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드나잇 인 파리 Midnight in Paris 2011

Dervel 작성일 12.09.18 10: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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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즐겨야 재미를 느낀다 >

 현실은 따분한 소재로 가득하다고 느끼는 작가에게 20년대 파리는 동경의 대상이다.

 그 때 당시를 잘 표현하듯이 많은 작가와 미술가, 몽상가, 영화가들이 자신의 세계를

토론하고 이야기한다.


 이런 것을 꿈 같이 여긴다면 이 영화는 대강의 줄거리를 이해했다 볼 수 있다.


 영화는 과거와 현재를 오가면서 주인공이 느끼는 현실의 따분함을 과거에서 풀어나가기를

원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 영화는 우연히 초대된 과거에서 느끼는 하나의 판타지를

그려내고 있지만, 어색하지 않다. 

 

 과거와 현재의 카테고리를 만들어가면서 과거에 오히려 빠져버리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

가도 이 영화의 재미거리다.


 < 낭만을 잃은 내가 보는 낭만 >

 과거를 바라보는 낭만이란 로맨스적이며 아름답고 황홀하기에 그 속에 가만히 젖어 드는 것이다.

또한, 현재란 불만족의 삶이 이어진다 느껴기에 낭만과 환상에 더욱 집착하게 된다. 그건 영화 속 작가 뿐만이

아니라 우리들 삶에서도 그렇다. 비록 옛날 보다 지난 날에 가까운 개인의 역사 속을 들여다보고서도

"내가 왕년에는 말이야"라고 말 하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그런 자기 동정적 발언은 현재의 행복을 누리지 못하기에 터져나오는 불운한 사람들의 탄식이기도 하다. 

노인들은 황혼을 넘어 별 빛이 드리워진 언저리에 머물기에 황혼 곁에선 사람들을 부러워하고

황혼을 쓸쓸이 바라보는 이들은 정오의 밝은 태양아래 분주하게 자신의 삶을 향해 발돋음 하는 이들을 

부러워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건 자기 인생에 대한 기만이요, 무책임이다.


 결말의 내용이 어떻든 인간의 끝은 정해져 있다. 우리들이 별 빛 따라 가게 될 그 메아리 조차 들리지

않는 인생의 끝에서 과거에 대해 느끼는 것이 동경하는 것이든 동정하는 것이든 후회든 안심이든 

삶의 희망은 언제나 현재에 머물러 있다. 그렇기에 인생의 굴레를 내려놓는 그 순간에 느끼는 것들이

현재에 중요함임을 상상할 수 있다. 내가 있는 곳을 바라보지 못하는 것은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몇 십년 미래를 바라보며 살고 있다. 집을 사고, 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위해 돈을 모으고

그렇게 하나하나 이루어 갈때 행복을 느끼는 걸까? 그리고 자신이 고생하며 걸어온 길을 보며 나는 힘들었어

그러니 미래에서 나는 꿈을 이루어야해라고 읇조리며 걸어가는 것이 행복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위안을 넘어선 불행이다.


 당장에 내일을 생각해보자. 내일 나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리고 그 다음 날도 그 다음 날, 그리고 또 다음날.

그렇게 1년뒤를 바라보고, 10년 뒤를 예상해보고, 20년 뒤를 그려보고, 30년 뒤를 만들어보자. 


 이번엔 과거를 보자. 어제는 어떠했고, 그저께는 무얼했고, 1주일 전에는 무슨 말을 했고, 1년 전에는 어디에 있었고,

5년 전에는 내가 무슨 생각을 했던가.


 그리고 지금을 보자. 나는 누군가. 지금의 나는 누구인가? 과거에서 바라본 나인가? 아니면 나는 미래의 꿈을 이루었는가.


 놀랍게도 여전히 나는 미래를 꿈꾸고 있는 자이다. 지리하고, 고엽적이게도 나는 시름시름 앓고 있는

20대 초반의 청년이다. 왜 그럴까? 왜 나는 하나의 자아로서 아직도 고민하고 깡마른 정신을 가지고 있을까? 

그런 나는 어디서 파생 되었을까? 아직 채워지지 않은 내 자신은 어떤 생각으로 채워나가야 하는 것일까?


 그에 대한 해답은 내 자신을 들여다 볼 때 해답을 찾을 수 있다. 

 나도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 시선을 둘 때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그 두려움이 차고 넘쳐 속살을 갉아먹고 

자라 거대한 괴물로 자리잡았다. 홀든 콜필드의 두려움에서 더 진화된 독한 녀석이다. 


 그 녀석에 이름은 자본주의다. 

 자본주의는 인간의 사상을 갉아먹고, 뇌속에 앉아 우리를 파멸로 이끄는 하나의 기생충이다.


 주인공은 화가와 작가가 서로 호흡하며 경이로운 작품들을 만들어내던 20년대 파리를 이야기한다.

필립 케어리가 거닐며 자신의 청춘을 아낌없이 내뱉었던 그 곳, 피카소와 피츠제럴드가 서로 이야기하며,

현학적 수사와 담미적 토론을 넘나들던 그 때를 말한다. 그 때란 선망의 대상이다.


 자본주의는 이러한 모습을 삼켜버렸다. 어디에서도 젊은이들은 책을 읽지 않으며, 소크라테스를 모르고, 

그들이 가진 몽상적이지만 지식적인 생각을 드러내보이줄 모른다. 더군다나 이런 어설픈 지식을 토해내는

지식인은 자본적 괴물이거나, 조용한 이보다 몽매하다. 

 더 이상 문학적이지도 미술적이지도 않은 그저 돈에 잠식되어, 냉소적인 노예성을 드러내는 천박한 

지식적 빈민층의 오노프레 같은 인간이 판치는 세상이다. 그게 재벌이 됬던 시민이 됬던 20세기 초반의

바르셀로나와 다를 바 없다.


 돈은 미래다. 목적이 되어버린 순간 미래의 가치로 역전되어버린 일그러진 가면이다.

 과거는 후회다. 일그러진 가면을 쓴채 거울을 보면서 이제는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 스스로를 위안하는

바보같은 인간이다. 현재는 그렇게 미래와 과거에 짓눌려 진정한 삶의 목적을 소멸당해버린 것이다.


 그렇기에 20년대의 파리가 내게는 영화 속 이야기와는 다르게 와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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