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이버를 들어갔는데 사랑의블랙홀을 리뷰한 글이 있더구라구요.
사랑의블랙홀을 재미있게 본입장에서, 읽다보니 괜찮더군요. ㅎ
괜찮은 리뷰인거 같아서 ㅎ 문제되면 삭제하겠습니다.
출처 - http://movie.naver.com/movie/mzine/cstory.nhn?nid=752
북미 지역에서 2월 2일은 '그라운드호그 데이'라는 날이다. 두더쥐처럼 생긴 마모트라는 동물이 자신의 그림자를 보면 겨울이 6주 동안 연장된다는 이날은, 기독교 전통에선 예수가 탄생한 지 40일이 되는 '성촉절'이라는 축일이며 촛불 퍼레이드를 하는 날이다. 그리고 '그라운드호그 데이'는 영화 제목이기도 하다. 한국엔 [사랑의 블랙홀]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이 영화는, 끝없이 반복되는 2월 2일 안에 갇힌 한 남자의 이야기다. 전형적인 할리우드 로맨틱 코미디처럼 보이는 [사랑의 블랙홀]. 하지만 이 영화엔 의외로 묵직한 삶의 의미가 담겨 있다.
이 글엔 다수의 스포일러가 들어 있습니다. 아직 영화를 보지 않으신 분은,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글 l 김형석(영화 저널리스트) 구성 | 네이버영화
그 남자의 위대한 하루, 해롤드 래미스 감독의 [사랑의 블랙홀]
(왼쪽부터) 미국, 프랑스, 브라질의 포스터. '그라운드호그 데이'는 북미 지역에 한정되기에 각국에서 다양한 이름으로 개봉되었다. 프랑스에선 [끝이 없는 하루 un jour sans fin], 독일에선 [그리고 매일 이어지는 마모트의 인사 und taglich grußt das murmeltier], 이탈리아에선 [처음부터 다시 시작 ricomincio da capo], 스페인에선 [시간의 주문 hechizo del tiempo], 브라질에선 [시간의 마법 feitico do tempo]으로 개봉되었다. 한국은 [사랑의 블랙홀]이다.
평범한 코미디, 클래식이 되다
미국에서 1993년 2월 13일에 개봉되었을 때, [사랑의 블랙홀]은 '웰메이드 로맨틱 코미디'에 지나지 않았다. 감독인 해럴드 래미스는 [캐디쉑 caddyshack](1980)으로 감독이 된 후 [휴가 대소동 vacation](1983)과 [지상의 낙원 club paradise](1986)까지 단지 세 편의 영화를 만든 평범한 상업 감독이었다. 게다가 [지상의 낙원]이 흥행에 실패하면서 꽤 긴 시간 동안 메가폰을 잡지 못하던 상태였다. 사실 그는 작가와 배우로 더 인정 받았는데, [애니멀 하우스](1978)로 두각을 나타낸 후, [미트볼 meatballs](1979) 작가를 거쳐 [고스트버스터즈](1984)에 시나리오와 배우(스펭글러 박사)로 참여했다. 그는 1993년에 [사랑의 블랙홀] 내놓기까지 7년의 연출 공백 동안 [고스트버스터즈]의 후광 속에서, [고스트버스터즈 2](1989)와 tv 애니메이션 시리즈 [리얼 고스트버스터즈](1986~91)의 시나리오를 쓰며 먹고 살았다.
[사랑의 블랙홀]의 시나리오를 쓴 대니 루빈도 신출내기에 지나지 않았으며, 빌 머레이는 뛰어난 재능은 있지만 지금처럼 캐릭터의 스펙트럼이 넓진 않은 '코미디 배우'였다. 상대역인 앤디 맥도웰은 [*,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1989) 이후 이렇다 할 작품이 없는 상태였다.
해럴드 래미스의 감독 데뷔작인 [캐디쉑](왼쪽 사진). 빌 머레이는 잔디 관리원으로 등장한다. 두더쥐가 등장한다는 점에서 마모트가 나오는 [사랑의 블랙홀]과 유사하다. 빌 머레이와 해럴드 래미스의 인연은 1970년대 tv 쇼에서 함께 배우로 활동할 때부터 시작되었는데, [고스트버스터즈](오른쪽 사진)에선 배우로 함께 참여했다. 맨 오른쪽이 해럴드 래미스로 가운데 있는 댄 에이크로이드와 함께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썼다. 장기 휴업 상태인 감독과 신인 시나리오 작가, 코믹 이미지가 강한 주연과 아직 확고한 포지션을 다지지 못한 여배우가 만난 [사랑의 블랙홀]은, 그렇게 특별한 영화처럼 보이진 않았다. a급 스타가 1,500만 달러의 개런티를 받던 시절, 총 제작비 1,460만 달러로 일리노이의 한적한 마을인 우드스탁에서 만든 이 영화는, '재밌는 영화'이긴 했지만 클래식으로 추앙 받을 정도의 걸작은 아니었다. 끝없이 반복되는 하루를 살아가는 주인공의 내면적 변화를 그린 영화는 재치 있는 '소품' 정도로 평가 받았다.
7,091만 달러의 수익(북미 지역)은 제작비에 비하면 꽤 쏠쏠했지만 엄청난 대박은 아니었다(1993년 북미 흥행 13위). 비평적으로는 미국보다 영국에서 더 인정받았는데 영국 코미디 어워즈에서 작품상을 수상했고, 런던 평론가 협회와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각본상을 받은 정도였다. 미국의 오스카와 골든글로브는 이 영화를 완전히 무시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사랑의 블랙홀]은 중요한 영화가 되었다. 로저 에버트는 2005년에 다시 리뷰를 쓰며 과거에 [사랑의 블랙홀]을 과소 평가했음을 인정했다. 평론가 스탠리 피쉬는 <뉴욕 타임즈>에서 '최고의 미국영화 10편'을 선정하면서 이 영화를 포함시켰고, 2007년엔 '국립영화보관소' 창고에 들어가는 영예를 안았다. 2008년 미국영화협회(afi)는 미국 영화사상 최고의 판타지 장르 영화를 선정하면서 [사랑의 블랙홀]을 8위에 올렸다.
