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하인드스토리] 헤리슨포드의 도망자...의 실화

ogrish닷컴 작성일 07.03.23 15: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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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례] '도망자' 셰퍼드 사건 (1966)

미연방대법원 Sheppard v. Maxwell, 384 U.S. 333 (1966)

 

이 사건은 의사가 자기 처를 살해했다는 혐의로 기소된 형사사건에서 미국 역사상 가장 선정적으로 보도된 악명 높은 사건 중 하나였다. 그에 대한 살인죄의 유죄판결은 12년 후 파기되어 무죄로 결말이 났는데, 그 이유는 그 사건에 관한 재판전 및 재판중의 언론보도가 그의 공정한 재판의 수행을 저해하였다는데 있었다.

이 사건은 그 극적 상황전개 때문에 텔레비전 드라마, 영화, 소설 등의 소재가 되었다. 아내 살해 누명을 쓰고 외팔이 진범을 찾아 도피행각을 벌이는 의사를 주인공으로 한 작품이 '도망자'란 타이틀로 국내에도 소개된 바 있었다.

 

사건은 1954년 정형외과 의사였던 피고인 셰퍼드박사의 임신한 부인 매릴린이 침실에서 구타 살해된 채 발견된 데서 시작되었다. 범죄를 신고한 셰퍼드 역시 부상당한 모습이었으나, 그가 수사담당관에게 한 말은 산만하고 납득이 가지 않는 점이 많았다. 그는 부인이 잠자러 2층으로 올라간 후, 아래층 벤치에서 졸던 중 부인의 비명을 듣고 윗층으로 쫓아 올라갔는데, 현관으로부터 비친 희미한 빛으로 그의 부인 곁에 머리카락이 무성한 남자가 서 있는 것을 보고, 그 사람과 맞붙잡고 싸우다가, 목덜미를 얻어맞고는 실신하여 쓰러졌다. 그가 정신을 차린 후 어린 아들방으로 가서 아들이 무사함을 알았는데, 시끄러운 소리를 들은 후에, 그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더니, 집을 떠나는 어떤 모습을 보고 호숫가까지 그를 쫓아갔고, 모래톱에서 그 침입자와 맞붙어 싸우다가 다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는 것이었다.

처음부터 셰퍼드박사는 이 사건의 제일 용의자로 취급되었고, 수사관들은 그를 진범으로 단정하였다. 병원으로 옮겨진 셰퍼드는 검시관에 의해서 심문을 받았으나, 거듭된 수사관의 심문에 대한 답변을 거부하였고, 거짓말탐지기 검사를 거부하였다. 그의 집에서 그 범행의 기억을 재연하는 자리에는 수사관에 의해 초청된 기자들이 입회·취재하였다. 검시관의 검시에는 수많은 기자가 참여하였고 생방송되었으나 셰퍼드 측의 변호인은 참여가 거부되었다.

 

검시관이 그에게 혐의를 두는 발언과 함께 거짓말탐지기 검사를 요구받았으나 거부하는 등 그가 경찰의 수사에 비협조적이라는 사실이 보도되었다. 셰퍼드의 행위가 뉴스매체에 그의 사진과 함께 장문으로 보도되었는데, 신문은 미심쩍은 그의 행위에 대하여 그를 비난하였다. 셰퍼드에게 혐의를 두게된 지방신문들은 1면 또는 사설로써 셰퍼드에 대한 적극적 수사를 촉구하기 시작하였다. 미디어들은 재판 전임에도 불구하고 관계자에 의한 증거의 설명을 인용·보도하였다. 후에 법정에는 제출되지도 않은 그에게 불리한 증거에 관한 주장이 사전에 보도되었고, 배우자 살해의 동기가 될 수 있는 셰퍼드의 다수 여인과의 혼외 연애관계가 취재·보도되었는데, 실상 법정에서의 증언에는 단 한 여자만이 언급되었다. 그밖에도 신문은 연일 그를 비난하는 사설과 그에 불리한 사실을 대서특필하였고, 이러한 상황은 재판이 개시된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셰퍼드부인의 피살 시부터 1954. 12. 그의 유죄판결이 날 때까지 클리블랜드에 있는 3개 신문이 보도한 기사를 모으면 다섯 권 분량에 달하였다. 그밖에 라디오방송의 보도도 적지 않았다. 75인의 배심원 명단이 주소와 함께 신문에 게재되었고 그들에게는 익명의 편지와 전화가 쇄도하였다. 선임된 배심원의 사진은 재판 중에 무려 40회 이상 보도되었고, 그들은 격리도 되지 않은 채로 자유행동이 방임되었다. 또 셰퍼드소송의 수석담당검사는 민사법원판사 후보자였고, 심리를 담당한 허버트 브리딘판사는 임기가 만료되어 재출마를 계획하고 있었다.

 

셰퍼드는 1954년 제1심에서 유죄를 선고받고 항소하였으나 기각되었고, 연방대법원 역시 1956년 상고를 기각한 바 있었다. 그러나 그 후 6년이 경과된 1964년 연방대법원은 셰퍼드가 신청한 인신보호영장사건에서 그에 대한 재심을 명하였고, 그는 1966년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선고받게 되었다.

