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의 힘은 권력보다 강하다

글로벌비전 작성일 08.07.13 14:16:57
댓글 0조회 1,007추천 2
‘진실의 힘’은 권력보다 강하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권력과 자본의 억압에 거침없이 맞서왔다. 사제단은 가장 약한 자의 편에 서기에 주저함도 두려움도 없이 행동에 나선다. 그들이 움직이면 강한 자가 숨죽인다. 사제단의 힘은 ‘진실의 힘’이다. newsdaybox_top.gif ⓒ 시사인(http://www.sisain.co.kr) 주진우 기자 btn_sendmail.giface@sisain.co.kr newsdaybox_dn.gif     ⓒ시사IN 안희태지난 6월30일 시국미사를 마친 사제단 신부들이 십자가를 들고 거리를 행진하고 있다.아이들이 촛불을 들었을 때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사제단)의 고민이 시작되었다. 사제단 정만영 신부는 “아이들은 시대를 본능으로, 양심으로 안다. 항상 역사는 그렇게 시작됐다”라고 말했다. “6월30일 오후 유치원 버스에 탄 아이들이 ‘이명박은 물러가라’를 외치고 있었다. 시간이 가면 설득할 아이들도 사라진다는 절박한 심정이 들었다.” 사제단 통일위원장 김영식 신부의 말이다.

사제단 신부들은 촛불집회에 여러 번 다녀갔다. 6월 초부터 수도회 소속 신부들이 시청광장에서 소규모 미사를 갖기도 했다. 사제단은 촛불집회에서 어떻게, 무엇을 할 것인지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사제단 회의에서 지난 6월23일 시국미사를 갖기로 했다. 그러나 미사는 연기됐다. 전종훈 사제단 대표신부는 “아무래도 때가 아닌 것 같았다”라고 말했다. 6월30일 6시30분에 사제단은 시국미사를 갖기로 결정했다. 사제단은 6월28일 시민과 전경이 서로 쇠파이프를 휘두르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보다 시청광장을 원천 봉쇄해서 시민을 거리로 내쫓고, 항의하는 시민을 무차별로 연행해가는 6월29일 경찰 폭력을 더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사제들은 탄식하고 통곡한다


사제단 고문 함세웅 신부는 말했다. “1989년 10월 노태우 정권 때 브라질에서 성자로 칭송받던 헬더 카마라 주교가 한국에 왔다. 한 기자가 학생들이 화염병을 던지고 과격한 시위를 벌이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카마라 주교는 ‘화염병을 던지는 폭력을 꾸짖기 전에 그들이 왜 거리로 나왔는지, 그들이 폭력을 휘두를 수밖에 없게 만든 원인 제공자가 누구인지 먼저 물어야 한다. 학생이 폭력을 휘두르게 만든 공권력이 제1 폭력이다’라고 말했다.”

성명서 제목이 ‘사제들은 탄식하고 통곡한다’로 정해졌다. 대통령의 힘과 교만을 탄식하고, 국민을 상대로 저지르는 오늘의 폭력상을 탄식한다고 했다. 맹재영 신부는 “잘못은 대통령이 해놓고 입바른     ⓒ뉴시스6월30일 시청광장에서 미사를 집전하기 위해 신부들이 입장하는 모습.소리했다고 국민을 방패로 찍나. 쇠고기 협상에서 드러난 정부의 무능도 울분을 터뜨릴 일이지만, 천심을 폭력으로 억누르는 정부의 교만한 태도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라고 말했다.

사제단의 방향이 결정된 것은 시국미사를 겨우 몇 시간 앞둔 6월30일 오후 3시 제기동성당 회의에서였다. 전종훈 신부는 “빼앗긴 광장을 시민의 공간으로 되찾아주어야 했다. 공권력이라는 폭력에 짓밟힌 상처를 달래주어야 했다”라고 말했다.

사제단은 전경버스로 닫힌 시청광장에 가기로 했다. 경찰은 덕수궁 대한문 앞이나 청계천에서 미사를 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사제단은 봉쇄된 시청광장을 되찾고 싶었다. 광장 한쪽에 천막을 친 것도 이 때문이다.

거리의 신부들, 다시 거리로


무기한 단식을 선언한 것은 폭력에 짓밟힌 국민의 상처를 달래주기 위해서였다. 이영선 신부는 “세상의 아픔이 크다. 아픈 세상의 고통을 나누고 정화하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배인호 신부는 “단식은 우리의 절박한 마음을 대변하는 동시에 사제단 내부의 의지를 단속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라고 말했다.

