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락영화
영화는 울자고 만든 영화, 웃자고 만든 영화 두 종류로 나뉜다.
울음은 감동이고 웃음은 재미이며, 후자에 속하는 오락영화의 목적은 킬링타임, 시간 죽이기 이다.
멍을 때리는 것은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는 것이라면, 시간 죽이기는 강한 자극에 집중하도록 하여 알아서 잘 흘러가는 시간이 언제 지나갔는지 모르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오락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관객에게 어떤 자극을 얼마나 강하게 주는가에 달려있다.
사람은 자극에 반응하는 기관이 세 가지가 있는데 뇌, 심장, 눈이다. 오락영화는 자극에 반응하는 이 기관들, 뇌, 심장, 눈 중에서 어느 부위를 자극하느냐, 쉽게 말해 머리 굴리는 재미를 주느냐, 심장이 쫄깃해지는 재미를 주느냐, 눈이 즐거운 재미를 주느냐에 따라 그 장르가 나누어진다.
미스터리 - 머리 굴리는 재미로 보는 영화
미스터리는 어려운 문제를 제시하고 관객이 이 문제를 생각하는 과정에서 재미를 주는 영화로, 관객이 머리를 많이 굴리게 하면 할수록 영화의 질은 올라간다. 따라서 미스터리 영화는 시나리오가 중요한데 문제를 내는 감독 자체가 머리를 많이 굴려야 하는 어려움 있으며 높은 난이도 때문에 오락영화에서 미스터리영화는 자주 만들어지는 장르가 아니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메멘토>
영화의 복잡하게 얽힌 스토리 구조는 머리가 깨질 듯한 즐거움을 준다.
이런 미스터리 영화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방법이 있는데 애시 당초 문제 자체를 안드로메다로 날려버리는 것이다. 미스터리는 이를 풀어가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인과관계가 얼마나 설득력이 있느냐가 중요한데 이 문제를 밑도 끝도 없는 것으로 설정하면 감독은 인과관계를 마음대로 풀어내는 것이 가능해지고 관객과의 머리싸움에서 우월한 위치를 점할 수 있게 된다. 또한, 반전은 요소는 복잡한 문제를 조금 조금씩 풀어나가는 다소 골치 아픈 과정 대신에 한방에 관객에게 강한 충격을 주는 고속도로가 된다.
나이트 샤말란의 <식스센스>
이 영화의 대성공 이후로 한동안 반전의 오락영화의 기본공식으로 자리 잡았다.
이후 나이트 샤말란은 외계인(싸인), 정체불명의 죽음(해프닝) 등의
초현실적인 소재를 다룬 미스터리 영화를 집중적으로 찍었다.
스릴러 - 심장이 쫄깃해지는 재미로 보는 영화
스릴러는 주인공이 쫓고 쫓기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스릴로 재미를 주는 영화로 아슬아슬하면 할수록 즉, 영화 내 인물들이 잡힐 듯 말듯하면 할수록 좋은 스릴러가 된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스릴러 영화는 영화 내 인물들이 도망가는 과정을 얼마나 잘 심장이 쫄깃해지게 풀어내느냐에 따라 영화의 성패가 결정되며, 따라서 영화의 장면들은 시종일관 긴장감을 유지할 수 있도록 부지런히 움직여야한다.
조마단 드미의 <양들의 침묵>
스릴러 영화의 대표적인 소재는 살인범이다.
스릴러에서는 장면 한 컷 한 컷이 중요하며 따라서 만드는 사람 입장에서는 여러 가지로 신경 쓸게 많다는 어려움이 있는데 최근 들어 많이 만들어지고 있는 좀비영화는 그 소재 자체만으로 이러한 어려움을 다소 덜어준다. 좀비는 그 모습만으로 공포감을 주지만 걸어 다닌다는 한계가 있었다. 걸어 다니는 좀비는 보기에는 무서울 수 있어도 심장이 쫄깃해지는 스릴감을 주지는 못한다. 그런데 영화 <새벽의 저주>는 최초로 뛰어다는 좀비를 등장시켜 좀비 자체의 공포에 스릴감을 더하였다.
대니 보일의 <28일후>
최근 유행하고 있는 좀비영화는 비교적 쉽게 만들 수 있는 스릴러다.
액션 - 눈이 즐거운 재미로 보는 영화
액션은 오락영화 중에서 가장 단순하다. 그냥 막 때려 부수면 된다. 많이 때려 부수면 부술수록, 즉 스케일이 커지면 커질수록 눈에 주어지는 자극은 커지고 영화의 재미는 증가한다.
