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리뷰는 영화 자체에 대한 해석과 평가 보다 영화를 받아들이는 관객의 자세에 대해 좀더 치중하여 작성하였습니다.
따라서 [라이프 오브 파이]를 포함한 다소의 영화에 관한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으니 이점 유의하고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영화는 원작 '파이 이야기'를 기초로 이안감독의 수려하고 환상적인 영상미가 더해져 126분이라는 런닝타임이 어떻게 지나가는 지도 모를 정도로 눈이 호강하는 영화입니다. 본인은 영화를 관람한 후 그 여운을 혼자서 짊어지고 이리저리 생각 하다가 아무런 소득 없이 점점 무뎌지는 것이 싫어서 휴우증이 가시전에 많은 사람들과 피드백을 시도하는 편입니다. 그러다 보면 다른 사람은 어떤 관점을 중심으로 영화를 보는지 '같은 영화를 봐도 가치관에 따라 이렇게 많은 감상이 나올 수 있구나' 새삼 놀라며 영화에 대한 다향한 감상을 마음속에 스크랩해둡니다. 그러면 훗날 다시 같은 영화를 보게 되더라도 전에는 미처 보이지 않았던 부분들이 보이게 되더군요. 영화를 좋아해서 그렇기도 하지만, 이 작은 편집증적인 습관은 스스로 독선적인 태도가 몸에 배지 않게 해주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과장을 조금 보태서 런팅타임 중 아무장면이나 멈춰 놓고 보아도 한폭의 그림이 된다.] 라이프 오브 파이 中
'라이프 오브 파이' 같은 경우 상당히 여운이 오랫동안 남아 아직도 종종 리뷰들을 찾아 읽고는 하는데, 최근 네이버 영화 리뷰를 포함하여 몇몇 리뷰들이 상당히 씁쓸한 기분을 안겨주어 이 리뷰를 작성하게 되었습니다. 영화를 보신 분들은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이 영화는 전형적인 열린 결말방식으로 이야기를 맺고 있습니다. 근래에 영화들이 열린결말의 형태를 많이 띄고 있는데, 그런 작품들은 영화를 좋아하는 누리꾼들 사이에서 항상 논쟁의 화두에 오릅니다. 분명 영화의 결말은 어느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다향한 각도에서 해석이 가능토록 관객에게 열려있는데, 일부 독선적인 생각에 가득차거나 자신의 지식에 대해 자만으로 가득찬 사람들이 그 본질을 흐려놓고 있습니다. 권유를 넘어서 자신의 감상을 남에게 강요하는 리뷰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감상에 설득당해 버리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입니다.
작품안에서 파이가 호랑이 리차트 파커에게 주기 위해 물고기를 잡아 죽이는 장면이 있습니다. 마음이 여린 파이가 살생에 대한 죄책감과 물고기를 보내주신 신에대한 감사에 눈물을 흘리는 장면입니다. 본인은 극장에서 총 2번 이 영화를 보았는데, 2번 모두 어디선가 '오! 죽으니까 색깔이 변한다!' 라며 수근 거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저 역시 '저런 물고기도 있구나' 하며 놀라워 했습니다. 그런데 최근 읽었던 리뷰중에 본성앞에 무너진 도덕과 이성의 패배를 상징하는 이 참담한 장면에서 물고기 색이 변한다며 신기해하는 관객들의 수준이 알만하다며 대놓고 다른이를 비하하더군요.
[컬러플한 물고기가 죽음을 맞자 싸늘한 회색 빛깔로 변해간다. 필자는 영화 관람후 바로 횟집으로 향했다.] 라이프 오브 파이 中
저는 굶어 죽기 딱 좋다는 문학을 전공했습니다. 총명하지 못한 두뇌탓에 깊이 담아오지는 못했지만, 4년동안 제 나름대로 깨달은 사실이 있습니다. 바로 문화예술에 대한 해석이 결코 공식화가 될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비평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말그대로 문학,영화,미술을 포함한 각종 예술에 대한 비평,해석에 대한 방법론입니다. 더 쉽게 말하자면 해석하는 방법정도가 되겠군요. 비평론에서 작품에 접근하는 관점이 굉장히 많습니다. 해석학적 비평, 형식주의 비평, 역사전기 비평, 신화원형 비평, 정신분석 비평, 사회윤리 비평등
어느날 개인면담시간때 비평론 교수님과 상담중에 대화가 샛길로 흘러 일본 애니메이션 '원령공주'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그 호랑이 같고 순수 문학만을 지향할것 같은 교수님께서도 대중문화에 대한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흥분한 탓에 개인면담 시간임을 잊고 주제넘게 그 작품을 어떻게 어떤 관점에서 보셨는지 그 해석에 대해 물었는데, 뜻밖의 대답을 들었습니다. "내 강의가 너무 훌륭해서 니가 비평론에 심취해 있는 것은 알겠는데, 누가 누굴 평가하겠느냐"라는 대답이었습니다. 수업 시간엔 한번도 보지 못한 온화한 미소와 함께. "표면적으로 니 스스로 자연과 인간의 갈등과 해소 그리고 일종의 경각심과 희망을 느꼈으면 됐지. 작품의 구조, 상징, 분석은 그저 지적유희에 불과 하다. 이론은 이론으로 받아 들이고 해석의 정답은 없다"
사실 작가는 그런 의도가 아니였는데 비평가들의 설레발에의해 마치 그 해석이 정설인냥 굳어 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꿈보다 해몽이 더 좋은 격이죠. 작가는 감자를 좋아해서 영화속에 감자를 먹는 장면을 넣었는데 그걸 가지고 감자가 농민들의 가난과 배고픔을 상징하네 어쩌네 하면서 헐뜯고 비방하고 싸우는 사람들을 작가가 보게되면 무슨 생각을 할까요. 배고픔과 가난의 상징이라 해석하고 주장하는 것까지는 건전하고 옳바른 감상입니다. 작품을 해석하고 이해하려는 것은 관객과 독자의 즐거움입니다. 하지만 내가 이렇게 생각하니까 너히들도 이렇게 생각해야한다는 발상은 옳지 않은 것이 분명합니다.