[사랑의 블랙홀] 현장 모습. 왼쪽 사진은 현장의 빌 머레이, 앤디 맥도웰, 해럴드 래미스 감독(왼쪽부터). 오른쪽 사진은 촬영지였던 우드스탁 주민들에게 사인을 해주고 있는 빌 머레이의 모습.다른 분야에서도 회자되었다. '그라운드호그 데이'(groundhog day)라는 제목은 '끝없이 반복되는 좋지 않은 상황'을 일컫는 의미로 사회 전반에 걸쳐 사용되었다. 특히 군사 분야에서 애용되었는데, 1996년 클린턴 대통령은 연설에서 수렁에 빠진 보스니아 전쟁을 이야기하며 '그라운드호그 데이'라는 표현을 썼다. 미군 내에선 9.11 이후 이라크 전쟁에 대한 은어가 되었다. 철학 분야에선 스스로의 내면을 들여다볼 필요성이 있는 상황을 강조하는, '자기 개선'을 의미하는 단어가 되었다. 종교적으로는 '정신적 초월'에 대한 용어가 되어 스스로의 정신적 활동을 통한 자아의 재생을 의미하게 되었고, 몇몇 종교 지도자들은 "우리 시대의 가장 영적인 영화"로 꼽기도 했다.
[라이어 라이어](1997) [패밀리맨](2000) [왓 위민 원트](2000) [브루스 올마이티](2003) 등의 영화가 등장하면서, [사랑의 블랙홀]은 하나의 패러다임이 되었다. 초자연적이며 비현실적인 상황에 맞닥트린 주인공이 선하게 내면적 변화를 겪는다는 이야기는, 할리우드의 동화가 된 것이다.
우여곡절 시나리오
초고를 쓴 대니 루빈은 시카고에서 희곡과 지역 tv 쇼의 대본을 쓰던 사람이었다. 그는 1980년대 말에 [사일렌서 silencer]라는 시나리오를 써 할리우드에 팔았다(이 시나리오는 1993년에 [어두워질 때까지 hear no evil]로 영화화된다). 자신감을 얻은 루빈은 la로 삶의 터전을 옮겼고, 스튜디오 간부는 빨리 두 번째 시나리오를 내놓으라며 성화를 부렸다. "나는 그때 같은 날을 반복해서 살아가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구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이야기엔 뭔가 핵심이 빠져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내 캐릭터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를 끌어갈지에 대해 정확히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서점에서 우연히 눈에 뜨인 책은, 앤 라이스의 [뱀파이어와의 인터뷰](1976)였다. 나온 지 10년도 더 된 그 책은 루빈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 "같은 날을 반복해서 산다는 아이디어는 2차원적인 코미디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불멸성의 관점에서 바라보자, 갑자기 뭔가 중요한 의미를 띠기 시작했다. 그리고 수많은 아이디어들이 빠르게 떠올랐다." 1988~1989년 즈음에 그는 초고 시나리오를 완성했다.
왼쪽 사진은 루빈의 첫 시나리오를 영화화한 [어두워질 때까지]. 음모와 반전이 중심인 범죄 스릴러였다. 오른쪽 사진은 [뱀파이어와의 인터뷰]. 1976년에 나온 앤 라이스의 소설은 루빈에게 큰 영감을 제공했다. 영화화는 1994년에 되었다.루빈의 시나리오를 읽은 에이전트의 반응은 희망적이면서도 절망적이었다. "두 가지를 이야기하죠. 첫 번째, 이 시나리오는 내가 읽은 시나리오 중 최고입니다. 두 번째, 이 시나리오를 스튜디오에 팔 수 있을 것 같진 않습니다." 스튜디오 간부들의 반응도 비슷했다. "우린 이 시나리오가 좋습니다. 물론 영화로 만들긴 좀 그렇지만요." 루빈의 새 에이전트는 시나리오를 제작자 트레버 앨버트에게 전했다. 앨버트는 [캐디쉑] 시절부터 해럴드 래미스 감독과 알던 사이. 그는 래미스에게 연출을 제안했다. 돈을 대는 콜럼비아 스튜디오는 래미스가 각색에 참여하기를 원했다. 그 특유의 상업적 감각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래미스가 도장을 찍으면서 많은 것이 바뀌었다. 루빈의 시나리오는 모든 상황이 주인공 필의 내레이션으로 진행되는 방식이었다. 이야기는 필이 타임 루프(time loop. 같은 날이 반복되는 상황)에 빠진 상태에서 시작하며, 필의 연령대도 20대였다. 제작자 앨버트는 초고에 대해 "유럽 영화 혹은 인디펜던트 영화 스타일"이었다고 회상하는데, 작가 루빈은 "지나치게 실존주의적인 톤이었다"고 말한다. 당시 그는 한 젊은 남자의 '인생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왼쪽부터) 시나리오 작가인 대니 루빈, 제작자 트레버 앨버트, 시나리오 공동 작가이자 공동 제작자이자 감독인 해럴드 래미스. 몇 년 동안 떠돌던 루빈의 시나리오는 앨버트를 통해 래미스에게 전달되면서 영화로 만들어질 수 있었다.래미스가 가세하면서 내레이션은 사라지고 이야기는 필이 타임 루프에 빠지기 전부터 시작한다. 코미디 장르로 변해갔으며, 주인공도 30대 후반으로 바뀌었다. 주인공이 변화 과정이 강조되었고, 그러려면 여주인공이 필요하게 되었으며, 자연스레 러브 스토리가 되었다. 이때 irs픽쳐스라는 작은 영화사에서 작가 루빈을 찾아왔다. 원래 시나리오를 그대로 살려 300만 달러 정도의 제작비로 인디펜던트 영화를 만들 테니 판권을 달라는 요청이었다. 고민하던 루빈은 거절했고, [사랑의 블랙홀]은 메이저 스튜디오의 로맨틱 코미디로 탄생하게 된다.
가장 큰 문제는 필이 타임 루프에 빠지게 되는 '이유'에 대한 설명이었다. 스튜디오는 관객이 혼란에 빠질 거라며, 그것을 설명하길 바랐다. 하지만 자신의 시나리오는 그 '혼란'이 목적이라며 루빈은 반대했다. 래미스 감독은 중재에 나서며, 루빈에게 일단 아무거나 하나 쓰라고 했다. 찍을지 안 찍을지는 자신이 현장에서 결정할 것이며, 찍더라도 상황에 따라 최종 편집에서 뺄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루빈은 스테파니라는 캐릭터를 등장시켰다. 필과 같은 방송사에 근무하는 스테파니는 필의 과거 애인. 그녀는 복수를 위해 부두교 의식을 진행하고, 그녀가 뽑은 타로 카드엔 불타는 깃털 속에 부서진 시계가 그려져 있는데 그 시계는 5시59분을 가리킨다. 하지만 래미스는 현장에서 이 장면을 찍지 않았다.