마이클 베이의 <나쁜 녀석들>
액션영화는 단순하다. 그냥 부셔라.
스케일의 크기를 키우기 위해서 액션 영화는 SF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사람이 때려 부수는 것에는 한계가 있지만 외계인이나 로봇이 때려 부수는 것에는 한계가 없다. 문제는 이런 스케일을 제대로 구현해 낼 수 있느냐, 즉 얼마나 많은 돈을 쓸 수 있느냐이다. 액션영화를 헐리웃이 거의 독점하다시피 하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그냥 미국이 돈이 제일 많기 때문이다.
마이클 베이의 <트랜스포머>
사람이 부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하지만 로봇이 부수는 것에는 한계가 없다.
괴물영화
오락영화의 이러한 세 가지 장르적 특징들을 비교적 손쉽게 구현할 수 있는 것이 괴물이다. 괴물은 그 설정이 밑도 끝도 없다는 점에서 미스터리 영화처럼 골치 아프게 고민을 할 필요도 없으며 그 소재 자체가 주는 기괴함 때문에 스릴러 영화처럼 화면 구성을 복잡하게 꼬지 않아도 된다. 또한 돈을 마음껏 뿌려댈 수 있는 설정의 한계도 없다. 이러한 점 때문에 괴물은 오락영화에서 매우 매력적인 소재이며 괴물 자체가 영화의 주연이 된다. 따라서 괴물영화는 괴물의 외형을 비롯하여 특징, 정체 등등 괴물 전반의 설정이 얼마나 잘 되어있느냐에 따라 영화의 전체적인 색깔뿐만 아니라 성패가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스터리형 괴물영화의 공식 - 정체를 서서히 밝혀라
괴물은 그 소재 자체만으로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여기에 괴물의 정체를 숨겨서 서서히 이를 드러내면서 이야기를 풀어내면 머리를 굴리게 하는 본격적인 미스터리형 괴물영화가 완성된다. 또한, 마지막에 반전까지 더해지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스릴러형 괴물영화의 공식 - 도망갈 수 있을만한 괴물을 한정된 공간속에 가두어라
스릴러형 괴물영화에서 중요한 점은 괴물이 사람을 압도해서는 안 된다. 도망갈 여지가 없을 정도로 무식하게 만들어버리면 공포는 줄 수 있어도 스릴은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공식 때문에 스릴러형 괴물영화는 <죠스>,<아나콘다>등의 동물이 주로 등장한다. 한편, 괴물이 날뛰는 공간의 경계를 뚜렷하게 정해서 사람을 패닉에 빠지도록 해야 한다. 예를 들어 운동장에서 불이나면 도망치면 그만이지만 건물 안에서 불이 나면 사람들은 패닉에 빠져 긴장감은 극에 달하게 된다. 즉, 스릴러형 괴물영화는 도망 갈만한 여지의 괴물을 도망 갈만한 여지가 없는 공간속에 풀어두어서 잡힐 듯 말 듯 한 스릴감을 주어야하는 것이다.
<에일리언 시리즈>
에일리언은 인간형 외계인으로 설정 자체만으로 감질맛이 날 뿐만 아니라
폐쇄된 우주선 안에서 날뛰어 극도의 스릴감을 준다.
액션형 괴물영화의 공식 - 크게 만들어라
괴물 영화에서 스케일을 키우는 방법은 정말로 단순하다. 괴물의 크기를 키워버리면 된다. 괴물이 크면 클수록 때려 부수는 액션도 커진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괴물의 크기가 커지기 때문에 CG에 상당한 공을 들여야 한다는 점이다. 즉, 돈을 많이 써야한다. 괴물의 모습이 엉성하면 “우와” 하는 감탄사보다는 “뭐야?” 하는 실소가 터져 나온다.
괴물영화의 기본 공식 - 무조건 세 가지를 전부 다뤄라
괴물영화는 세 가지 포인트 중에서 어디에 집중하느냐에 따라 그 장르적 특징이 결정되지만 중요한 점은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아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 미스터리든, 스릴러든, 액션이든, 뭐가 되었든지 간에 아주 잠깐이라도 나머지 두 가지를 다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미스터리가 빠지면 유치해지고 스릴러가 빠지면 긴장감이 떨어지며 액션이 빠지면 재미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거의 모든 괴물영화는 초반에는 괴물의 정체를 다루어주면서(미스터리) 중반부 정도에는 괴물에 쫓겨주고(스릴러) 마지막에는 괴물에 맞서 싸운다(액션). 어디에 포인트를 두느냐는 감독의 마음이다. 하지만 나머지 두 가지를 그냥 넘어가버리면 영화는 쉽게 말해서 망한다.
