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품 '더 차일드' 는 제목 그대로 아이에 대한 작품이다. 더 정확하게는 아이에서 어른으로 성장해야만 하는 한 아이의 고통스러운 성장 극이다. 아이에서 어른으로 성장하는 것. 그것은 자연의 순리로서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이 작품을 보게 되면 그것이 아주 만만치 않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너무도 당연한 이치가 어려움을 겪는다? 이것이 이 작품의 근원적인 비애라 할 수 있다.
우선 이 작품의 시작은 아들을 데리고 온 소니아가 아들의 아버지인 브루노를 찾는데서 시작한다. 여기서 우리는 이 시작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연인으로서의 브루노 보다 남편으로서의 브루노 그리고 가장 중요한 아버지로서의 브루노 찾기라는 이 작품의 시작을 말이다. 그리고 그 아버지란 아이에서 책임이라는 윤리를 획득함으로서 어른으로 성장한 이가 최종적으로 가는 위치이다. 어른으로 성정함으로서 온전히 아버지의 위치로 옮겨가는 것. 사실상 이것이 이 작품의 전부라고 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작품은 이 시작의 의미를 완성시키는데 모든 것을 할애한다. 브루노에게 아버지 되기를 강요하는 저 소니아를 보라.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아버지 되기의 중심에 있는 브루노가 자꾸 아버지 되기를 거부하고 뒤로 미루는 것에 있다. 그럼으로 해서 브루노는 지금 자신이 현재 놓여있는 아이의 위치를 고수한다. 그것은 단순히 성장을 거부하기 보다는 어른으로서 갖추어야 할 책임이라는 윤리의 짐을 지지 않겠다는 선언과 같다. 사실상 성장이란 아이가 어른으로 된다는 것 즉 보호 받는 위치에서 보호 하는 위치로 이동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보호 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은 보호 받아야 할 위치에 있는 사람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 하지만 그 의무라는 것은 그냥 되는 것이 아니다. 그 의무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윤리적 덕목을 획득해야만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성장한다는 것은 윤리의 획득에 다른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장과 윤리는 다른 둘인 듯, 하지만 사실은 하나이다. 브루노는 성장을 거부함으로서 윤리의 획득을 고의적으로 지연시키는 것이다.
아버지 되기를 재촉하는 소니아, 그것을 거부하는 브루노. 드디어 아이의 아버지를 찾은 소니아는 브루노에게 아기를 안아보라고 권유한다. 그리고 그것을 마지못해 받아들이는 브루노. 하지만 어떻게 아기를 안아야 할 지 조차도 모르는 브루노는 이내 그것을 포기하고 자신의 파트너에게로 가서 한참 진행하던 일을 중단시킨다. 이렇게 아들과 아버지의 첫 만남은 아버지의 미숙함으로 인한 스스로의 거부로 인해 어색하게 끝난다. 아버지의 역할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브루노에게 이런 식의 첫 만남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라 할 수도 있다. 아무렴 첫 술에 배부를까. 그래서일까. 소니아는 그런 브루노에게 첫 술, 두 술..... 씩 아버지의 위치로 옮기기 위해 서서히 압박한다. 이제까지 좀 도둑질과 구걸로 하루, 하루를 염명하던 브루노에게 소니아는 직업을 가지라고 권유를 하거나 동사무소에서 출생신고와 같은 번거로운 일을 하게끔 한다.
그러나 소니아의 바램과는 달리 브루노의 아버지 되기에 대한 거부도 또한 만만치가 않다. 자신의 아들을 이용해서 구걸을 하는 저 브루노의 한심한 모습이란... 그리고 그런 브루노의 거부는 아들을 암시장에 팔면서 극단에 이른다. 영원히 아이의 위치에 있고 싶은 브루노에게 자꾸만 아버지의 위치로 옮기려는 소니아의 압박과 결정적으로 소니아를 그렇게끔 한 원동력인 저 천진난만한 아기는 자신이 놓여있는 아이의 위치를 위협하는 요소이기 때문에 브루노는 그 원동력 즉 아들을 암시장에 판 것이다. 그럼으로 해서 브루노는 자신의 아이 위치를 재 보증 받으려고 한다. 그리고 그 보증인은 소니아이다.
그렇지만 브루노가 아버지 되기를 거부한 것처럼 소니아도 브루노의 다시 아이 되기를 거부한다. 소니아는 브루노가 아들을 암시장에 판사실을 알고 그 자리에서 대자로 누워 기절한다. 시살 상 이것은 브루노의 아이 위치에 대한 무언의 항의이자 거부이다. 그리고 소니아는 거기서 더 나아가 브루노를 고소까지 함으로서 그러한 자신의 거부 의사를 더욱 확고히 한다. 그것에 당황한 브루노는 다시 아들을 데려옴으로 해서 그 거부를 무마하려고 하지만 소니아는 단호하게 그 거부를 철회하지 않는다. 그것은 아버지 되기를 거부함으로서 그냥 아이로 남겠다는 브루노에 대한 소니아의 총체적인 거부인 것이다.