[멋진 인생]과 [크리스마스 캐럴]
[사랑의 블랙홀] 초고 시나리오엔, 펑추토니의 극장에서 프랭크 카프라 감독의 [멋진 인생](1947)이 상영된다는 설정이 있다(영화에선 [알프스 소녀 하이디 2 heidi 2]라는 가상의 영화가 상영되는 걸로 바뀌었다). [멋진 인생]은 평생을 다른 사람을 위해 살아온 조셉 베일리(제임스 스튜어트)라는 남자가 곤경에 빠지는 이야기. 8,000달러의 빚을 갚지 못해 자살을 생각했던 그는, 수호천사 클라렌스(헨리 트래버스)의 도움으로 곤경에서 벗어난다.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하는 조셉에게, 클라렌스는 '조셉이 없는 세상'을 보여준다. 그곳의 많은 사람들은, 조셉의 도움을 받지 못하여 비참하게 살아간다. 다시 현실로 돌아온 조셉은 집으로 달려가고, 이웃들의 도움으로 곤경에서 벗어난다.
[사랑의 블랙홀]은 [멋진 인생]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래미스 감독은 "빌 머레이에게 제임스 스튜어트 같은 전형적인 '미국적 영웅상'을 덧씌우려고 했다"고 한다). 눈으로 뒤덮인 마을, 선행의 중요성, 판타지적 설정 등은 두 영화의 공통점. 하지만 한편으로 두 영화는 정반대의 지점에 있는데, 조셉이 행복한 삶에서 곤경에 빠진다면, 필은 곤경에서 행복한 삶으로 나아간다([사랑의 블랙홀]의 처음과 끝은 [멋진 인생]의 끝과 처음에 상응한다).
[멋진 인생] 전반부의 파티 장면에 조셉이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다(상단 왼쪽 사진). [사랑의 블랙홀] 후반부의 파티 장면에서 필이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다(상단 오른쪽 사진). [멋진 인생] 후반부에 조셉은 눈 속에서 절망적인 상황을 맞이한다(하단 왼쪽 사진). [사랑의 블랙홀] 전반부에 필은 눈 속에서 절망적인 상황을 맞이한다(하단 오른쪽 사진).어떻게 보면 [멋진 인생]은 찰스 디킨슨의 [크리스마스 캐럴](1843)을 뒤집은 이야기인데, 그런 면에서 [크리스마스 캐럴]은 [사랑의 블랙홀]과 매우 흡사하다(빌 머레이는 [스크루지](1988)에 출연하기도 했다). [크리스마스 캐럴]은 타락한 영혼이 변화의 기회를 맞아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다는 이야기. [사랑의 블랙홀]이 다른 점이 있다면, 유령이 스크루지를 동행하는 것에 비해 필은 그 어떤 가이드도 없이 타임 루프 속에 내던져졌다는 점이다.
[사랑의 블랙홀]과 구체적 유사성을 지닌 소설들도 있다. [사랑의 블랙홀]은 개봉 당시 소송 사건에 휘말렸는데, 소설가 레온 아덴은 이 영화가 자신의 소설 [악마의 트릴 the devil's trill]을 도용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 소설의 판권을 할리우드에 팔았고, 당시 [원 파인 데이 one fine day]라는 제목으로 각색되어 스튜디오 사이를 떠돌고 있었던 것. 미국의 세금 환급일인 4월15일을 반복하는 남자의 이야기인데, 아덴이 소송에서 이기진 못했지만 그 유사성만큼은 인정해야 할 것 같다.
빌 머레이가 1988년에 출연한 [스크루지](왼쪽 사진). 이 영화에서 그는 탐욕스러운 방송사 사장으로 나온다. 오른쪽 사진은 [12:01]의 한 장면.sf 소설가인 리처드 a. 루포프도 [12:01 pm](1973)이라는 소설에서 [사랑의 블랙홀]과 비슷한 구조를 선보인 바 있었다. '반복되는 59분' 안에 갇힌 남자의 이야기로 30분짜리 단편 [12:01 pm](1990)으로 만들어져 아카데미 단편영화상 후보에 올랐고, tv 장편영화인 [12:01](1993)으로 만들어져 브뤼셀판타스틱영화제에서 관객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사랑의 블랙홀]이 나오자 원작자 루포프와 단편의 감독이었던 조너선 히프는 소송을 걸었는데, 성과는 없었다.
해롤드 래미스 감독은 부인했지만, 사람들은 그가 p.d. 오스펜스키의 소설 [이반 오소킨의 이상한 인생](1905)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지적했다. 소설에서 이반 오소킨은 마법사의 도움으로 자신의 인생을 다시 살 수 있게 된다. 하지만 그는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마법사를 만났던 시점에 도달한 오소킨. 이때 마법사는 '인생이라고 불리는 덫'의 순환을 바꿀 순 없다고 말하고, 오소킨은 희생을 통해 그것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구원한다. 켄 그림우드의 소설 [리플레이](1986. 한국엔 [다시 한 번 리플레이]로 출간)를 언급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 소설에선 43세에 갑자기 심장마비로 죽은 사람이 18세로 다시 태어나 43세까지 다른 삶을 살고, 계속 '18세에서 43세까지의 인생'을 반복한다. 맬컴 제임슨의 단편 [더블드 앤 리더블드 doubled and redoubled](1941)를 말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소설 속 주인공은 자신이 생각하는 '완벽한 날'을 살기 위해 수많은 '완벽하지 않은 날'을 반복한다.
p.d. 오스펜스키의 소설 [이반 오소킨의 이상한 인생]과 켄 그림우드의 소설 [리플레이]의 표지(왼쪽과 가운데 사진). 한편 해럴드 래미스 감독의 연출작 [멀티플리시티](1996)에서, 여러 명의 '나'는 같은 날을 함께 산다(오른쪽 사진). [사랑의 블랙홀]엔 철학적이며 종교적인 측면도 있는데, 불교의 윤회 사상이나 프리드리히 니체의 '영겁 회귀'를 설명하는 데 이 영화는 꽤 적절한 텍스트이다. 특히 니체의 [즐거운 지식](1882)의 341번째 아포리즘은 마치 [사랑의 블랙홀]을 위해 쓴 듯하다. "어느 날 혹은 어느 날 밤에 악령이 너의 가장 깊은 고독 속으로 찾아와 이렇게 말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너는 네가 현재 살고 있고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다시 한 번 살아야 하고, 셀 수 없이 반복해서 살아야 한다. 그 삶들에 새로운 것은 없고, 모든 고통과 쾌락과 생각과 탄식 등, 네 삶의 모든 것들이 다시 찾아올 것이다. 모든 것이 같은 순서로.' (중략) 그런 생각이 너를 지배하게 된다면, 그 생각은 지금의 너를 변화시킬 것이며 부숴 버릴 것이다."
