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나름의 노파심으로 이 영화의 배경이 되는 실화부터 말씀드리자면,
2차대전의 기운이 충만해져 가는 영국 왕실에서 즉위한 잘나빠진 형이 왕위를 내팽개치고, 대신 왕위에 오른 동생 조지 6세는 의지하기엔 모자라 보이는 말더듬이였지만, 그것을 이겨내고 대전 발발 직후 독일의 폭격 공세에서도 꿋꿋이 국민을 위로하는 명연설들을 해서 국민을 뭉치게 만들었던 장본인이라능. 하지만 스트레스는 이겨내지 못했던지 꽤 젊은 나이에 요절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딸이 엘리자베스 여왕이 되었죠.
오히려 그 형이란 놈은 나치즘에 빠진 년이랑 놀아나면서 동생을 폄하하고 다녔다는 얘기도 나름 유명했던지라, 엘리자베스 여왕은 이 영화가 제작되는 것에 극구 반대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하기사, 글쓰는 본인이라도 그 심정은 이해가 갑니다. 자기 아버지를 비웃고 다닌 새퀴가 극중에 등장해 아버지를 비웃는다는 것, 영국왕실에 먹칠을 하고 다닌 놈,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가 가졌던 약점이 신랄하게 표현될 수밖에 없는 극. 조지 6세의 딸로서는 정말 참아내기 힘든 영화였을테지요. 이 영화의 제작자 중 한 명이자 출연했던 제프리 러쉬도 꽤 고생했을 듯 합니다. ㅎㅎ
어떤 전쟁사든 비스무리합니다만, 특히 2차대전사의 경우는 그 시대에 사는 인간들에게 특히 자신이 가진 능력 이상을 요구했다는 부분에서도 재밌는 부분이 많습니다.
소련의 예를 들어볼까요. 소련은 독일의 침공을 받고는 서쪽에 있던 중공업시설을 전부 뜯어내서 열차에 사람들과 함께 실어 동쪽으로 옮겨버립니다. 아무것도 없는 척박한 땅에 기계만 덩그러니 내려놓은 채 땅을 판 동굴에서 잠을 자고 먹지도 못하면서 하루 15-6시간 이상의 중노동을 해도 오로지 독일의 침공을 막아내겠다는 한 가지 집념으로 버텨내던 역사 등을 접하다보면, 킹스 스피치에서 고생하는 왕 정도는 껌이 아닐까 싶을 정도입니다. 널리 알려진 노르망디나 마켓가든 작전, 밴드오브브라더스에서 선보이던 겨울철의 전선 등등을 생각해보면 껌도 안될 정도겠죠? ㅋㅋㅋㅋ
그런 더 엄청난 역사들이 존재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킹스 스피치의 미덕이 빛을 잃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미래와, 실화의 내용들을 접하고 본다면 이 영화는 신기하게도 더 재미있는 증폭을 지어냅니다. 어느 철학자도 그랬잖습니까. 진짜 인간됨을 알려면 위기보다는 권력을 줘보라고. ㅋㅋㅋ
이미 캐릭터들의 면면을 알고 있기에 그들이 자아낼 긴장의 부분들이 미리 연상된다는 것은 일견 재미를 저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영화의 캐릭터들은 오히려 뻔뻔스럽게도 이 정도는 다 알고 있지 않아 하는 것처럼 오히려 캐릭터들을 자제시킵니다. 필요 이상의 과다한 화면 구성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캐릭터를 표현하는데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미장센, 즉 벽과 공간의 색채 및 화면에 보이는 전체적인 배경들을 이용해서 인물의 심리 상태를 적절히 표현해내는 기본적인 '꼼수'가 이 영화에서는 상당히 빛을 발하고 있다는 점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죠. 왕자는 처음에 라이오넬을 만날 때 여백이 많은 화면의 왼쪽 하단에 자리잡습니다. 불규칙하지만 비슷한 색조들이 덧칠된 배경의 벽은 그대로 왕자의 불안한 심리상태를 표현하기도 하거니와, 그 색채에 인물이 압도당하는 구도를 그려 왕자의 위축된 심리상태를 무의식중에 와닿게 합니다. 형과의 대화에서는 좁고 광량 낮은 복도의 공간 속에 배치해 왕자의 답답하지만 그래도 상황을 바꿔보려는 길고 지루한 싸움을 치루는 주인공의 심리를 표현해줍니다. 왕자의 반응에 고민하는 라이오넬을 잡은 화면의 경우에는 일정한 패턴이 놓인 따뜻한 색조의 벽지를 여백으로 놓아서, 패턴처럼 고집스럽고 완고해보이는 라이오넬의 성격 부분과 따스한 색조로 표현되는, 왕자를 포용하고 생각하고자 하는 라이오넬의 심리까지 대변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다보니, 그렇게 과장되고 큰 연기 감정선이 아니라 해도 충분히 캐릭터의 상태를 무의식적으로 전달받는 부분들이 크다는 점, 이것이 이 영화의 최대 강점입니다. 사실 이것은 영화라는 예술이 가져야 할 미덕이었음에도, 그동안 잊혀져가던 부분들이었죠. 이런 부분은 전에 제 영화리뷰 중 한국영화 라디오스타에 관한 부분에서도 언급했던 적이 있습니다. 캐릭터를 말이나 행동, 상황으로 다 설명해 줄 수 없다면 미장센도 활용해라, 라는 요지였죠.
정말 미장센 끝내주는구나, 생각이 들 정도로 영화가 가질 수 있는 기본적 미덕을 잘 보여준 화면이라 할 수 있겠지만, 또다른 매력은 구스 반 산트의 굿 윌 헌팅에서 흠뻑 맛보았던, 심리치료의 치고받는 면과 그를 둘러싼 소소한 에피소드에도 있습니다.
굿 윌 헌팅 같은 경우는 캐릭터상이 극단적인 부분이 있어 치고 받는 부분이 직설적이고 격하게 나오는 것이 특징이고 미덕이지만, 사실 킹스 스피치는 그런 전법까지는 택하지 않습니다. 다만, 캐릭터가 살아오면서 가졌던 고뇌들을 미루어 짐작하게 하는 은유적인 면이 존재하고 있다는 부분에서 훨씬 몰입감을 주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그 부분은 이후 왕자가 받는 스트레스를 표현하는 화면들과 겹쳐서 더 큰 효과를 내주죠. 이런 전법은, 사실 캐릭터가 어떤 극복을 이루어냈다는 클라이막스의 부분에서는 그다지 높지 않은 파고를 보여주지만, 해소와 함께 이후 그 캐릭터가 요절할 것이라는 실화를 알고 있다는 배경이라면 일말의 연민까지 느끼게 해주는 부분이 있습니다.
여러모로, 사람을 들었다 놓는 큰 감정선의 내러티브는 가지고 있지 않음에도 영화는 제대로 흘러가고 제대로 재밌습니다. 항상 물들어있던 헐리웃의 계산적 구도와는 큰 차이점을 지니고 가는 영화, 한 번쯤은 빠져들 수 있는 영화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