑자기 그 지점에서 전지적인 능력을 가진 인물로 갑자기 승격된 것이다. 이건 영화적으로 말도 안 되는 반칙이다. 마음먹고 장난질을 치거나 실험적으로 나간 것이 아닌 한에서 저 대사는 나올 수 없는 대사다. 그런데 감독은 그것을 그냥 용인한다. 결국 그녀가 인간의 어두운 내면의 화신 그 자체라는 것을 감독 스스로 자백한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 그녀는 인간의 어두운 내면의 화신으로서 이 작품의 핵심인 것이다. 드메스테르가 그녀를 떠날 수밖에 없는 것은 그녀를 통해 자신의 어두운 내면과 마주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인정하기는 더더욱 두려워했을 것이다. 인간의 어두운 내면의 화신인 바르브가 그를 사랑하지 않은 것은 그런 그의 비겁함 때문인 것이다. 거기다 전쟁을 핑계로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어두운 내면을 표출해 놓고 이제 와서 그것을 부정하는 그가 얼마나 고까웠을까.
마지막 드메스테르는 결국 바르브에게 진실을 고백을 한다. 자신의 어두운 내면을 인정한 것이다. 그러자 인간의 어두운 내면의 화신인 그녀는 언제 그랬나는 듯이 그를 조용히 껴안는다. 그리고 그는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그토록 피하고 싶었던 인간의 어두운 내면에 침잠해 들어갔을 때에 비로소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한 것이다. 더욱이 그런 그의 고백을 그녀도 받아들인다. 인간의 어두운 내면을 인정했을 때 비로소 사랑할 수 있게 된 이 기괴한 결론은 과연 해피엔딩일까? 아니면 언 해피엔딩일까? 액면 그대로 보면 해피엔딩이겠지만, 이제까지의 고찰로 본다면 이것은 상당히 불온한 언 해피엔딩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정리하고 이 글을 마치겠다. 결국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어두운 내면은 어떤 특정한 계기, 이유와 같은 상식적인 인과율로 인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우리 곁에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현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플랑드르라는 평범한 일상을 전쟁이라는 극한 지대와 거의 동일한 시선으로 차갑고 부조리하게 서술한 것은 그런 주제를 극단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장치인 것이다. 즉 전쟁은 어디까지나 핑계일 뿐 인간의 어두운 내면은 일상이든 전쟁이든 인간이 있는 곳에는 모두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작품을 단순한 전쟁, 반전 영화로 보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즉 전쟁 때문에 인간의 어두운 내면이 발현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이미 어두운 내면이 있기 때문에 발현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전쟁, 반전 영화의 주제를 가지고 오면서도 그것을 다시 한 번 비튼 다음 다른 차원으로 이동시킨다. 전쟁, 반전 영화를 다시 비판하는 전복 성! 이것이 이 작품의 가치이다. 그렇지만 그렇게 해서 도달한 감독의 인간에 대한 고찰은 너무도 절망적이다. 인간은 자신의 어두운 내면에서 벗어날 수 없고 오히려 그것과 하나가 됐을 때 비로소 사랑을 말하는 이 극한적인 결론은 인간의 이제까지 모든 가치에 조롱하고 파괴한다. 그에게 인간은 선한 의지조차 없는 모순투성이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