6월30일 거리의 신부들이 다시 거리에 나섰다. 사제단은 가장 약한 자의 편이기에, 가장 가파른 절벽 길이었기에 피할 수도 없었다고 했다. 사제단의 거리 시국미사는 2005년 평택 대추리에서 미군기지 확장반대 미사 이후 3년 만의 일이다. 서울 한가운데서 대규모 시국미사를 올린 건 1987년 6월항쟁 이후 21년 만의 일이다.

6월30일 오후 5시30분. 사제단 신부가 시청광장에 도착했다. 제단을 만들 책상 두 개와 아이들 캠프 갈 때 쓰는 작은 앰프가 준비물의 전부였다. 그런데 그 앰프도 곧 고장났다. 방송 차량은 경찰 검문에 걸려 미사 시작 시간을 1시간 이상 넘기고도 도착하지 못했다.

하지만 신부들은 태연했다. 문정현 신부는 “우리는 고민 안 해. 사제들은 단순해서 그냥 하면 하는 거야”라고 말했다. 전종훈 신부는 “시청광장에 소풍 가듯 나왔다”라고 말했다.

시간이 늦어지고 문제가 하나 둘이 아니었다. 하지만 밀려드는 신부와 신자가 모두 해결해주었다. 시청광장에는 신자가 부르는 성가가 끊이지 않고 울려 퍼졌다. 어수선함도 사라졌다. 미사 준비 시간이 길어진 만큼 분위기는 더욱 숙연해졌다. 집회 참가자는 이전과 완전히 달라진 분위기에 적잖이 놀랐다.     ⓒ시사IN 한향란서울시청 앞 광장에 설치한 천막에서 단식 중인 사제단 신부들.사실 사제단 신부가 가장 많이 놀랐다. 안승길 신부는 “1989년 문규현 신부와 임수경이 판문점에 왔을 때 신부 430명이 모였는데, 신부가 300명 넘게 올 줄은 생각도 못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시민이 신부 말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었다”라고 말했다. 

“폭력 시위는 경찰이 유발했다”


신부들은 숭고한 촛불의 의미를 지켜내고자 했다. 시민에게 우선 평화를 되찾아주고 싶었다. 그 길은 비폭력이어야만 했다. 촛불집회는 지도부가 없어 통제가 불가능하다고 했다. 집회를 끝내는 것은 더더욱 그랬다.

6월30일 미사와 행진을 마친 밤 10시. 사회를 맡은 김인국 신부는 “밤 10시가 됐다. 귀가할 시간이니 어서 가족 품으로 돌아가기 바란다. 내일도 여기서 촛불을 들어야 하니 서운해도 귀가해달라”고 말했다. 그리고 사제단은 집회를 마무리하는 주기도문과 시민의 안전한 귀가를 기원하는 기도를 올렸다. 그러자 시민 대부분이 김 신부의 말을 그대로 따랐다. 집회에 참석한 시민도, 경찰도, 기자도 놀랐다. 그동안 촛불집회에서 밤 10시는 막 판이 벌어지는 시각이었다.

미사 이틀째인 7월1일 밤 사제단은 평화에게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신부들은 미사를 마치며 백합꽃을 들었다. 그리고 침묵시위를 벌였다. “내 말을 들어달라 하기 전에 내 마음의 소리를 들어보자”라는 사제단 내부의 제안이 있었던 것이다. 시민은 신부들의 뜻을 따랐다. 침묵은 그 어떤 외침보다 크게 울렸다. 집회를 마친 시민 가운데 신부들이 단식하는 천막을 찾아 고맙다면서 눈물을 흘리는 이가 적지 않았다.

둘째 날 촛불집회는 평화시위의 전환점을 돌았다. 집회에 나온 시민의 표정이 밝아졌다. 하지만 신부들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거리 미사 사흘째인 7월2일이 고비였다. 민주노총 조합원 1만여 명이 총파업을 선언하고 촛불집회에 참석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심상정 진보신당 대표는 “민노총에서도 금속노조 조합원은 그냥 돌아서는 법이 없는 강경파다”라고 말했다.