프리드리히 니체(왼쪽 사진)와 알베르 카뮈(가운데 사진). [사랑의 블랙홀]은 인간 실존에 대한 철학적 텍스트다. 오른쪽 그림은 16세기 화가 티치안이 그린 시지프스.[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시지프스의 이야기도 빠질 수 없을 것이다. 시지프스는 신들의 미움을 사 거대한 바위를 산 정상으로 밀어 올리는 형벌을 받게 되는데, 바위는 정상에서 다시 굴러 떨어지고 시지프스는 다시 바위를 밀어 올려야 한다. 이 영원한 형벌에 관심을 가진 사람은 알베르 카뮈였다. 그가 자신의 실존주의 철학을 피력한 에세이 [시지프스의 신화](1942)는 무의미하고 권태롭게 반복되는 부조리의 삶, 즉 '무의미한 삶'에 물음표를 던진다. 죽음을 선택하거나 희망을 가진다고 해서, 그 삶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건 아니다. 마치 [사랑의 블랙홀]의 필이 자살하지만 다시 살아나는 것처럼 말이다.
여기서 카뮈는 그 무의미한 삶에 의미를 주는 '저항'을 이야기한다. 그의 말에 의하면 저항은 (조금 어렵지만) "부정을 부정함으로써 긍정에 이르려고 하는 용기"다. [사랑의 블랙홀]의 필도 마찬가지다. 그는 마을을 벗어나거나 자살하려는 시도는 더 이상 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하루하루를 견디며 피아노를 배우고 선행을 베푼다. 그는 무의미한 삶에 의미를 주기 시작한 것이다. 그 결과 '블랙홀' 같았던 하루에서 벗어난다.
빌 머레이, 전환점을 맞이하다
반복되는 하루 안에 갇힌 남자 필 역에 래미스 감독이 처음 떠올린 배우는 톰 행크스였다. 존 트래볼타, 스티브 마틴, 체비 체이스 등도 물망에 올랐다. 시나리오 작가 대니 루빈은 괴짜 느낌이 나는 케빈 클라인을 원했다. 하지만 래미스 감독은 "너무 잘생겼다"는 이유로 결국 그들을 모두 캐스팅 라인에서 탈락시켰고, 오랜 동료인 빌 머레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여기엔 그가 코미디 전문 배우라는 안정감도 작용했다. 리타 역엔 포크 싱어인 토리 아모스가 한때 거론되었으나, 앤디 맥도웰로 낙점되었다.
당시 빌 머레이는 코미디 이미지에서 벗어나 좀 더 진지하고 알찬 역할을 맡길 원했다. 시도는 일찍이 있었다. 1984년에 서머셋 모옴 원작의 [면도날 the razor's edge]에 출연했던 것. 하지만 갑자기 진지해진 그의 모습에 관객들은 적응하지 못했다. 그로부터 거의 10년 후에 변신에 도전한 [사랑의 블랙홀]은 빌 머레이의 장기를 살리면서도 변화를 추구했던 성공작이었다. 머레이는 [래리 킹 쇼]에서 "[사랑의 블랙홀]은 지금까지 내가 했던 영화 중 최고"라며 만족감을 나타냈고, 이후 그는 [맥스군 사랑에 빠지다](1998) [햄릿](2000)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2003) [브로큰 플라워](2005) 등의 영화로 제2의 전*를 맞이하게 된다.
[사랑의 블랙홀](왼쪽 사진)은 빌 머레이에게 전환점이 된 영화였다. 이후 조금씩 코미디 배우 이미지를 탈색시킨 그는, 10년 후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오른쪽 사진)으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르며 제2의 전*를 맞이한다. 갈등은 있었다. 일단 시나리오가 문제였다. 루빈의 초고와 스튜디오의 상업적 요구 사이에서 래미스 감독이 절충하면서 시나리오는 다듬어져 갔지만, 촬영 3주 전까지 혼선은 계속되었다. 래미스의 사춘기적 감수성의 코미디는 루빈의 엉뚱한 유머 감각과 충돌했다. 엔딩은 끝까지 속을 썩였다. 루빈은 타임 루프가 끝나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필과 리타의 사랑이 이루어져 두 사람이 끝없이 반복되는 2월 2일 안에 갇히는 엔딩을 원했다. 그들은 그렇게 수천 년을 사는 것이다. 혹은 필의 타임 루프가 리타로 옮겨가는 방법도 생각했다. 리타에 의해 필의 타임 루프는 끝나지만, 이후 리타는 '영원한 2월 3일'을 살게 되는 것이다. 스튜디오는 2주 정도의 타임 루프를 원했지만, 루빈은 평생(적어도 100년은) 같은 날을 반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무튼 1992년 3월 16일에 촬영은 시작되었고 6월 10일에 끝났다. 영화의 배경은 펜실베니아의 펑추토니(punxsutawney)지만, 실제 촬영은 일리노이의 우드스탁에서 이루어졌다. 루빈과 래미스의 의견 대립으로 갈팡질팡하던 시나리오에서 모호하게 표현된 부분은, 빌 머레이의 즉흥 연기를 통해 명확해졌다. 하지만 더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래미스 감독과 머레이는 영화의 톤에 대해 촬영 내내 싸웠다. 머레이는 철학적인 톤을 원했고, 래미스는 코미디를 원했다(오랜 친구였던 래미스와 머레이는 [사랑의 블랙홀] 이후 10년이 지나도록 절교 상태다. 2011년에 개봉 예정인 [고스트버스터즈 3]가 화해의 계기가 될진 두고 볼 일이다. 이 영화에서 둘은 배우로 함께 출연한다).
필과 리타가 만나는 카페 '팁 탑'(tip top)은 영화를 위해 만들어진 세트였다(왼쪽 사진). 촬영이 끝난 후 그 자리에 진짜 카페가 만들어졌다. 필이 반복해서 빠지는 물 웅덩이 근처의 보도 블록엔 '빌 머레이가 내디딘 곳'(bill murray stepped here)이라는 작은 표지판이 있다고 한다.
