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미.친 권력의 개 견찰들은 몽둥이가 약, 정의봉!

닫힘학원 작성일 09.05.20 13:2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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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미.친 권력의개 견찰들은

 

 

 

 

 

몽둥이가 약, 정의봉!



 




촛불1년 체포2900 여명 부상3300 여명 역사상 최다기록--;; (물론 여러번 체포부상 중복되는 투철한 광복투사분도 일부포함)   "완전히 인권후진국으로 퇴보"
인권위원 중 한명인 오창익 위원은 “경찰이 12살짜리 초등학생부터 82세 노인까지 체포하는 것을 보며 한계를 느꼈다. 충격적이었다”고 말했다.     pcp_download.php?fhandle=NVFYT1VAZmlsZS5hZ29yYS5tZWRpYS5kYXVtLm5ldDovRDAwMy8xLzE0Ni5qcGc=&filename=백골단.jpg       아래 두장의 사진은 위 백골단에 유일하게 맞짱을 뜨던...    

전설의 오월대, 그리고 녹두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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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녹두대/오월대가 입만 살은 조직이 아닌 실천과 행동의 조직으로 떠오르는데는 한 가지 핵심이 있었습니다. 나름대로 평가하자면 그건 규율이었습니다. 추운 겨울 철규(이철규 열사)형의 시신을 지키기 위해 병원 찬 콘크리트 바닥에서 신문을 덮고 자면서도 원칙을 지켰습니다.

자신이 근무조일 때는 병원 순찰을 철저하게 하고 휴식조일 때만 잠을 잤습니다. 그런 생활을 몇 달동안 했습니다. 가투에 투입되는 것도 오더를 받는 조만 움직였습니다. 가투에서 싸울 때도 자기 역할에 충실했습니다. 타격조 일 때와 대열 보호조 일 때 일이 달랐습니다.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것은 철저하게 금지되었습니다. 강철 같은 규율을 강조한 조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조직력은 때로 사람들을 놀래키기도 했습니다. 여의도 시위, 현대 골리앗 투쟁에도 녹두대/오월대가 투입됐습니다. 이들의 행동은 다른 조직들의 부러움을 사기에 충분했습니다.

무장한 행동조직이지만 대중들 앞에서 보여 준 절제와 규율은 대단했습니다. 전투조직으로서 강건함을 보여줄 수 있었던 것은 혼연일체와도 같은 조직력 그 자체였습니다. 몇 백 대오가 되도 투쟁에서는 하나처럼 움직였습니다.

그래서 전경들도, 백골단도 그런 녹두대/오월대를 두려움의 대상으로 삼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전대협 집회나 서대협 집회에서 보여 준 녹두대/오월대의 활약은 입을 다물 수 없을 정도로 대단했습니다. 직격탄이 날아와도 달아나지 않고 대열도 깨지지 않고 오히려 조직적으로 공격하는 무장조직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복경찰이나 백골단도 이들의 행동을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당시 이런 녹두대/오월대의 모습을 직접 목격했던 사람들은 놀라움을 경험했다고 합니다. 어떻게 저렇게 할 수 있을까. 의아함 그 자체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녹두대/오월대의 그 저력 뒤에는 철저한 규율과 실천으로 무장한 힘이 있었습니다.

녹두대/오월대가 창설됐을 때 건준위(민주총학생회건설준비위원회) 위원장이었던 백영권은 강제징집 영장이 나온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영권이는 이를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헌병대와 경찰은 그를 잡으려 혈안이 돼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태연하게 시내를 돌아다녔습니다.

바로 녹두대/오월대가 그를 보좌했기 때문입니다. 일반인처럼 다니지만 단봉(쇠파이프)을 팔에 끼고 다니는 녹두대/오월대 대원만 해도 무려 50여명이었습니다. 영권이가 커피숍에 들어가면 그들이 입구와 곳곳에서 그를 보좌했습니다. 날고 긴다는 사복조 경찰 200여명이 있어도 녹두대/오월대 50명을 잡기에는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이 떡 버티고 있으니 누구도 그를 검거할 엄두도 내지 못했던 것입니다. 87년 대선을 앞둔 터라 그런 모습은 시민들의 눈에도 자주 띄었습니다. 경찰의 무자비한 폭력을 막아내는 것을 지켜 본 시민들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녹두대/오월대가 있는 곳에선 시민들의 환호도 뒤따랐습니다. 음식과 음료수를 내 오고 때로는 담배값이라며 돈을 건네주고 가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런 녹두대/오월대는 가는 곳마다 화제를 낳았고 찬사와 부러움의 대상이었습니다. 특히 서울쪽 대학가에서는 극찬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 녹두대/오월대의 추억과 기억이 이제는 가물가물합니다. 하지만 젊은 날에 우리가 주장하고 내세웠던 것은 무엇일까요? 음모적이고 권력지향적인 것과 부정부패를 척결하고 일하는 사람들의 세상을 만들자는 것이 아니었겠는가 생각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어디에서나 살면서 그 때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당하게 살았던 그 때의 삶으로부터 지금의 삶을 영향받습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교훈은 같습니다. 규율이 없는 조직은 조직력이나 단결된 힘이 없습니다. 원칙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도 선택 앞에 늘 놓여 있습니다.

가치롭고 당당하게 살 것이냐 아니면 권력이나 자본이면 모든 걸 저버리고 노예처럼 살 것이냐를 말입니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 정의.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고, 모든 사회적 폐습과 불의를 타파하며, 자율과 조화를 바탕으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더욱 확고히 하여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게 하며,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완수하게 하여, 안으로는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 밖으로는 항구적인 세계평화와 인류공영에 이바지함으로써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다짐하면서 1948년 7월 12일에 제정되고 8차에 걸쳐 개정된 헌법을 이제 국회의 의결을 거쳐 국민투표에 의하여 개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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