보수 언론의 공세는 30년 된 레퍼토리

사제단은 사흘째 미사를 드리고는 마이크를 광우병 대책회의 측에 넘겼다. 그리고 사제단은 거리행진을 하지 않는 것으로 결정했다. 대신 행진을 시작하던 시위대에게 사제단 총무 김인국 신부가 당부했다.     ⓒ시사IN 윤무영사제단은 김용철 변호사(왼쪽)의 양심선언을 이끌어내 ‘삼성 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했다.“오늘은 평화시위의 시험대다. 거리행진은 분명히 불법이다. 무사히 다녀오시라. 1만명 중에 한 명만 실수를 해도 1만명의 실수가 된다.” 김 신부는 깃발을 든 단체를 일일이 불러가며 ‘잘 다녀오라’고 당부했다. 그리고는 시위대에게 ‘침묵하자’고 권했다. 그러자 행진 대열이 숙연해졌다. 행진은 침묵 속에서 한 건의 사고도 없이 끝났다. 침묵 행진을 마친 시민을 신부들은 장미와 포옹으로 맞았다. 문정현 신부는 “공권력의 강경 대응이 시민의 폭력을 유발했다는 사제단의 주장은 옳았다”라고 말했다.

촛불집회가 불순 세력에 의해 폭력 시위로 변질했다는 비판은 쏙 들어갔다. 대신 사제단에 대한 색깔 공세가 시작됐다. 검찰은 계속 불법 시위의 종지부를 찍겠다며 기세를 올렸다. 중앙일보는 ‘성직자들이 불법 부추기는 모양새는 안 돼’라며 사설을 동원해 비판했다. 검찰과 중앙일보는 삼성 비자금 의혹 사건으로 사제단에 감정이 있다.

‘촛불은 이미 정치로 변질됐다’ ‘사제복을 벗고 정치에 나서라’는 사설이 조선·중앙·동아 등 보수 언론을 도배했다. ‘1987년까지 사제단은 이 땅의 민주화에 기여했다. 하지만 지금은 변질됐다’는 논리다. 그러나 보수 언론의 논리는 이치에 맞지 않는다.

우선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을 지원하는 일부 대형 교회 목사의 정치 행위를 보수 언론은 언급하지 않았다. 지난 6월5일 추부길 목사는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 신분으로 기도회에 참석해 촛불집회 참가자를 ‘사탄의 무리’에 비유했다. 김홍도 목사(금란교회)는 “경찰·검찰·기무사·국정원을 동원해 빨갱이들을 잡아들이라. 좌파 노릇하는 MBC·KBS를 척결해달라”고 기도했다. 조용기 목사(순복음교회)는 7월1일 코리아나 호텔에서 “목회자는 데모의 동조자가 되거나 부추기는 행동을 지양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종교인이 정치에 나선다는 조·중·동의 비판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보수 언론은 주요 시국 사안 때마다 김수환 추기경의 발언을 유도했다. 그러고는 종교 지도자가 이렇게 생각한다면 정말 큰일이라는 식으로 확대 재생산했다. 김 추기경은 국가보안법 폐지 반대, 사학법 개정 반대 발언을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와 만나는 자리에서 내놓았다.

특히 사학법 개정 반대를 위해 대구교구장 이문희 대주교와 서강대 이사장인 박홍 신부 등이 나섰을 때 보수 언론은 한마디도 비판하지 않았다. 오히려 옹호했다. 수많은 학교법인을 가진 교단의 직접 이해관계가 걸려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사익을 위한 정치 참여는 문제없고, 공익을 위한 정치 참여는 안 된다는 논리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보수 언론의 공세에 대해 문정현 신부는 “30년 동안 들어온 레퍼토리다”라고 말했다. 전종훈 신부는 “종교를 울타리 안에 가두려고 한다. 세상이 종교요, 세상 문제가 모두 종교 문제다”라고 말했다. 김인국 신부는 “하늘의 법을 땅에 적용하지 말라고 하는데 이는 종교인에게는 불가능하다. 하느님이 사람이 됐다. 하늘의 법을 땅에 심는 게 우리 일이다”라고 말했다. 나승구 신부는 “촛불집회는 정치 행위다. 유관순 열사의 3·1운동도 정치 행위였다”라고 말했다. 

사제단은 창립 이후 34년을 한결같이 ‘이 시대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고민해왔다. 지금 사제단의 고민은 단연 촛불을 어떻게 할 것인가이다. 신상은 신부는 “촛불은 하느님이 개입해서 신비로움으로 이끌어가는 성사다. 좋은 곳으로 이끌어갈 것을 믿는다”라고 말했다. 문정현 신부는 확신에 차 보였다. “역사라는 게 어느 날 갑자기 온다. 우리가 어떻게 하고자 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다. 현실에 충실하면 모두가 깜짝 놀랄 만한 큰 변화로 온다.”
글로벌비전의 최근 게시물

정치·경제·사회 인기 게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