2월 1일, 펑추토니로 떠나다
영화가 시작되면 구름이 낀 푸른 하늘이 보인다. 크레디트가 지나가고 푸른 하늘은 블루 스크린으로 바뀐다. 펜실베니아 방송사의 일기예보 담당 앵커인 필(빌 머레이). 그는 냉소적이고(상대 앵커의 실수를 차갑게 정정한다) 성공 지향적이다(다른 방송사에서 스카우트 제안 받은 걸 자랑한다). 그의 눈 앞에선 pd인 리타(앤디 맥도웰)가 블루 스크린 앞에서 장난을 치고 있다. 사람들은 친절하고 순박한 그녀와 함께 일하고 싶어하지만, 필은 전혀 관심 없는 눈치다. '그라운드호그 데이'는 펜실베니아의 펑추토니에서 열리는 페스티벌이다. 이날 그라운드호그(마모트)가 자신의 그림자를 보면 겨울이 6주 동안 연장된다는 이야기가 있다. 필은 4년째 그곳에 취재를 간다. 들떠 있는 pd 리타와 카메라맨 래리(크리스 엘리어트)에 비해 필은 심드렁하다.
블루 스크린 앞의 필(왼쪽 사진)과 리타(오른쪽 사진). 필은 주변과 고립되어 있는 반면에, 리타는 주변 상황과 함께 제시된다. 이것은 그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의 차이, 즉 독불장군인 필과 어울려 사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리타의 차이를 보여준다.시나리오를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분석해봐야 할 영화 [사랑의 블랙홀]은 2월1일부터 3일까지, 단 3일 동안 일어나는 이야기다. 할리우드 시나리오의 전형적인 '3막 구조'로 구성되었는데, 독특한 점이 있다면 영화 내내 '시작'이 이어진다는 점이다. 하루를 '시작'하는 아침 뉴스의 일기 예보로 출발한 영화는, (러닝타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반복되는 2월 2일 속에서 끝없이 하루를 '시작'하고, 엔딩마저 2월 3일의 '시작'이다. 켄 댄시거와 제프 러시가 지은 [얼터너티브 시나리오]라는 책엔, [사랑의 블랙홀]이 지닌 최고의 강점은 바로 이 독특한 '플롯'이라는 분석이 있다. 이 영화는 인물보다 플롯, 즉 '이야기 구성'을 통해 전형적이고 평범한 캐릭터들을 매력적으로 만든다.
펑추토니로 가는 차 안 장면. 카메라는 필과 리타는 투 쇼트(왼쪽 사진)로, 래리는 원 쇼트(오른쪽 사진)로 잡는다. 이것은 필과 리타의 관계가 이후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를 암시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필의 하루가 매일 반복됨에도 관객은 그 하루를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주인공이 심각한 상황에 빠질수록 영화는 점점 재미있어지는 '기적'마저 일어나며, 그 과정에서 묵직한 메시지와 코미디 장르의 요소는 경계를 알 수 없을 정도로 하나가 된다. 토머스 포프는 [좋은 시나리오, 나쁜 시나리오]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일개 코미디 영화가 주인공의 성장을 이토록 크게 보여주거나, 이토록 높은 관객 수준을 요구하거나, 이토록 깊은 도덕적이며 철학적인 탐구를 한 적은 없었다. 설명되지 않은 부분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명확하고 재미있었던 적도 없었다."
[스쿠루지]의 프랭크 크로스(왼쪽 사진)와 [고스트버스터즈 2]의 피터 벤크먼(오른쪽 사진). 빌 머레이는 두 캐릭터를 통해 tv 산업 속에서 영혼 없이 살아가는 캐릭터를 보여준다.타임 루프에 빠지기 전인 '2월1일'은 101분의 러닝타임에서 7분 정도를 차지하는 짧은 분량인데, 여기서 래미스 감독은 간단하지만 매우 재치 있게 필의 상황을 보여준다. 첫 장면에 필은 일기 예보를 하는 (컴퓨터그래픽 합성을 위한) 텅 빈 블루 스크린 앞에 있는데, 이것은 그의 공허함을 보여준다. 그는 일기 예보를 하면서 블루 스크린 위의 이곳저곳을 짚지만, 사실은 아무 곳도 가리키고 있지 않다.
일반적으로 할리우드 영화에서 tv 산업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도덕적 파산에 이른 상태인데, 재미있게도 빌 머레이는 이미 비슷한 역할을 두 번이나 맡았다. [스크루지]에서 그는 돈만 아는 방송사 사장이었고, [고스트버스터즈 2](1989)에선 '초능력의 시간'이라는 심령 과학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근근이 살아가는 과학자다. [사랑의 블랙홀]의 필도 마찬가지다. 닳고 닳은 속물의 얼굴을 지닌, 지루한 삶에서 자신에게 충격을 줄 그 어떤 것을 허망하게 좇는, 모든 것을 혐오하는 남자. 그가 바로 필이다.
'프레임 속 프레임'으로 보이는 브라운관 속의 필(왼쪽 사진). 격자 무늬와 마천루를 배경으로 한 필(오른쪽 사진). 공간적으로 갇혀 있는 이미지는, 그가 시간적으로도 갇혀 있을 수 있다는 걸 암시한다. 이후 그는 펑추토니라는 마을과 2월 2일이라는 날짜 안에 갇힌다.그리고 필이 그곳에 4년째 취재를 간다는 사실에서, 그가 이미 반복의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 암시된다. 이처럼 그가 '갇혀 있는' 인물이라는 건 시각적으로도 드러난다. '프레임 속 프레임'으로 제시되는 브라운관 속의 필이나, 피츠버그의 스카이라인을 배경으로 한 스튜디오는 직접적으로 '갇혀 있는 필'을 보여준다. 필이 별 생각 없이 내뱉은 말도 부메랑이 되어 그에게 돌아온다. 그는 시청자들에게 "오버슈즈(방수용 덧신)은 집에 놓고 나가세요"리고 말하는데, 펑추토니에서 그는 물웅덩이에 계속 빠진다. 숙소 여주인인 랭커스터 부인(안젤라 페이튼)에게 "오늘 떠날 확률, 100퍼센트"라고 말하지만 결국 그는 그곳을 떠나지 못한다. 숙소 2층 복도에서 만나는 남자(켄 허드슨 캠벨)에겐 봄이 3월21일에 시작된다고 말하는데, 타임 루프에 빠진 필에게 봄은 오지 않는다.