[니 생각을 남한테 강요하지 말라고. 그리고 그건 그냥 감자다.] 손담비의 니가? 中
다시 영화이야기를 하자면 최근 웹하드나 토렌트에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가 올라 오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사실은 이 파일에 딸려 있는 자막에 치명적인 오역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극장에서 보신분들은 올바른 자막으로 인해 혼선이 없으시겠지만 이 잘못된 자막을 보시고 내용에 혼선을 겪고 있는 분이 많으셔서 오해를 풀어 드리고자 합니다. 아래는 영화 속 소설가가 일본인들이 쓴 보고서를 읽는 원문 대사 입니다.
Mr. Patel's is an astounding story, courage and endurance unparalleled in the history of ship-wrecks. Very few castaways can claim to have survived so long at sea, and none in the company of an adult Bengal tiger.
떠도는 자막에서 위 문장은 애초에 배에는 어른 뱅갈호랑이가 없었다라는 뉘앙스로 해석되어 있습니다. 즉 이 자막을 통해 보시면 파이가 들려준 두 번째 이야기가 의심할 수 없는 진실이 되어버립니다. 열린 결말방식을 취하고 있는 이 영화의 '무엇을 믿느냐?'는 심오한 질문이 쓸모 없어지고, 두 번째 이야기의 강제 선택으로 영화가 끝나버립니다. 이렇게 관람하신 분들이 쓰신 리뷰를 읽어 보았는데 꿈도 희망도 없는 무시무시한 영화로 변해 버리더군요. 놀라웠던 것은 영화에서 여인의 형상을 한 섬에 대해 의미를 부여 하셨는데 굉장히 디테일하고 잘 들어 맞아서 흥미로웠습니다.
하지만 본래 원문의 의미는 '성인 뱅갈호랑이와 함께 지내면서 그렇게 오래 생존에 있던 사람은 없었다.'라는 뜻입니다. 해석 하신분이 company를 회사로 해석하셨나봅니다. company는 회사라는 뜻 외에 함께 있음이라는 뜻도 있으며 in the comany of 는 ~함께 지내며 라는 의미의 숙어 입니다.
[혹자는 여인의 형상을 한 섬에 있는 미어캣들이 구더기를 미화한 것이며 파이가 이 섬의 이끼와 나무뿌리를 먹는 것은 식인을 돌려 말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라이프 오브 파이 中
즉 영화의 표면 그대로의 결말은 결국 일본 조사관들이 파이의 첫 번째 이야기를 믿지 않으면서도 두 번째 이야기 대신 첫 번째 이야기를 보고서에 실은 것으로 나옵니다. 결국 어떤 것이 진짜 진실인지는 영화에서 주어지는 객관적 단서로는 구분 지을 수 없습니다. 파이가 눈물을 흘리며 두 번째 이야기를 하는 장면에서 그 것이 진실이기 때문이라고 생각 할 수도 있지만, 오랑우탄을 어머니에 빗대어 이야기하는 동안 구해 내지 못하고 떠나 보낸 첫 번째 어머니의 생각에 우는 것일 가능성도 배제 할 수 없습니다. 같은 선상에서 소설가에게 리차드 파커와의 마지막 작별을 이야기 하는 동안 닭똥같은 눈물을 도르르 흘리는데 이것이 정말 파커와의 이별의 아쉬운 감정이 되살아나 흘리는 눈물인지 혹은 자신을 형상화한 파커를 이야기하며 스스로에 대한 연민 혹은 참회의 눈물인 지 영화가 가진 매체의 특성상 화면의 투영되는 관객의 감정으로 추측할 수 있을뿐 입니다.
