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걱정 말고 공부하란 당신 말을 믿어도 되나요”
시사IN | 변진경 기자 | 입력 2009.06.11 09:51
ⓒ전문수 문화부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는 한예종 학생에게 유인촌 장관(오른쪽)이 말을 걸고 있다. 지난 5월21일 저녁 7시,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 석관동 캠퍼스 중극장에 학생 500여 명이 모였다. 이렇게 많은 재학생이 한자리에 앉은 모습을 입학한 후 처음으로 본 총학생회장 방성혁씨(03학번, 전통예술원 연희과)는 "깜짝 놀랐다". 한예종은 지난해 유효 투표율 45%를 못 넘겨 총학 선거가 무산됐고, 학칙을 조정해 유효 투표율을 40%로 낮춘 올 3월에야 가까스로 총학을 출범시켰다. 그런 학교에서 전교생 6분의 1이 모여 밤을 꼬박 새워서 토론을 벌이고 다음 날 오전 바로 비상대책위원회를 발족했다. '총학 선거도 안 하는' 한예종 학생들을 이렇게 만든 건 문화체육관광부(문화부)의 감사 결과, 그리고 이에 반발한 황지우 총장의 사퇴였다.
↑ 황지우 시인(위)은 사실상 총장직에서 ‘쫓겨났다’.
↑ 6월1일 한예종 학생들이 황 총장에 대한 부당 감사를 지탄하고 한예종 사태를 알리기 위해 연 촛불집회.
↑ ⓒ전문수 문화부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는 한예종 학생에게 유인촌 장관(오른쪽)이 말을 걸고 있다.
지난 5월18일 저녁, 한예종 학생들은 자기 학교가 문화부에서 받은 감사 결과를 언론에서 먼저 전해 들었다. 황 총장이 멋대로 근무지를 이탈하고 학교 공금을 횡령했다는 내용과 함께, 언론이 전한 감사 결과는 다음과 같은 문장을 담고 있었다. "통섭 교육 중지 및 통섭 관련 교수 징계. 이론과 및 협동과정 축소·폐지. 서사창작과 폐지." 다음 날 바로 황 총장이 '표적 감사' 결과에 의혹을 제기하며 항의성 사표를 제출했다. 문화부는 곧바로 사표를 받아들였고 동시에 황 총장의 교수직도 박탈했다. 일련의 사태 속에서 학생들은 자기 학교가 교육부 산하 '학교'가 아니라 문화부 산하 '기관'이라는 것을 처음 실감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와 국립현대미술관처럼 전 정권에서 임명장을 받았다는 이유로 수장이 쫓겨나고 조직은 갈기갈기 찢길 것이라는 예감 앞에 '몸 무거운' 학생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문화부 산하 국립 교육 기관인 한예종은 육군·해군·공군 사관학교, 경찰대, 카이스트, 한국전통문화학교와 같은 '특수 대학'이다. 1993년 국가가 전문 예술인을 양성하려 만든 종합예술학교지만, 다른 예술대학의 견제로 '국립' 자(字)를 학교 이름 앞에 붙이지도, 석사·박사 과정을 두지도 못했다. 그런데도 한예종은 인재들을 많이 키워 밖으로 내보냈다. 16년간 국내외 유명 콩쿠르에서 1위 수상자를 400여 명 냈다. 연극 < 이(爾) > 와 뮤지컬 < 빨래 > 극본·연출을, 영화 < 괴물 > 과 드라마 < 겨울연가 > 의 시나리오를 한예종 출신이 맡았다. < 달려라 아비 > 를 쓴 소설가 김애란씨와 애니메이션 < 뽀롱뽀롱 뽀로로 > 를 만들어낸 최현명·고세윤 씨도 한예종 출신이다.
역사를 쌓아가던 한예종에서 '괴담'이 떠돌기 시작한 건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부터였다. 오랫동안 학교에 몸담은 교수가 좌파로 지목되어 학교에서 쫓겨나고, 그 자리를 우파 문화 인사들이 채우고, 7개 원은 작아지거나 갈기갈기 찢겨질 것이라는 괴담이 일부 보수 문화단체와 보수 인터넷 매체에서 흘러나왔다. 문화계 보수 인사로 구성된 '문화미래포럼'이라는 곳에서 심포지엄을 열어 "본래 목적을 잃고 좌파 교수들 자리만 만들어주는 한예종을 축소·폐지하자"라고 주장하면 '미디어워치' '빅뉴스' 등 보수 인터넷 매체에서 크게 받아썼다. 이들은 진중권·심광현·이동연 교수 등 진보 진영에서 목소리를 내는 일부 한예종 구성원을 자주 인신공격했다. 그리고 그 공격 지점은 고스란히 문화부의 감사 결과문에 담겼다. 괴담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좌파 교수에게 배우니 좌파 학생?
문화부 감사 결과 가운데 한예종 학생들이 가장 기막혀 하는 부분은 '이론과 축소·폐지'다. 문화부와 보수 단체·매체에서는 한예종에 "이론 말고 실기를 공부해라"고 주문한다. 이들은 "예술 영재교육과 체계적인 영재 실기 교육을 통한 전문 예술인 양성"이라는 한예종 설치령 제3조를 근거로 든다. 하 지만 바로 앞 제2조는 한예종이 "예술 실기 및 예술 이론을 전문으로 교육"하는 학교라고 말한다. 규정을 떠나, 학생들은 예술에서 이론과 실기를 따로 공부해야 한다는 발상 자체를 황당해한다. 배뱅이굿·줄타기 같은 전통 연희를 배우는 방성혁씨는 "이론을 배워야 몸짓이 나오고 느낌이 나온다. 손 하나 들고 발 하나 드는 동작만 연습하면 그건 율동하는 로봇이지 예술 하는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론 수업이 지나치게 확대됐다는 외부 지적과는 반대로 윤지나씨(08학번, 영상원 애니메이션과)는 "나 같은 실기과 학생들은 오히려 이론 수업이 적어서 갈증을 많이 느낀다. 그래서 이론과 전공수업을 일부러 찾아 듣기도 한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문화부 관료의 생각은 많이 다르다. 6월2일 한예종 비대위 학생들을 만난 자리에서 문화부 한 간부는 이렇게 말했다. "예술학도라면 모름지기 영화 < 게이샤의 추억 > 에서 게이샤들이 걸음걸이 연습하듯이 연습(만) 해야 한다."