필은 차 안에서 "내가 마모트나 인터뷰하고 있는 걸 본다면 사람들은 내가 미래가 없는 놈이라고 생각할 거야"라고 말하는데, 이때 펑추토니 마을을 안내하는 거대한 빌보드 밑에 자동차가 있다(왼쪽 사진). 자동차를 압도하는 마모트의 이미지는, 마치 필의 미래마저 짓눌러 버린 듯하다. 영화가 시작할 때의 푸른 하늘과 대비되는, 펑추토니 마을의 흐린 겨울 하늘(오른쪽 사진). 왠지 불길한 기운 속에서,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다.
2월2일, 필에게 무슨 일이?
영화에서 시계는 점점 크게 클로즈업되며, 웅장한 기계음과 함께 오전 5시 59분에서 6시로 넘어가는 과정이 슬로모션을 통해 압도적으로 제시되기도 한다(하단 왼쪽 사진). 필은 시계를 부수지만(하단 오른쪽 사진) 시계는 다시 살아난다.이후 영화는 거의 90분에 가까운 러닝 타임 동안 '숱하게 반복되는 2월 2일'을 보여준다. 필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소니 앤 쉐어의 'i got you babe' 노래에 잠이 깨고(이 노래는 "'i got you babe"라는 구절을 끝없이 반복한다), 복도에서 뚱뚱한 남자를 만나고, 마을 광장으로 가는 길에선 구걸하는 노인(레스 포드웰)과 고등학교 동창인 네드(스티븐 토볼로스키)와 마주치고, 그라운드호그 데이 행사를 취재한다. 돌아가는 길은 폭설로 막혀 있다. 그는 2월 2일이라는 시간과, 펑추토니라는 공간에 갇힌 셈이다.
'첫 번째 2월 2일'은 물 웅덩이에 발이 빠지고, 그날 안으로 피츠버그로 돌아갈 수 없으며, 샤워기에서 찬 물이 나온다는 외엔 큰 문제 없었다. 하지만 '두 번째 2월 2일'부터 필은 데자뷰를 겪는다. 오늘은 어제였고, 모든 것은 반복된다. 이때부터 필의 태도, 행동, 반응에 의해 새롭게 각색되는 수많은 '2월 2일'이 이어진다. 그는 잠 자리에 들기 전에 연필을 부러뜨린다. 하지만 '세 번째 2월 2일' 아침, 그 연필은 다시 붙어 있다. 그가 빠진 타임 워프의 세계에선, 매일 똑같은 물리적 조건이 그에게 주어지는 셈이다. 단, 필의 기억과 감각만은 그대로 축적된다.
[사랑의 블랙홀]에서 흥미로운 점은, 필의 말이나 행동은 부메랑이 되어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점이다. 2월 1일에 래리의 식탐을 비웃으며 흉내 내던 필(왼쪽 사진)은 '네 번째 2월 2일'에 스스로 그런 모습이 된다(오른쪽 사진).'두 번째 2월 2일'이 어제의 반복이 불러 온 해프닝을 보여주었다면, '세 번째 2월 2일'은 좀 더 심각해진다. 리타에게 "며칠째 똑 같은 날이 반복되고 있어요. 어제가 사라진 것 같아요"라고 말한 필은, 병원을 찾아 엑스레이 사진을 찍지만 아무 이상 없다. 정신과의사는 "내일 다시 찾아오라"고 할 뿐이다. 이때 필이 만나는 사람은, '팁 탑' 카페에서 그들의 옆 테이블에 앉았던 거스(릭 두커먼)와 랠프(릭 오버튼)이다. 필은 그들과 술을 마시는데, 이 장면은 꽤 의미심장하다.
거스는 필에게 "당신은 컵에 물이 절반 정도 차 있을 때, 절반'밖에' 안 남았다고 하는 사람 같다"고 말한다. 삶의 태도에 대한 지적이다. 필이 "만약에 한 공간에 갇혔고 매일이 똑같아서 어떤 일도 소용 없어진다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묻자, 술에 취한 랠프는 말한다. "내가 요즘 그래요." 거스와 랠프는 소도시에 사는 전형적인 노동자 타입의 인물들인데, 그들의 삶도 필의 반복되는 삶과 별 다를 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수잔 도튼이라는 평론가는 "타임 루프 속에 갇힌 필의 상황은, 경제적 권리를 박탈당한 사람들의 (수동적) 삶과 같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술에 취한 세 사람은 자동차에 타고, 필은 정신 없이 차를 몬다. 결국 필은 유치장에 갇히지만, '네 번째 2월2일'에 침대에서 깨어난다.
랠프와 거스와 보낸 '세 번째 2월 2일'(왼쪽 사진). 그들의 말은 평범하면서도 의미심장하다. 한편 필은 타임 루프를 이용해 낸시라는 여성을 꼬시는 데 성공하지만, 순간적인 욕망을 충족시키는 행동일 뿐이다.'네 번째 2월 2일'과 '다섯 번째 2월 2일'은 필이 낸시(마리타 제러티)라는 여자를 꼬시는 데 할애된다. 일단 그녀에 대한 정보를 얻은 필은 그 정보를 이용해 그녀와 '원 나잇 스탠드'에 성공한다. 그런데 이때, 낸시와 관계를 맺던 필은 자신도 모르게 낸시를 리타라고 부른다. 무의식이 드러나는 순간. 이때 필은 낸시에게 청혼하지만, 아무 의미 없는 행동이다.
5일 동안 반복된 2월 2일은 같은 날이 반복될 때 생길 수 있는 여러 해프닝들을 보여준다. 그러면서 이 영화의 모티프 중 하나인 '시'가 등장한다. '네 번째 2월 2일'에 필이 게걸스럽게 음식을 먹어 대며 "난 제자리 걸음만 한다"고 말하자, 리타는 그에게 월터 스코트의 시를 들려준다. "자기 안에만 몰두하는 가엾은 그대여/사는 동안에는 손가락질을 받고/죽어서는 그대가 태어난 곳 더러운 먼지로 되돌아갈지니/그대를 위해 슬퍼하는 자, 노래하는 자 하나 없도다." 하지만 필은 시의 진정한 의미를 모른다.
이후 리타가 19세기 프랑스 시를 전공했다는 걸 알게 된 필은 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해 프랑스어를 배우고 자크 브렐의 시를 암송한다. "내가 사랑하게 될 소녀는/매일 아침마다/조금씩 맛이 깊어지는/좋은 와인과 같다." 이때까지도 필은, 의미를 모른 채 시를 외울 뿐이다. 하지만 변화를 겪은 필은 데이트를 하고 침대에서 그녀에게 시집을 읽어준다. 조이스 킬머의 "신만이 나무를 만들 수 있다"는 구절. 이때 필은 리타에 대한 자신의 진정한 사랑을 깨닫는다.