시종일관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어떤 것이 진실 인지 자신 스스로 납득해야만 비로소 영화를 봤다고 느끼는 성격의 소유자에게는 상당히 괴로운 영화가 될 수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결국 일본인 조사관조차 잔인하고 참혹한 두 번째 이야기를 부정하고 첫 번째 이야기를 실은 것을 보고 외롭고 역경이 가득한 현실 속에서 신을 떠나 종교자체가 인간에게 주는 의미를 생각 합니다.
영화 '셔터 아일랜드'와 '판의 미로'에서도 우리는 이미 감독이 제시하는 다향성을 경험해 보았습니다. 심지어 이 영화는 대놓고 당신은 어떤 이야기를 믿냐며 관객에게 까놓고 묻습니다. 저는 사실 리뷰의 탈을 쓰고 영화를 받아들이는 자세에 대해 한 가지 방법을 제시하고자 이 글을 작성 하였습니다. 중학교를 거쳐 고등학생까지 저희는 입시를 위한 문학을 배워 왔습니다. 저는 문학을 전공 하였어도 여전히 문학이 너무 난해 하고 어렵다고 느낍니다. 학창 시절에야 옳은 답을 선택해야만 정답으로 인정되고 점수를 얻기 때문에 내 생각은 정답과 다름에도 점수를 위한 답에 우리의 생각을 맞춰왔습니다. 그 것이 우리 모두에게 습관이 되어 버린 탓인 지 이제는 결론이 없는 것, 답이 없는것에 참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내가 미친 건가? 아니면 니들이 날 미친 것으로 몰아가는 건가? 셔터 아일랜드 中 (좌)]
[이 모든 것은 잔혹한 현실 속 소녀의 도피성 상상인가? 아니면 진짜 현실인가? 판의 미로 中 (우)]
제가 제안하는 자세는 자신만의 답을 추론하되, 항상 다른 가능성을 열어 두는 것 입니다. 어쩌면 애초에 감독은 이미 자신의 또렷한 메세지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감독들이 열린 결말을 내놓는 이유는 관객과 소통하고 생각을 묻기 위함이지. 문제를 내기위함이 아닙니다. 감독이 영화를 대중에게 내놓는 순간 영화는 더 이상 감독 혼자 만의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아무리 작품 세계에서 신과 같은 존재인 감독 혹은 작가일 지라도 이미 한 쪽으로 치우친 결말로 영화를 만들지 않는 이상 관객이 믿는 엔딩으로 당신의 영화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어떤 악랄한 감독들 중에는 이미 정해둔 메세지를 작품 속에 이스터 에그 마냥 꼭꼭 숨겨 두고 일부러 관객에게 자신이 의도한 바와 전혀 다른 해석을 유도하여 관객의 수준을 탓하는 변태같은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마치 말년 병장이 마음 속으로 '안마해줘' 하고 생각 해놓고 밑에 애들한테 내가 텔레파시를 보냈는데 왜 내 마음을 모르냐며 갈구는 것처럼 말이죠. 이는 말하지 않아도 감독과 관객중에 누구 수준이 더 떨어지는 지 알 수 있습니다.
작품 속에서 가끔 감독은 우의적 혹은 우화적 기법을 써서 본래 하려던 이야기를 무언가에 빗대어 멀리 돌려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조지오웰의 동물농장이 있습니다. 최근 종종 많은 리뷰들 중에 라이프 오브 파이의 두 버전의 이야기 상관 관계가 우화적인 것에 빗대어 두 번째 이야기가 진실이라며 의견이 아닌 강요를 하고 있는데 의외로 영화를 관람 하신 많은 분들이 '생각 없이 봤는데 이 글을 보니 흩어진 조각들이 맞춰 지는 것 같아요'라며 덧글로 감사를 표하고 있습니다.
흩어진 단서의 조각들은 코난하고 김전일이 맞추게 냅두시고 자신의 감상을 찾으시길 바랍니다. 대중영화에서 무슨 의미를 찾으며 작품성을 거론하냐는 분들이 있을 수도 있는데, 먼 훗날 후손들에게 역사적 시대적 사료로 실질적 가치를 갖는 작품, 그림들은 대부분 대중의 삶과 고뇌를 담은 것들 입니다. 이상으로 열린 결말에 대한 유연한 감상에 대한 저의 생각 이었습니다. 물론 동의 하지 않는 분들의 생각도 모두 존중합니다.
끝으로 영화속 두 이야기와 닮은 소설 두편을 추천합니다.
첫 번째 이야기를 좋아하시는 분은 15소년 표류기, 두 번째 이야기를 좋아하시는 분은 파리대왕. 두 소설 모두 무인도에서 생존해가는 소년들의 이야기를 그린 것이며 영화에서 처럼 한 이야기는 꿈과 모험에 대한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극한의 상황에 처한 인간의 잔인한 본성의 관한 이야기입니다. 어떤 소설을 읽으시 겠습니까?
[다양한 의미로 해석이 가능함. 작품 중심에서 해석하면 사랑하는 대상, 시대적으로 해석하면 조국, 승려였던 작가의 삶으로 해석하면 부처의 진리] 한용운의 님의 침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