 

연방대법원은 위 사건에서 재판전과 재판중에 자행된 언론의 사건에 대한 개입에 깊은 반감을 표명하였을 뿐 아니라, 그밖에도 셰퍼드가 공정한 재판을 받을 수 없게 된데 대한 책임은 언론과 이를 방조하거나 방치한 경찰, 검찰 및 법원에 있다고 그들의 잘못을 비난하였다. 연방대법원은 다수의견에서 "재판 도중에 법정에는 대혼란이 지배하였고, 기자들은 특히 셰퍼드를 위시하여 재판의 모든 참여자를 몰아대며 실질적으로 법정 전체를 접수하였다"고 하면서 법원은 공정한 재판을 받을 수 있도록 제1차적인 책임을 지게 됨은 물론이며, 사실심의 판사가 언론에 대하여 취한 조치는 사법적인 침착성과 차분함(judicial serenity and calm)에 대한 피고인의 권리를 박탈하는데 도왔다고 강조하였다.

 

다수의견을 대변한 클라크대법관은 먼저 사법의 집행에 관련된 뉴스매체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피력하였다. "재판이 침묵의 벽 뒤에서 존립할 수 없다는 원리는 '비밀재판에 대한 영국계 미국인의 불신'에서 오랫동안 영향을 받아오고 있다. 책임 있는 언론은, 특히 형법분야에서, 항상 효과적인 사법행정의 보조자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언론의 기능은 수세기 동안에 걸쳐서 공헌한 인상적인 기록에 의해서 문서로 증명된다. 언론은 단순히 재판에 관한 정보를 공표하는 것이 아니라, 광범위한 공개적 음미와 비평을 위해서 경찰, 검찰 그리고 사법절차에 의해서 자행되는 오심을 경계하는 것이다."

 

클라크대법관은 셰퍼드에 대한 재판전이나 재판중에 뉴스매체들이 행한 행위에 대한 깊은 우려를 표명하였다. 그럼에도 그는 뉴스매체만이 셰퍼드가 공정한 재판을 받는 것이 불가능하도록 한 유일한 범죄자는 결코 아니었음을 지적하고, 뉴스매체, 경찰, 검시관 그리고 법원 등을 골고루 비난했다. 그리고 사실심 판사가 피고인을 보호하기 위해서 취했어야 할 조치에 대해 명료하게 설명했다.

 

"법정과 법원구내가 재판을 위한 통제에 지장을 주었기 때문에, 재판의 광란적인 분위기가 쉽사리 가라앉을 수 없었다. 우리들이 에스테스(Estes)사건에서 강조한 바와 같이, 재판절차에서 피고인이 어떤 측면에서 편견을 받게 되거나 불이익을 당하는 것이 명백할 때, 언론의 법정출입은 제한되어야 한다. 대량의 재판전 공표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생각되면, 셰퍼드의 변호인단이 요청한 것처럼 판사는 보도기자들의 법정이용을 통제하는 엄중한 조치를 채택해야만 했다. 기자들의 입정 자체가 재판을 와해시킬 수 있다는 으뜸가는 조짐으로 간주되어서, 많은 기자들이 법정에 들어오는 그것 자체가 제한될 수 있었다. 그들이 법정 간막이의 안쪽에 자리잡아서는 안되는 것은 확실한 것이었다. 나아가 판사는 법정 안에서 보도기자들의 행위를 좀더 엄격하게 통제해야만 했는데 그렇지 못했다. 예를 들면, 판사는 휴정 중에 변호인단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소송사건 적요서를 손으로 만지거나 사진촬영을 하지 말도록 뒤늦게 요청했다."

 

나아가, 그 사실심 판사는 배심원들과 증인들을 뉴스매체로부터 격리시켜야만 했다. 그리고 그는 경찰, 증인 그리고 양쪽의 변호인단이 언론에게 기사자료, 정보 그리고 가십 등을 제공하는 행위를 통제하기 위한 어떤 노력을 해야만 했다.

 

클라크대법관은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개진했다.

"피고인이 판사의 과실적 행위에 대해 법적 책임을 묻는 것과 마찬가지로, 재판전에 행해지는 뉴스공표에 대한 범행은 기소될 수 있다. . . . 더 상세하게 말하면, 그 심리법정은 재판전의 사항들을 누설한 변호사, 당사자, 증인 또는 법원직원에 의한 재판사항 이외의 진술을 금지시키는 것이 옳았었다. 즉, 심문이나 거짓말탐지기 검사의 실시에 대한 셰퍼드의 거부, 법원직원에게 행한 셰퍼드의 진술, 예상되는 증인의 신원 또는 무죄에 대한 확신, 또는 그 사건의 시비곡직에 관한 진술 등이다."

 

무책임한 여론재판 때문에 그가 실형선고를 받은 후, 셰퍼드의 집안은 수난으로 이어졌다. 셰퍼드 구속 2주후 그의 어머니가 권총 자살했고, 다시 2주 후엔 그의 아버지마저 위출혈로 세상을 등졌다. 수년 후엔 그의 장인까지 자살하는 비극이 이어졌다. 셰퍼드는 석방 후 폭음으로 소일하다가 1970년 46세로 기구한 삶을 마감했다. 그러나 사건 당시 7세였던 그의 외아들 샘 리즈 셰퍼드는 아버지의 결백을 밝히기 위해 1995년 오하이오주를 상대로 숨진 아버지가 잘못된 판결로 억울한 수감생활을 했다며 법원에 2백만달러의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소송을 냈다. 샘 리스는 10여년 동안 아버지 사건을 추적한 끝에 사건 현장에서 채취한 혈흔의 DNA가 아버지나 어머니 것이 아니라 집안에 드나들던 일꾼 리처드 에벌링의 것임을 입증해 냈다고 보도되었으나, 미 오하이오주 쿠야호가카운티 법원은 2000. 4. 13. 아들 리스 셰퍼드(53)의 청구에 대해 사건현장이 이미 훼손돼 검사결과를 믿지 못하겠다는 이유로 “결백을 입증할 증거가 충분치 않다”고 기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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