이후 필은 스스로 시인이 된다. 숙소 복도에서 항상 봄이 언제 오냐고 묻는 남자에게 그는 "저기 낮잠을 자고 있는 겨울이 얼굴에 미소를 띠고 봄을 꿈꾸네"라고 답한다. '마지막 2월 2일'에 그라운드호그 데이를 취재하면서 그는 이런 멘트를 한다. "극작가 안톤 체호프는 겨울을 희망이 없는 황량한 계절이라 했습니다. 하지만 겨울 역시 생명 순환의 일부입니다. (중략) 길고 화려한 겨울보다 더 좋은 시절은 없을 것입니다." 그날 밤 필이 리타에게 들려주는 진심 어린 사랑의 고백은,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일 것이다. "내일, 아니 내 인생에서 무슨 일이 닥치든 지금은 행복해요. 당신을 사랑하니까."
같은 날이 반복되면서 '갇혀 있는 주인공'의 이미지는 시각적으로 반복된다. '팁 탑' 카페 장면에서 그의 뒤엔 베니션 블라인드가 있고 벽엔 두 개의 시계가 걸려 있다(상단 왼쪽 사진). 병원에서도 그는 베니션 블라인드 안에 갇힌다(상단 오른쪽 사진). 의사로 래미스 감독이 카메오 출연했다. 아침에 일어난 그가 창 밖에 내다보는 장면도 그가 갇혀 있음을 드러낸다(하단 왼쪽 사진). 그리고 그는 음주 운전 사고로 급기야 '진짜로' 갇힌다(하단 오른쪽 사진).
2월 2일, 2월 2일, 2월 2일…
자동차를 몰아 벼랑에서 떨어지고, 욕조 안에서 토스터로 감전사를 시도하고, 달리는 자동차 앞으로 뛰어들며, 종탑에서 투신 자살을 시도하는 필. 하지만 그는 죽지 못한다. 그가 '살아 내야 하는' 2월 2일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사랑의 블랙홀]에서 '2월 2일'이 몇 번 반복되는지는 알 수 없다. '다섯 번째 2월 2일'까지는 명확하게 제시되지만, 그 다음부터는 정확하지 않다. 필이 프랑스어와 피아노와 얼음 조각을 배웠다는 걸 감안하면 꽤 긴 시간이 흘렀다는 걸 알 수 있을 뿐. 언젠가 래미스 감독은 "필이 펑추토니에서 10년 정도 살았다고 봐야 한다"고 했는데, 어느 사이트에선 '8년 8개월 6개월 16일'으로 계산했다. 피아노 배우는 데 3년, 얼음 조각 배우는 데 3년, 프랑스어 배우는 데 2년, 모자에 카드 던져 넣기 배우는 데 6개월, 기타 16일이라는 계산이었다. 여기에 래미스는 "사실 10년도 짧다고 생각한다. 어떤 일이든 한 가지에 익숙해지려면 10년은 걸리니까. 30~40년이 걸렸을 수도 있다"는 이메일을 사이트 운영자에게 보내기도 했다.
'다섯 번째 2월 2일' 이후의 이야기는 긴 세월에 걸친 필의 변화에 초점을 맞추는데, 여기서 시나리오를 쓴 대니 루빈은 의사이자 작가인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책들, 특히 죽음을 앞 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죽음의 순간](1969)에서 큰 도움을 받았다. 이 책을 보면 시한부 인생을 사는 사람들은 죽음을 '부정-분노-타협-절망-수긍' 5단계로 받아들인다. [사랑의 블랙홀]의 필도 마찬가지다. 처음에 그는 2월 2일이 반복되었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지옥 같은 현실에 화 내다가, 타임 루프를 이용해 잠시나마 삶을 즐긴다. 여자를 꼬시기도 하고, 현금 수송 차량에서 돈을 훔쳐 멋진 자동차를 사기도 하는 것. 여기까진 부정과 분노와 타협의 단계인 셈이다. 하지만 곧 절망의 단계가 찾아온다. 그는 운명의 굴레를 깨기 위해 자살 시도를 한다. 그러나 그는 죽지 못한다. 그래서 결국은 수긍한다.
2월 2일에 펑추토니에서 생긴 모든 일을 알게 된 필은 현금 수송 차량에서 손 쉽게 돈을 훔친다(왼쪽 사진). 그 돈으로 멋진 자동차를 산 그는 여자를 꼬셔 극장에 간다(오른쪽 사진). 상영중인 영화는 [알프스 소녀 하이디 2]. 이때 필은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브롱코 빌리](1980)에서 했던 복장을 코스프레 한다. 필의 복장은 이스트우드가 스파게티 웨스턴 장르에서 지겹게 했던 것이며, 그들이 보는 영화는 '속편'이다. 여기서 이 영화의 중요한 모티프인 '반복'이 다시 한 번 드러난다.그가 본격적으로 변하기 시작하는 건 바로 이 '수긍'의 시점이다. 필은 리타 앞에서 몇 가지 신기한 일을 보여준다(리타에겐 신기하겠지만, 필에겐 지겨운 일이다). 그는 몇 초 후에 일어날 일을 예견하고, (리타에겐) 낯선 사람들의 사생활도 모두 알고 있다. 반신반의하지만 일단 믿기로 한 리타. 필은 그녀와 진정한 첫 데이트를 한다. 이전에도 데이트는 있었지만 그것은 모두 리타를 육체적으로 꼬시기 위한 것이었을 뿐. 그리고… 필의 변화는 시작된다.
필은 리타의 호감을 사고 데이트를 한다. 눈사람을 만들고 눈싸움을 한 후 함께 눈 위에 누운 두 사람(왼쪽 사진). 그들은 눈이 날리는 속에서 왈츠를 추는 아름다운 장면을 연출한다(오른쪽 사진). 이때 흐르는 노래는 레이 찰스의 'you don't know me'. 필은 아직 리타를 알지 못한다. 진정으로 사랑하기 전까지는. 어쩔 수 없는 현실을 수긍한 필의 변화는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나타난다. 먼저 그의 선행이 이어진다. 길 모퉁이에서 구걸을 하던 노인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나무에서 떨어지는 소년을 받아내며, 할머니들이 탄 차의 타이어를 갈아준다. 돈을 훔치고 그리고 자신의 예술적 능력을 개발한다. 그는 피아노를 배우고, 얼음 조각 기술을 익히며, 독서를 즐긴다.
