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자키 하야오의 은퇴작이기도 한 이 애니메이션. 꽤 되는 러닝타임이 지나고, 호리코시 지로라는, 실존했던 인물에 대한 기림 자막이 올라오며 내리는 막. 영화관에 불이 켜지고 나서도, 도대체 이걸 어떻게 이해해 줘야 하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때문에 지금 이 평은, 어떤 것을 관통하는 흐름을 가지려는 것이 아니라, 파편적인 감상들을 늘어놓아 보려는 움직임으로 시작됐습니다.
1. 이 작품 같은, 현실을 배경으로 하여 스토리를 뛰어나게 다룰 수 있는 류의 사람은 사실 미야자키 하야오가 아니라 다카하타 이사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만든 반딧불의 묘는 실제로 그 작품 자체를 관통하는 반전의 주제와는 달리, 피해자 코스프레라는 오해를 듬뿍 사고 있지요. 그래서 왜 그가 참여하지 않았을까를 뒤져보니, 그는 지금 카구야 히메를 준비 중에 있더군요.
2. 일본 내의 여러 전통 및 과거 문화를 환타지적인 수준의 느낌으로 끌어올리는 미술실력은 이 작품으로 정점을 찍었다고 생각합니다. 거기에 수많은 부분들에서, 비주얼 자체는 지브리가 할 수 있는 최고를 뽑아냈다는 느낌입니다. 군중씬, 비행씬, 사물과 자연물의 표현, 모든 부분에서 지브리가 쌓아왔던 것들의 엑기스만 뽑아낸 느낌입니다. 센과 치히로보다 훨씬 더 리얼과 환타지의 경계를 넘나드는 듯한 느낌으로 2차대전 때의 일본 공간을 그려내고 있고,그것 하나만으로는 정말 많은 공부가 되었습니다. (특히 배경미술의 환타즘 쪽에서는 우리나라의 애니메이션 '소중한 날의 꿈'도 그 몫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3. 멜로 스토리 라인 자체는 우리나라 70년대 신파 정도의 감수성을 보는 것 같습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약점 자체도 같이 드러낸 듯한 느낌입니다. 너무 현실적인 흐름에만 천착하기도 뭐했는지, 꿈이라는 공간을 환타지성 라인으로 넣어 중간중간 꿈과 현실의 경계를 허물어 보려 합니다만, 이 부분의 임팩트들은 크게 다가오지는 않습니다.
4. 워낙에 전체적인 면에서 무겁다 보니, 지브리의 이 때까지 계통들과는 다르게, 아예 성인물처럼 만들어보려는 것도 눈에 띄었습니다. 담배라는 아이템이야 여기저기서 조금씩 쓰던 거지만, 아예 여기서는 담배라는 아이템 자체가 일상물처럼 나오고, 키쓰씬 뿐만 아니라 살짝 성적인 부분을 내포하는 표현까지 집어넣는 등, 힐링하려고 갔다가 어 무거워무거워 하는 수준이 되어버린 느낌이기도 합니다 ㅋㅋㅋ
그리고 마지막으로, 호리코시 지로라는 제로센 전투기 설계자를 모델로 쓰고, 심지어 마지막엔 제로센이 날아다니는 뜨악한 장면까지 보게 된 후, 아무리 여러 진보적인 면을 교육받고 그것들에 귀기울인다 하더라도 역사적인 면을 관통하는 주체적 인식이 없다면굉장히 순진한 상태로 현실을 다루게 되어 버리는, 그런 실책의 작품인 것인지,아니면 그저 제로센이라는 일본 군국주의의 표상을 바라보면서 거기에 자동적으로 부정적 의미를 부여해 버리는 피해의식이 몹쓸 것인지, 한참을 생각해보다가, 유레카를 외쳤습니다. http://asahikorean.com/article/asia_now/views/AJ201308080101 이 인터뷰를 보고 그제서야 조금, 이 작품의 심리를 이해하게 되었거든요. 이건 말하자면, 그런 심리와 비슷한 거겠죠. 한국의 70-80년대 극장판 애니메이션의 메카닉들이 온통 일본 애니의 표절로 점철되어 있어도 어쩔 수 없이 그것들에 정감이 가는 70년대 생들의, 그런 양가감정. 그리고 겨우, 처음에 나왔던, 폴 발레리가 쓴 바람이 분다, 살아야 겠다, 라는 구절도 어렴풋이 이해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