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영화, 음악과 같이 장르적 특성이 확연하게 나뉘는 대중 예술에 관해서 특히 편식(?)이 심한편입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절대로 봐서는 안될 영화의 장르는 국산 멜로 영화라는 생각을 오랫동안 지켜온 사람입니다.
하지만 혼자서 극장에 갈 정도로 용기있는 사람이 아니기에, 한번쯤 같이 보는 사람의 의견을 수렴하여 취향의 타협점을 맞
춰야 할때가 반드시 오게 됩니다. 그렇게 여자친구 손에 이끌려 보게된 영화. '건축학개론'에 대한 리뷰입니다.
극장에 들어가기 앞서 '2시간짜리 한가인 영상화보를 보게 되겠구나' 하는 생각만 가득했지 별다른 기대는 하지 않았습니
다. 뭐 대충 1시간은 주인공들의 연애이야기로 관객들을 몰입시키다가 나머지 1시간은 불치병이나 기억상실 기타등등 식상
하다 못해 뻔히 들여다 보이는 말도안되는 어떤한 장애물로(뭐 이제는 귀신도 나오더군요.) 관객들 눈물좀 짜내겠지. 그러
다가 시나리오작가가 상업성에 찌든 속물이면 말도안되는 해피엔딩, 그 시나리오 작가가 그래도 작품성에 욕심있는 감독을
만나면 세드엔딩, 요즘 트랜드를 따르는 신인 감독이면 열린결말. 이 이상은 절대 없다. 단연하며 좌석에 앉았습니다.
영화는 대중들에게는 거리가 먼 극적이고 운명적인 사랑이야기가 아닌, 정말로 대한민국 사람 누구나 하나쯤은 지니고 있
을 풋풋한 시절의 아련한 추억 속의 그 혹은 그녀의 이야기를 담아 내고 있습니다. 예컨데 이와이 슈운지의 멜로영화가 지니
고 있는 잔잔함과 매우 닮아있다고 느꼈습니다. 제가 영화를 보면서 감히 감독의 역량을 평가하는 기준이 있다면 바로 화법
입니다. 소설의 문체와도 같이 영화에도 감독의 문체가 분명히 존재 합니다. 어떤 영화는 지나치게 설명적 입니다. 관객은
바보가 아닙니다. 충분히 스크린속의 배우들의 행동과 주인공의 시선을 대변하는 카메라의 움직임으로 지금 저 캐릭터가 무
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떤 심정일지 예측 할 수있죠. 배려심이 깊은 것인지 아니면 관객의 수준을 너무 과소평가 하는 것
인지 불필요한 대사, 조잡한 카메라워크는 오히려 감정이입에 거슬립니다.
건축학개론은 개인적으로 상당히 마음에는 화법으로 관객들과 소통합니다. 영화 도입부 건축학개론 수업의 첫 시간, 교수
님은 칠판에 서울시 지도를 붙여놓고 한 명씩 나와 자신이 사는 곳부터 학교까지 통학하는 길을 지도위에 표시할 것을 권합
니다. 이때 주인공 승민(이제훈분)은 조용히 지도위에 선을 그어 나가며 자신의 통학길이 이미 다른 누군가와 일치함을 알
게됩니다. 설레여 보이기도 하고 미묘하게 기뻐 보이기도 하는 승민이 천천히 선을 그어 나가는 장면과 버스안 서연(수지
분)을 몰래 힐끔거리는 장면을 번갈아가며 보여줍니다. 그리고 봄바람 같이 살랑거리는 달달한 배경음악이 차분히 흐르는데
자연스럽게 관객들은 그때 그 시절의 그 혹은 그녀를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렇듯 감독은 특별한 대사나 과도한 극
적 연출 없이 누군가를 좋아하는 20살의 여린 남성의 마음을 리얼하게 그려냅니다.
영화 속 남자 주인공 승민은 자신이 좋아하는 같은 학번의 음대 서연에게 남자 친구가 있는지 혹은 지금 현재 좋아하는 사
람이 있는지 관심이 없는 척 능청스럽고 조심스럽게 주변인물들 통해 알아 갑니다. 그도 그럴 것이 짝사랑의 특성상 당사자
에게 들켜 버리면 어느 쪽으로 든지 강제적 결말을 맺어버리기 때문에, 고백을 할 지언정 들키는 것만큼은 어떻해서든 피
하고 싶은 조심스럽고 소극적인 주인공의 모습이 심히 공감이 됩니다. 풋풋하고 서툰 주인공의 모습을 바라보며 '아 나도 저
런 시절이 있었는데' 하는 아련한 마음이 일어납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극장안에 따로 흡연석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련한 마음에 담배생각이 절로 나더군요.
사실 영화를 보기전 기대를 갖지 않게 했던 일부분으로 배우들의 연기를 뽑을 수있는데, 걱정과는 다르게 무난하게 소화해
냅니다. 특히 수지분은 따로 연기가 필요없을 정도로 비주얼적인 측면에서 화장기 없이 풋풋하고 귀여운 신입생의 모습을
완벽하게 소화해 냅니다. 저같은 경우에는 '내 추억속의 그녀도 저렇게 새초롬하고 발랄했던 것같아' 하고 자기최면을 걸고
있더군요. 건축학개론은 딱히 관객들에게 눈물을 강요하지는 않습니다. 애초에 영화처럼 멋진 로맨스도 아니고 지극히 서정
적이고 어떻게 보면 영화의 소재로서는 조금 부족해보이는 주인공들의 어릴적 추억들을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아기자기하
게 그려 내고 있습니다. 물론 영화기때문에 필요한 필수적 극적 요소는 존재합니다.
영화의 상영시간이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때 쯤되니, 보잘 것 없고 볼품 없었던 내 지난 추억들이 예쁘게 포장된 것
같은 보상감을 느끼게 되더군요. ost로 흘러나오는 기억의 습작도 정말 적절한 선곡이었습니다. 영화가 끝나고 나니 '추억속
의 그녀도 지금쯤 어디선가 이 영화를 봤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만약 봤다면 '영화가 끝나고 나처럼 나를 떠올릴까' 하는 생
각이드는 영화였습니다. 물론 '이제훈 왕 잘생겼다'는 짤막한 소감과 함께 배고프다며 제 손을 당기는 현재의 여자친구의 목
소리에 금새 청승맞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조금은 마음의 파동이 일지 않았나 싶습니다. 멜로영화에 대한 편협한 제 선입견
에 적지않게 금이 가게 해준 작품이였습니다.
나이가 조금 있으신 분일 수록 영화에 대한 평점이 오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와이 슈운지 감독의 서정적 감성
에 목 마르시거나 상업성 짙은 멜로물에 몸서리 치시는 분들께 과감하게 추천합니다. 제 점수는 5점 만점에 4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