정부로부터 예술관을 강요받은 데 이어, 한예종 학생들은 보수 매체로부터 '좌파'라는 이념 딱지도 붙었다. 이유는 "좌파 교수에게 배우는 학생들이기 때문"이다. 한 보수 인터넷 매체는 "학생들이 한예종 사태에 저항하는 활동을 벌이는 뒤에는 이를 사주하는 좌파 교수들이 있다"라고도 보도했다. 학생들은 황당해한다. 비대위 공동위원장을 맡은 김영진씨(05학번, 협동과정 예술경영과)는 "지난해 전투경찰로 지낼 때 촛불집회에서 동료들이 많이 다치는 걸 보면서 제대한 후 절대 사회활동을 하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런데 이념을 덧씌워서 학교의 교권과 학습권을 흔드는 모습은 가만히 보고 있기가 힘들었다"라고 말했다.
보수 단체와 언론의 시나리오대로 한예종을 장악하려 한다는 비판에 문화부는 손사래를 친다. "그들의 요구와 문화부 감사 결과는 우연히 맞아떨어졌을 뿐"이라는 것이다. 문화부 유인촌 장관 보좌실의 한 관계자는 "이전 정권 시절에는 목소리를 내기가 힘들었던 문화미래포럼 등 보수 단체의 요구를 이번 정권에서는 평등하게 검토했을 따름이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일개 시민단체에 불과한 문화미래포럼의 심포지엄이 문화부 소속 한국정책방송 KTV에서 녹화 중계되고 문화미래포럼의 전 간부가 유 장관의 정책보좌관이 된 사실을 보면, 문화부가 이념적으로 한쪽으로 치우친 정책을 펼친다는 비판을 면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결정적으로 신재민 문화부 차관이 속내를 드러냈다. 한예종 교수협의회는 6월2일 신 차관이 교수들을 만난 자리에서 "황지우 전 총장이 현 정권을 지지하지 않는 것은 사실이지 않은가" "유럽에서는 좌파 정부가 집권하면 총장이 좌파에서 나오고, 우파가 집권하면 우파에서 총장이 나와 정부와 협력 관계를 갖는다"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문화부는 아직 학생들을 어린아이쯤으로 본다. 문화부 관료들은 청사 앞에서 1인 시위를 하거나 면담하러 온 학생에게 "감사는 감사일 뿐이다. 너희들 과 없애지 않을 테니 걱정 마라" 라는 이야기를 반복했다. 6월2일 면담 자리에서 학생들이 감사 결과와 향후 학교 구조조정 의혹을 계속 따지자 유 장관은 "학생 비대위가 계속 '이렇게' 나오면 이론과 서사창작과를 정말로 폐지할 수도 있다"라고 협박하기도 했다. 지난 5월22일 문화부 청사 앞에서 한예종 학생이 찍은 '유 장관 반말 동영상'이 최근 인터넷에서 화제다. 유 장관은 "공부하게 해주세요"라고 쓰인 피켓을 들고 1인 시위를 벌이는 학생 주위를 자전거를 타고 뱅뱅 돌면서 말한다. "내가 (이론과) 안 없앤다고 얘기해서 약속해줬으면 됐지, 괜히 고생하지 마. 여러분 공부하는 데 아무 지장 없어. 안심하고 공부해."
'안심하지 못한' 한예종 학생들은 학교가 제자리를 찾기까지 '저항의 축제'를 벌일 예정이다. 학생 비대위는 성명서에서 "춤추는 자는 춤으로, 노래하는 자는 노래로, 몸짓으로, 그림으로, 영상으로, 글로 예술과 학교의 자유를 소리치겠다"라고 밝혔다. 예술 하는 이들이라 1인 시위에 쓰는 피켓 디자인 하나도 예사롭지 않다. 애니메이션과 학생들은 카툰을 그려 인터넷에서 한예종 사태를 알리고 무대미술과 학생들은 학교 마당을 무대 삼아 종이비행기를 날렸다. 연출과 학생들은 "학교를 지키기 위해 춤을 추자"라는 모토로 특정 시간 한 장소에 모여 전 학우가 주유소 앞 바람풍선 인형처럼 몸을 흔드는 '스카이댄서 플래시몹'을 기획해 성공했다.
"황지우 총장이 임기 만료 후 몸담을 학과라 문화부가 기를 쓰고 우리 과를 없애려고 한다"라는 소문이 떠도는 서사창작과 학생들은 시와 산문을 써서 학교 건물 벽에 다닥다닥 붙였다. 4학년 김봉재 학생은 '거인은'이라는 시를 썼다. "…잔디를 밟고 있는 거인은 모릅니다. 아무리 밟아도 뿌리를 건드릴 수 없다는 것을, 뿌리를 밟는 순간 그가 먼저 주저앉는다는 것을…."
변진경 기자 / alm242@sisain.co.kr
- 정직한 사람들이 만드는 정통 시사 주간지 < 시사IN >