그렇게 소니아에게 다시 아이 되기를 거부당한 브루노는 집에서 쫓겨나 길을 배회하다 암시장 브로커에게 걸려 구타를 당한다. 그들은 아기를 되찾아 옴으로 해서 본 손해를 브루노에게 받으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금액은 브루노가 이제가지 좀 도둑질로 근근이 벌어들인 푼돈과는 비교가 안 되는 금액이다. 아이와도 같은 브루노의 현재 수입으로는 그 금액을 메 꾸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바야흐로 소니아가 포기한 브루노의 아버지 되기 혹은 어른으로 성장시키기 프로젝트가 본의 아니게 거대한 암흑가로 넘어간 것이다. 자신이 저지른 일은 자신이 책임져라.
소니아라는 개인과는 달리 무자비하고 잔혹한 암흑가에서의 어른 되기 프로젝트 (폭압적 강요에 의한.) 에 기겁한 브루노는 발작적으로 소니아에게 자신의 아이 같음을 극단적으로 표출하면서 들러붙는다. 브루노의 다시 아이 되기의 최후의 발악인 것이다. 나 같은 어린 아이에게 바깥의 어둠은 감당하기 힘들다. 그리고 그 발악은 정말 아이와도 같이 애처롭기 그지없다. (소니아의 발목으로 잡고 바닥을 기어가는 브루노.) 하지만 소니아는 브루노의 그 마지막 발악을 끝끝내 거부한다. 소니아가 원하는 것은 아버지이지 다 큰 아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렇게 함으로 해서 자신의 아들 지미의 위치를 보호하기 위해서이다. 계속해서 브루노가 아이로 남기를 원하는 한에서 아들 지미는 언젠가는 밀어내야 할 대상이기에 그러하다. (브루노가 아들을 다시 팔지 말라는 법이 없지 않는가.)
이제 몰릴 때로 몰린 브루노는 자신의 파트너와 함께 다시 한 번 소매치기를 감행한다. 일은 성공한 것 같아 보이지만 이번에는 어느 이름 모를 정의로운 시민의 추격을 받으면서 위기에 놓인다. 소니아(개인), 암시장 브로커(암흑가, 어둠), 시민(사회, 빛). 바야흐로 순수한 개인 그리고 불법적인 암흑가에서 마지막으로 공적인 사회가지 브루노의 아버지 되기 프로젝트에 가담한 것이다. 그리고 그 프로젝트를 어느 이름 모를 시민들이 어찌나 잘 수행하던지 이리 저리 피하고 도망치고 심지어는 목숨까지 잃을 수 있었던 브루노 일행의 숨바꼭질가지 다 완파하며 기어이 브루노 일행을 붙잡으므로 해서 브루노로 하여금 마지막으로 아버지 되기를 설득한다. 아니 강요한다.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시민들의 행동.) 자 이제 브루노는 선택의 기로에 선다. 자신의 일행을 버림으로 해서 그냥 아이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자수해서 아버지 되기에 동참할 것인가.
결국 브루노는 자수를 함으로서 자신의 어린 동료를 보호하고 자신이 저지른 일에 책임을 짐으로서 자신에게 둘러싼 모든 일을 스스로 종료시킨다. 이렇게 브루노의 아버지 되기 프로젝트는 브루노가 자신의 어린 동료(유사 아들의 위치에 놓인 어린 동료.)를 스스로 거두어들이면서 그렇게 막을 내린다. 드디어 아버지의 위치에 안착한 브루노. 그리고 소니아가 교도소로 브루노의 면회를 오면서 최종적으로 그 위치를 확인한다. 하지만 그 결과는 너무도 참혹하여 브루노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오열한다.
이렇듯 이 작품은 한 아이 같은 청년 브루노를 어떻게 해서 든 아버지로 승격시키는데 모든 것을 할애한다. 그리고 바로 그 노력이 현대 자본주의 시회의 비극이라고 작품은 넌지시 제시한다. 사실상 브루노의 어른으로 성장함으로서 아버지 되기는 소니아로 대표되는 개인 더 정확하게는 가족 내부에서 해결했어야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어딜 봐도 그 역할을 수행할 가족은 부재하고 그나마 있는 가족 내에서는 어머니만 있을 분 아버지는 없다. 소니아가 브루노와 달리 자신의 어머니 되기에 나름에 충실하고 그 반대로 브루노의 아버지 되기가 그토록 힘겨웠던 것은 아마도 이런 아버지 없이 어머니만 있는 가족의 결핍에 의한 것이 아닐까?