맷 리브스의 <클로버필드>
감독은 ‘관객은 괴물의 정체에 관심이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무식하게 큰 괴물이 나와서 그냥 부순다.
하지만 관객은 괴물의 정체에 관심이 있다.
영화가 망한 결정적인 이유다.
최고의 괴물영화 - <쥬라기 공원>
일반적인 괴물영화들은 미스터리, 스릴러, 액션의 세 가지 요소 중 하나의 포인트에 집중한다. 그러나 <쥬라기 공원>은 괴물이라는 소재가 가지는 장점을 극대화하여 미스터리, 스릴러, 액션의 세 가지 요소를 균형적으로 영화 내에 자연스럽게 풀어냈다.
영화는 공룡의 등장 배경을 매우 그럴듯하게 설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과정을 비교적 자세하게 다루었으며, 이를 단순한 설정으로 끝내는게 아니라 스토리라인 안으로 녹여내어 머리 굴리는 재미 이외의 생각할만한 여지를 주었다. 또한, 고립된 섬 안의 건물 안에서 사람의 크기만한 공룡인 밸로시랩터가 사람을 추격하도록 하여 심장이 쫄깃해지는 재미를 주고 있으며, 거대한 티라노사우루스를 등장시켜 스케일의 크기를 키웠다.
이처럼 미스터리, 스릴러, 액션의 세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쥬라기공원>은 일반적으로 B급 취급을 받는 괴물영화의 한계를 넘어선, 명작의 반열에 오른 거의 유일한 괴물영화가 되었다.
과학이 만들어낸 공룡이라는 설정은 상상력을 자극할 뿐만 아니라 과학의 문제를 생각하게 한다.
사실 랩터의 실제크기는 사람의 절반정도라고 한다.
스필버그는 랩터의 크기를 실제보다 두 배 키워 스릴러의 요소를 집어넣었다.
티라노사우루스의 거대한 몸집은 볼만한 액션을 만들어낸다.
한국의 괴물영화
괴물영화의 중심은 괴물이고 괴물이 어설프면 세 가지 기본 요소들을 아무리 잘 표현해도 도로아미타불이 된다. 따라서 괴물의 CG는 영화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인데 문제는 이것이 기술적으로 어려울 뿐만 아니라 돈이 많이 든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괴물영화는 기술과 자본을 가진 헐리웃에서 제작된다. 하지만 한국영화는 90년대 이후의 르네상스로 기술력과 자본을 서서히 갖추기 시작하였고 최근에는 괴물영화의 장르에도 도전을 하고 있다.
한국의 미스터리형 괴물영화 - <괴물>
괴물의 움직임이 많이 나오면 나올수록 CG가 많이 필요하며 기술적으로도 어려워진다. 그래서 봉준호 감독은 쿨하게 CG를 외국업체에 맡겨버리고 본인은 미스터리를 집중적으로 팠다. 특히나 봉준호 고유의 스타일로 사회적 코드를 은근슬쩍 집어넣어 상당히 독특한 괴물영화를 완성하였다. 영화는 괴물이 주는 스릴이나 액션보다는 괴물의 정체를 둘러싸고 나타나는 여러 가지 이야기들에 집중하여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를 밑도 끝도 없이 풀어내기 보다는 사회적 문제와 결부시켜 머리 굴리는 재미를 떠나 생각하는 재미를 주어 심지어는 오락영화의 경계마저 넘어버렸다. 이러한 독특함으로 인해 <괴물>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봉준호의 <괴물>
영화는 괴물의 정체를 미국의 패권주의와 연결시키고 있으며 소소하게나마 반전의 요소까지 집어넣었다.
상당히 독특한 괴물영화로 단순한 킬링타임용 영화를 기대한 사람에게는 다소 부담스러울 수 있다.