이런 모습은 리타가 이야기한 이상형에 점점 닮아가려는 필의 (무)의식적 노력이다. 리타는 이렇게 말한다. "첫 번째, 자신의 완벽함도 모른 채 겸손할 것. 똑똑하며 사려 깊으며 유머 감각이 있을 것. 낭만적이고 용감할 것. 외모는 멋지지만 거울은 자주 보지 않을 것. 상냥하며 섬세하고 부드러울 것. 때로는 울 줄도 알 것. 동물과 어린이를 사랑하며, 아이들이 응가 한 기저귀도 갈아줄 것. 악기를 다룰 줄 알며 어머니를 사랑할 것."
래리의 편집기를 통해 보이는 필의 이중 이미지(왼쪽 사진). 이것은 필의 변화를 암시한다. 그리고 '마지막 2월 2일'에 그는 프레임 밖으로 나온다(오른쪽 사진).이러한 모습은 이 영화의 철학적 테마를 강화한다. [사랑의 블랙홀]은 '선한 삶'과 '이기적 쾌락주의' 사이의 대립에 관한 영화다. 이기적 쾌락주의는 오로지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서만 행동하는 것이며, 타임 루프에 빠지기 전에 필이 지녔던 삶의 태도다. 그런 삶은 도덕적, 지성적, 예술적 잠재력을 일깨우는 풍요로운 삶과 무관하다.
하지만 인간은 직접적인 노력을 통해 행복할 수 없다. 자신만의 '행복 그 자체'를 추구하는 행동은 불가능하며, 행복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오는 것이다. 종종 우린 '욕구 충족'과 '행복'을 혼돈하는데, 행복은 선한 행동 속에 잠재된 능력을 깨달을 때 간접적인 방식으로 얻어진다. 행복은 '홀로'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 나누는 것이다.
[사랑의 블랙홀]에서 이기적 쾌락주의자였던 필은 예술을 즐기고(피아노, 얼음 조각) 지성적이며(문학에 대한 사랑), 도덕적인(선행) 사람이 된다. 어느새 그는 리타의 이상형에 가까워져 있으며, 파티에서 피아노 독주가 아니라 다른 뮤지션들과의 잼 세션을 통해 조화의 즐거움을 나눈다. 홀의 수많은 사람들은 그 음악에 맞춰 흥겹게 춤을 춘다. 이 모습은 예술적인 부분과 도덕적 부분이 결국은 하나이며, 그것이 협력할 때 '선'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자신의 잠재력을 개발한 필은 타인과의 교감을 통해 그것을 확장하고, 타인의 즐거움을 통해 행복을 느끼는 것이다.
변화된 필의 눈엔, 평소에 무심히 지나쳤던 노인이 들어온다. 그는 노인에게 음식을 대접하고(왼쪽 사진) 그를 '아버지'라 부른다. 이러한 선행은 그의 예술적 성취와 병행되는데, 그는 파티에서 흥겹게 연주한다(오른쪽 사진). 빌 머레이는 라흐마니노프의 랩소디를 직접 연주했다고 한다.하지만 필도 어쩔 수 없는 문제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죽음'이다, 반복되는 하루 속에서 영생을 얻은 것 같았던 필은, 처음으로 죽음의 한계에 부딪힌다. 2월 2일은 홈리스 노인이 세상을 떠나는 날이었던 것. 한때 자신을 신이라고 불렀던 필은 갖은 노력을 하지만 노인을 살릴 수 없다(원래 시나리오엔 필이 교회에 가서 신에게 기도하는 장면도 있었다). 추운 겨울의 뒷골목에서 필은 노인의 주검을 안고 망연자실하게 하늘을 바라본다. 그리고 다음 날, 드디어 '마지막 2월 2일'이 찾아온다.
필은 숱하게 죽었다가(왼쪽 그림) 또 다른 2월 2일에 부활한다. 하지만 그는 타인의 죽음 앞에서는 무력해진다. 세상을 떠난 노인 앞에서 그는 하늘을 바라본다. 이것은 간절한 염원의 눈빛이다(오른쪽 사진). 그 염원이 유효했는지, 리타의 사랑 때문인지, 그는 타임 루프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된다.
마지막 2월 2일, 그리고 2월 3일
필에게 손을 내미는 리타(왼쪽 사진). 필의 저주는 서서히 풀리기 시작한다. 필은 눈 조각으로 리타의 얼굴을 만든다(오른쪽 사진). 이것은 마치 천사와도 같은 이미지로, 리타는 필의 구원자인 셈이다.[사랑의 블랙홀]은 필이 어떻게 타임 루프에 빠졌는지에 대한 영화가 아니라, 어떻게 나오게 되었는지에 대한 영화이며, 여기서 구원의 손길을 내민 사람은 바로 리타다. 파티의 '총각 경매'에서 가진 돈 모두(339달러 88센트)를 주고 필을 '산' 리타. 필은 눈으로 그녀의 얼굴을 조각해 선물한다. "당신의 얼굴을 너무 잘 알고 있어서, 눈 감고도 만들 수 있어요." 그들은 키스를 나누고, 다음 날 아침 같은 침대에서 깨어난다. 드디어 2월3일을 맞이한 필은 이렇게 말한다. "오늘이 내일이에요."(today is tomorrow)
재미있는 건, 필이 리타에게 펑추토니에서 살자고 제안한다는 사실이다. 취재만 끝나면 도망치듯 빠져나가려 했던 펑추토니였는데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왜 이 영화의 주인공 이름이 필(phil)이었는지 깨닫게 된다. 그라운드호그 데이의 마모트는 '펑추토니 필'이라는 애칭으로 불린다. 마을을 대표하는 마스코트이자 상징적인 이름인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펑추토니에 살기로 결정하면서, 필 코너스는 '진정한 펑추토니 필'이 된다. 그는 마을에서 가장 친절하고 봉사 정신에 투철한, 그 마을을 대표하고 상징하는 '시민'이 된 것이다.
마법을 푸는 리타의 키스(왼쪽 사진). 그리고 드디어 온 2월 3일 오전 6시(오른쪽 사진).조너선 로미라는 평론가는 "이 영화는 절대적인 이상주의와 절대적인 냉소주의에, 동시에 호소한다"고 말한다. 차갑고 현실적인 필이 초현실적 상황을 겪으며 따뜻하고 인간으로 변하는 것이다. 그리고 영화는, 당신이 필만큼 이기적인 인간만 아니라면, 굳이 타임 루프에 빠지지 않더라도 충분히 '펑추토니 필'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중요한 건, 선택이며 실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