아버지 없이 어머니 혼자만의 손으로 길러졌을 아들 브루노. 그래서 아버지의 윤리를 제대로 채득하지 못 한 아이 브루노. 이와 같이 브루노가 그동안 아이로 밖에 머물 수 없었던 것은 아버지의 부재로 인한 윤리의 공백이 제 때에 그를 어른- 아버지로 성장시키는 것을 방해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작품은 그것을 구체적으로 묘사하지는 않는다. 대신에 아버지 없는 가족의 결핍을 어머니에 대한 집착으로 보상 받으려는 브루노의 행동으로 간접적으로 보여줄 뿐이다. 예를 들어 브루노가 결정적인 순간에 즉 소니아가 고소로 구속의 위기에 쳐했을 때 자신의 친 어머니에게 가서 자신의 알리바이를 부탁하거나 (정말 위험할 때 그 누구도 아닌 어머니를 찾아간 아들 브루노.) 암시장 브로커의 협박이라는 또 다른 위급한 상황에 쳐했을 때 소니아가 무슨 어머니라도 되는 듯이 달라붙어 애원하는 것이 그 예이다.
아들의 아버지에 대한 결핍은 어머니에 대한 집착은 낳고 동시에 아들 자신의 성장을 무력화 시킨다. 온전히 어른으로 성장할 수 없는 아들 그래서 아이의 위치에서 벗어날 수 없는 브루노. 그런 점에서 브루노에게 소니아라는 존재는 위의 예에서 보듯 외면적으로는 내면적으로는 어머니 역할을 하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즉 브루노의 유사 어머니 역할 안에 소니아가 들어가 있는 것이다. 아이- 브루노, 어머니- 소니아. 하지만 이 구도가 아들의 출현으로 깨질 위험에 쳐하자 브루노는 자신의 아들도 팔아넘기는 극악무도한 그야말로 최악의 실수를 저지른다. 여기서 브루노가 자신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파렴치한 행동을 한 것은 아이로 남아있을 수밖에 없으므로 해서 아이 위치 만 확보한 브루노의 태생적인 한계에 기인한 것이다. 브루노에게 아들은 그나마 있는 자신의 위치인 아이 위치를 위협하는 경쟁자일 뿐이다. 그리고 그것을 보증하는 것은 어머니 들이다. (소니아를 포함해서.)
이렇듯 현대 자본주의에서의 아버지 부재는 가족의 결핍 상태로 만들고 그 결핍은 계속해서 아버지의 부재라는 악순환을 야기 시킨다. 하지만 그럼에도 누군가는 그 아버지의 부재를 막아야 한다. 나쁜 아버지의 귀환을 막기 위해서 말이다. 그리고 거기에 브루노가 불려들어오고 소니아(가족)가 브루노의 아버지 되기 프로젝트를 실행한다. 하지만 소니아는 그것을 실패하고 본의 아니게 암흑가와 사회가 간섭해 간신히 성공시킨다. (빛과 어둠의 공조.) 그러나 그럼에도 암흑가와 사회의 간섭으로 인한 아버지 되기는 사실상 우연적인 그들 스스로의 진심이 아닌 돈(암흑가)과 정의 구현(사화) 같은 외부적 요소가 더 강한 것이기 때문에 불완전하기 그지없는 것이다. 여전히 아이의 성장은 일차적으로 가족의 몫인 것이다. 그렇다면 가족의 붕괴는 도대체 무엇으로 그렇게 된 것일까?
그것은 바로 자본이다. 우리는 이 브루노의 아버지 되기 프로젝트가 벌어지는 곳이 바로 자본주의 사회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돈! 돈! 돈! 모든 것을 돈으로 환원하는 이곳에서 윤리적 덕목은 하찮은 장식물에 불과하다. 심지어는 돈의 관능으로 윤리라는 덕목을 마구잡이로 학살하기도 한다. (브루노가 아들을 팔아치우는 범죄.) 그리고 거기서 가족이라는 소우주는 윤리적 덕목이라는 구심점을 잃으므로 해서 해체, 결핍 상태에 이르게 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지켜야 할 최소한의 윤리적 덕목마저도 우습게 아는 이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아버지는 그 힘을 잃고 사라지며 아이는 어른으로 제대로 성장하지 못 하는 것은 일견 당연하다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어머니는 위태롭게 자리 잡고 있다.
여기서 다르덴 형제는 이 돈의 관능과 부도덕함에 맞서 윤리적 덕목을 부활시키려한다. 비록 그 결과는 참담할지라도 다르덴 현제는 그 윤리적 부활을 끝까지 밀고 나간다. (브루노의 구속) 그리고 그 결과 브루노는 끝끝내 파멸을 겪으면서 비로소 아버지가 된다. 그리고 이 잔혹한 결말은 이보다 더 잔혹한 자본주의 사회에 맞서 다르덴 형제가 벌인 최대한의 저항이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분신을 파멸시키면서 까지 윤리적 물음을 제기한 다르덴 형제의 참담하지만 동시에 처연한 이 성장극의 답을 우리는 진심으로 구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