한국의 스릴러형 괴물영화 - <차우>
<괴물>이 독특한 스타일의 괴물영화라면 <차우>는 전형적인 스릴러형 괴물영화의 공식을 따르고 있다. 그냥 덩치가 좀 큰 멧돼지라는 아주 정직한 괴물을 산과 폐쇄된 탄광이라는 한정적 장소에서 날뛰게 하였다. 문제는 너무나도 전형적이어서 다소 뻔하다는 점인데, 독특하게도 이 영화는 코미디의 요소를 집어넣어 이를 극복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코미디적인 요소는 큰 효과를 보지 못하였고, 결정적으로 괴물영화의 CG가 가지는 태생적인 어려움 때문에 중박 정도의 흥행성적을 거두는데 그쳤다.
하지만 CG의 한계를 극복하지는 못하였다.
한국의 액션형 괴물영화 - <디워>
한창 고질라가 영화계의 주목을 받고 있을 때, 심형래 감독은 고질라의 대항마로 용가리를 만들었다. 재미있는 점은 영화홍보에서 심형래 감독이 강조한 것은 용가리의 크기가 고질라보다 더 크다는 점이다. 어찌 되었든지 간에 심형래 감독은 액션형 괴물영화의 포인트를 제대로 잡아내긴 하였다. 하지만 한국영화의 기술력, 자본력의 한계로 인한 CG의 문제로 용가리는 완전히 망했고 심형래 감독은 <디워>로 액션형 괴물영화에 다시 도전을 하였다. 그리고 <디워>는 최소한 용가리를 넘어서는 데에는 성공하였다. 하지만 앞서 말한 <클로버필드>의 실패처럼 미스터리, 스릴러적인 요소가 전혀 없었으며 판타지를 결합하려고 하였지만 시나리오가 도저히 수습이 불가능할 정도로 엉망이어서 참담한 실패를 겪고 만다.
심형래의 <디워>
이래저래 욕을 많이 먹긴 했지만 액션형 괴물영화의 최소한의 포인트는 제대로 잡아냈다.
최악의 괴물영화 - <7광구>
<7광구>는 어설프게나마 괴물영화의 기본공식을 따르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어설퍼도 너무 어설프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영화는 미스터리, 스릴러, 액션의 세 마리 토끼에게 총을 쏘긴 쏘았는데 정말 단 한 마리의 토끼에게도 흠집조차 내지 못한 꼴이 되고 말았다.
일반적인 괴물영화는 어설프게라도 초반 도입부에 꼭 괴물의 정체를 다루고 있다. <7광구>도 이를 다루고 있긴 있지만 대사 몇 마디로 끝내버려서 어설픈 것을 넘어서서 뭔가 밑도 끝도 없는 느낌을 주고 있다. 미스터리적이 요소에서 완전히 실패한 것이다.
그렇다면 스릴러는 어떨까. 일단, 망망대해에 떠있는 석유시추선이라는 공간의 설정은 꽤나 탁월하였다. 문제는 괴물의 모습을 괴물영화라고 해서 정말로 괴물처럼 설정해버려서 스릴러적인 요소를 가지기에는 너무 밑도 끝도 없어져버렸다는 것이다. 이러한 본질적인 한계로 인해 관객들은 아무리 카메라를 뒤집고 돌려대도 도무지 심장이 쫄깃해지지 않는다.
괴물의 설정이 밑도 끝도 없는 괴물이라면 액션이라도 크게 했어야 했다. 물론 <7광구>의 제작비는 꽤나 많이 들긴 하였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한국영화 치고는 많이 든 것일 뿐이다. 가장 결정적인 것은 괴물의 CG가 형편없다는 것이다. 괴물영화의 주연은 괴물 그 자체이다. 그런데 이 영화의 괴물은 연기력이 형편없는 배우 정도가 아니라 아예 영화 출현경험이 전혀 없는 일반인을 쓴 것 같은 느낌이다. 괴물영화에서 CG는 관객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다. 이런 점에서 <디워>는 최소한의 예의는 지켰고 <7광구>는 가히 관객을 농락한 수준이다.
괴물영화는 비교적 만들기 쉬운 오락영화이지만, CG의 기술적 한계 때문에 다른 의미로 매우 어려운 영화이다. 하지만 세 가지의 키워드 중에서 최소한 하나라도 제대로 팠다면 이 정도까지는 안 되었을 것이다. <괴물>은 미스터리에 집중하여 대박이 났고 <차우>는 스릴러에 집중하여 본전은 건졌다. <디워>는 실패할 수밖에 없었지만 한국 CG 기술의 가능성을 보이는 데에는 성공하였다. 그런데 <7광구>는 정말로 아무것도 건진 것이 없는 최악의 괴물영화가 되고 말았다.
괜히 3점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