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없는 범인’만 등장했다. 연쇄살인범 유영철(2004년)과 정남규(2006년)가 그랬다. 강호순도 마찬가지다. “살인마의 얼굴을 공개하라”는 유족과 시민들의 항의가 잇따르고 있다.
경찰은 왜 강호순과 같은 흉악범의 얼굴을 가려줄까. 2004년 밀양 여중생 성폭행 사건이 계기가 됐다. 성폭행을 한 학생들의 신상이 공개되면서 인권침해 논란이 일었다. 경찰은 인권보호를 명분으로 ‘피의자 보호’ 원칙을 강화했다. 모자와 마스크를 씌워주는 경찰의 ‘관행’이 생겨났다. 이듬해 경찰청은 ‘인권보호를 위한 경찰관 직무규칙’이란 훈령을 만들었다. “경찰서에서 피의자와 피해자의 신분이 노출될 우려가 있는 장면이 촬영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본지는 “인륜을 저버린 흉악범의 인권보다는 사회적 안전망이 우선”이라고 판단했다. “경찰이 책임 추궁을 피하기 위해 훈령을 기계적으로 적용하고 있다”는 비판도 나왔다. 강호순과 같은 흉악범의 실명과 얼굴을 공개하기 위해 법조계와 법대 교수, 경찰 관계자들에게 자문했다. 실명과 얼굴이 모두 공개됐던 1994년 ‘지존파’ 사건과 96년 ‘막가파’ 사건도 참고했다.
언론법 전문가인 박용상 변호사는 “사회적 관심이 큰 중대사건의 피의자는 실명과 얼굴의 공개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피의자의 초상권도 공익적 목적에 근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과 영국은 피의자의 신원을 모두 공개하고 있다. 독일도 국민의 관심이 크고 범죄 사실이 명백할 경우 흉악범을 실명으로 보도한다.
표창원 경찰대 행정학과 교수는 “두 명 이상이 희생된 연쇄살인, 어린이 납치 유괴 살해, 불특정 다수를 살상한 다중 살인 등의 범죄자는 실명과 얼굴이 공개돼야 한다”고 말했다. “무죄추정의 원칙이라는 법적 논리와 국민의 법감정 사이의 간극을 사회적 합의를 거쳐 좁힌 뒤 공개하는 것이 옳다”(황용석 건국대 신방과 교수)는 의견도 많았다. 흉악범의 얼굴이 공개됨으로써 ▶사회적 응징에 의한 범죄 예방 효과 ▶공분의 해소 ▶추가 범죄에 대한 제보 등의 효과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 “흉악범이라 하더라도 법으로 처벌을 받아야지 감정적으로 접근해선 안 된다”는 반론도 있었다. 하태훈 고려대 법대 교수는 “일시적인 분풀이를 위해 얼굴을 공개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지적했다.
본지는 이 같은 찬반론과 언론의 사회적 책임을 고려한 끝에 강호순의 실명과 얼굴을 공개키로 했다. 강이 범행을 자백하고, 증거도 명백해 공익을 위해서라도 실명 및 얼굴 공개가 필요하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이번 사건처럼 사회적 파장이 클 경우 무죄추정의 원칙을 축소 해석할 수 있다는 법원의 유권해석도 받았다. 본지는 앞으로도 정치인, 고위 공직자 등 공인과 함께 증거가 명백한 연쇄살인범에 대해선 실명과 사진을 공개키로 했다. 흉악범의 얼굴을 공개함으로써 독자들의 제보를 활용해 경찰의 추가 수사를 도울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